제133화
제133화 반격의 칼
프렌치아의 정점에 올라 있던 바레인가(家)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프렌치아 전역을 휩쓸었다.
수많은 입이 그 소문을 실어 날랐다.
과장해서 동네 갓난쟁이들도 이 사실을 알 정도였으니, 눈과 귀가 있다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흰 사자가 바레인가를 지목한 지 불과 한 달만의 일이었다.
다들 독립이라도 이루어진 것처럼 들떠 있었다.
밥을 먹다가도 밭일을 하다가도 용변을 보다가도 사람들은 헤벌쭉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흰 사자의 등장 이후로 삶의 낙이 될 만한 소식들이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거 보게, 내 뭐라 했는가. 흰 사자가 바레인가를 무너뜨릴 거라 하지 않았는가!”
위와 같은 소식이 들리기 전까지 프렌치아 내부는 여러 가지 의견으로 갈라져 있었다.
홀로 총독부를 뚫고 총독의 목을 베었다지만, 기습의 이점을 살렸기 때문이지 단단히 방비한 바레인가를 뚫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많았고, 공표 자체가 연막일 거라는 의견도 많았다.
물론, 흰 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들이 제일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바람대로 현실이 되었다.
이 듣고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달아오른 건 비단 프렌치아 국민들뿐만이 아니었다.
“대체 그 녀석을 어찌 막는단 말인가!”
푸른 뱀이 수놓아진 거대한 깃발이 벽면에 늘어져 있는 널따란 대전.
트레왈로가의 가주, 츠르센 트레왈로는 한자리에 모인 가신들 앞에서 침음을 흘렸다.
직계부터 봉신 가문의 가주들까지.
동부의 명문인 트레왈로가에서도 무거운 존재감을 지닌 이들이 모두 모였지만, 도통 이 난관을 타개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고블린으로 트롤을 막아야 하는 격인데…….
차라리 그건 가능성이라도 있지.
지금 상황에는 아무런 답도 없다.
츠르센은 우측에 서 있던 집사에게 눈길을 돌렸다.
“다른 가문에서는 아직 답신이 없느냐.”
“예…… 아직입니다. 하지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츠르센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트레왈로가와 함께 공표된 가문들에게 협력을 요청했으나 쉬이 움직이지는 않을 터였다.
힘을 한 점에 완전히 집중시키지 않는 한 병력의 수는 의미가 없기도 했고, 당장에 다음 순번이 본인의 가문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다들 발등에 떨어진 불씨를 꺼뜨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겠지.
“총독부에서는?”
“……아직 답신이 없습니다.”
츠르센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당장에 기댈 만한 건 제국의 지원뿐이거늘.
총독, 할렌트가 죽고 프렌치아에 소드 마스터가 등장했다는 걸 그들 또한 알았을 테니, 이대로 자신들을 내버려 두지는 않을 터였다.
이러다가는 정말 독립이라도 이루어질 판이니까.
하나, 흰 사자가 가문에 쳐들어오기 전까지 지원이 있을는지는 회의적인 상황이었다.
“하필이면 왜 우리부터 친단 말이냐. 빌어먹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분이 솟구쳐 올랐다. 그는 답답함에 옥좌의 팔걸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콰직.
분노를 담은 손끝이 단단한 옥좌를 파고들며 우그러뜨렸다.
가신들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다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묵직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대전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허. 답답하구나. 답답해.”
푸른 뱀의 트레왈로가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그저 깊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렇다고 가문을 버리고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전으로 다급한 발걸음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안으로 급히 드는 기사가 있었다.
상기된 표정의 기사가 부복하며 상황을 보고했다.
“가주 님! 총독부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몸을 벌떡 일으킨 츠르센이 눈을 부릅뜨며 다급히 말했다.
“뭐라더냐!”
가문의 멸문이 목전에 있는 상황.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그는 안달 난 강아지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기사의 입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사는 입을 여는 대신 전달받은 답신을 집사에게 전했다.
밀봉된 전서이기에 그가 내용까지는 보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 당연한 사실도 깜박했던 츠르센은 민망함에 헛기침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리 다오.”
금세 근엄함을 되찾은 그에게 집사는 답신을 전했다. 다급하지만, 최대한 여유롭게 총독부 왁스 인장을 뜯어낸 츠르센은 천천히 편지를 읽어 갔다.
