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제132화 무너지는 늑대 (4)
조각된 늑대 무리가 벽면을 채운 대전.
가주, 헤일런스는 뒷짐을 지고 그 웅장한 늑대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콰르르르릉!
가주전 바깥에서는 대전을 뒤흔드는 강렬한 폭발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흰 사자가 코앞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의 몸 상태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와 흰 사자를 이겨 낸다 한들, 가문을 재건할 여