그는 편지를 얼마 읽지도 않았음에도 탄성부터 내질렀다.
“허어.”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다들 츠르센의 이따금 움찔거리는 눈썹과 꿈틀거리는 입매를 보며, 서신에 담긴 내용을 유추하고 있었다.
츠르센은 별안간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음하하하하하!”
대전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호쾌한 웃음.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는 가주 덕분에 가신들의 얼굴 위로도 은근한 미소가 어렸다.
뭔지는 모르겠다만 희소식이 분명했다.
웃음을 그친 츠르센은 조금 전까지의 불안한 모습이 사라진, 일전의 진중한 모습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하늘이 트레왈로가를 버리지 않았음이야.”
그의 형형한 눈길이 대전을 쓸었다.
“3주 전에 제국의 특임기사단, 레트로이나 6검이 프렌치아에 도착했다는구나. 지금쯤이면 총독부에 도착했을 테지. 그들을 보내 주겠다고 한다.”
츠르센의 말에 다들 경악을 넘어 희열에 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격양된 표정을 누구도 숨기지 못했다.
“레트로이나 6검 말씀이십니까!”
“그래.”
다들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서로의 어벙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저변엔 살았다는 안도감이 번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대전을 무겁게 짓누르던 위기감은 찰나에 흩어졌고, 그 빈자리를 절제된 환희가 채웠다.
레트로이나 6검이라니!
그들은 제국의 자존심이라고도 불리는 최강의 무력부대가 아닌가.
아무리 흰 사자가 소드 마스터라도 그들을 당해 낼 수는 없을 터였다.
“제국에서 상황을 가벼이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
츠르센은 마치 이 상황을 예측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치 자신의 역량으로 이 난관을 극복한 듯, 이유 모를 자신감이 그의 가슴 속에 충만해 있었다.
“녀석이 소드 마스터인 것을 알았기에 확실히 처리하려는 모양인데, 흰 사자 녀석. 제 실력을 믿고 너무 날뛰었어. 쯔쯧.”
그는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흰 사자만 무용해진다면 다른 독립군들쯤이야 두렵지 않지.’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던 흰 사자가 어느새 하얀 고양이로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트레왈로가에 희망의 빛줄기가 비쳐드는 시각.
총독부 정문에는 지금 막 그곳에 도착한 이들이 있었다.
“와. 이걸 다섯 개나 뚫었다고?”
한때는 왕성의 정문이었던 웅대한 성문.
네리엔은 성문을 노크하듯 두드리며 그 강도를 가늠해 보았다.
흰 사자에게 박살이 났었기에 보안 마법의 중첩이 새로이 이뤄지는 중이라 했다.
흰 사자가 뚫을 당시에는 이보다 더 단단했다는 의미.
황성의 성문보다야 부족하지만, 강도가 만만치 않았을 터.
“정말이지 미쳤군.”
파괴력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는 홈멜스 또한 옆에서 혀를 내둘렀다.
“할 수 있겠나.”
단장, 케이언의 물음이었다.
“뭐, 못 할 거는 없지만 말입니다. 한 번에 부수기는 만만치 않을 거 같은데요.”
자존심을 내세우려 해도 쉽사리 단언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전력을 다한 일격을 가한다고 해도 열 번 중 한 번 부술 수 있을까 말까였다.
당연한 일인 게, 그렇게 쉽게 뚫을 수 있는 문이라면 굳이 성문을 왜 만들어 놓았겠는가.
파괴력만으로는 소드 마스터에 뒤지지 않는다 생각했던 홈멜스였지만, 그 생각을 조금은 수정해야 할 거 같다.
케이언이 말했다.
“한데 녀석은 그것이 가능했지.”
“살 떨리는 일이군요.”
로얀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그의 검이 얼마나 매서울지 기대가 됩니다.”
흰 사자의 막강한 전력을 대략적으로나마 가늠했음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호기심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의 검력이 얼마나 묵직할는지.
상상만으로도 벌써 손끝이 간질거릴 정도.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단원들 또한 얼굴에 호승심을 피워 올렸다.
흰 사자의 전력은 오히려 이들의 승부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케이언은 그들을 향해 당부했다.
“봤다시피 혼자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다. 괜히 승부욕 불태우지 마라. 방심했다가는 골로 갈 수 있다.”
“단장도 참. 어찌 기대가 안 될 수 있겠습니까. 벌써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요!”
벤톤이 제 가슴을 두드리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케이언은 그런 그를 보며 혀를 차고는 부단장, 로얀에게 눈길을 주었다.
“쟤 관리 잘해라. 혼자 딴짓하지 않게. 이참에 6검이 5검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만.”
“쳇! 저도 바보 아니거든요.”
케이언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흰 사자의 무력을 가늠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관광이라도 온 것처럼 여유로운 태도였다.
‘강하지만, 우리를 넘지는 못한다.’
이것이 그들 모두의 머릿속에 깔린 생각이었고, 레트로이나라는 자부심이기도 했다.
점차로 멀어지는 이들을 바라보는 기사들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그윽한 눈빛을 보냈다.
붉은 제복과 등 뒤에 그려진 태양검 레트로이나만 보아도 이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내가 저분들을 직접 뵙다니. 가문의 영광이 따로 없군.”
“그러니까 말이야. 그저 흐르는 기품만으로도 흰 사자와는 비교할 수가 없어.”
“이제 곧 흰 사자 놈의 모가지도 땅바닥을 구르겠구만.”
“그 새끼가 뒈져야 밤에 잠을 편히 자지. 요새 매일같이 악몽을 꾼다니까.”
눈앞에서 보았던 흰 사자의 무력은 하늘에 이르러 있었지만, 저들이 누군가. 제국의 정점에 이른 특임기사단이었다.
그들의 검 또한 하늘을 쪼개고 대지를 가를 터.
아무리 흰 사자라도 그들을 이길 수는 없을 거라고, 그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새롭게 총독에 부임한 2대 총독, 아르멜 아라인은 접견실에서 정중히 그들을 맞이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접견실에는 단장인 케이언과 부단장인 로얀만이 참석해 있었다.
케이언이 말했다.
“현재 흰 사자의 위치는 파악되었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동부로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트레왈로가를 목적으로 두고 있지요. 걸음을 재촉하셔도 적어도 한 달하고도 보름은 더 가셔야 할 겁니다.”
“멀군.”
케이언이 낮게 불평했다. 제국의 수도부터 동부까지, 소해를 건너고 다시 총독부까지 왔다.
그런데 또 동부로 가야 하다니.
빠듯하면서도 긴 여정이었다.
“그곳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건가?”
“정확히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현재 동부에 위치한 트레왈로 가문을 심판하겠다 공표한 상황이라서요. 최근 바레인 가문을 멸문했으니 아마 얼추 시간이 맞지 않을까 합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군.”
“예. 도저히 대응할 방도가 없는 상황입니다.”
케이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 우리가 왔겠지.”
정황을 들어 보니, 트레왈로가에서 만나는 게 최선일 듯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일찍 도착하는 게 낫겠지.
“시간을 단축해야겠다. 지나는 도시에 바꿔 탈 말을 준비해 놓을 수 있도록.”
먼 여정을 왔으나, 다들 그 정도로 피곤함을 느낄 만한 경지가 아니었다.
“그럼 언제쯤 출발하시겠습니까?”
“내일 바로 가도록 하지. 흰 사자가 트레왈로가를 심판하겠다 공표한 상황이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그 바람에 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무력을 제대로 이용할 줄 아네요.”
로얀이 차향을 음미하며 새초롬하게 말했다.
혼자 힘으로 나라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니.
무력도 무력이지만, 무력을 통해 세운 흰 사자의 상징성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저희 쪽에서는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이해하네. 그래서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 쪽에서도 공표하고 싶은데.”
“예?”
“기껏 갔는데 길이 엇갈리면 안 되잖나.”
“아. 어떤 내용을 공표하면 될까요.”
케이언의 말을 들으며 아르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반전시킬 만한 요소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가 도망치지 않고 응할까요?”
“물론.”
케이언은 자신 있게 답했다.
흰 사자가 가지는 상징성을 생각했을 때 무작정 뒤로 내빼지는 못할 거였다.
* * *
지금으로부터 2주 전.
다그닥, 다그닥.
제네스 일행과 함께 테이난가를 떠났던 루시안 일행은 긴 여정 끝에 목적지에 다다라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네요.”
손차양을 한 루시안이 낡은 건물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용병단」
이곳은 동부 독립군을 대표하는 ‘작렬하는 태양’의 본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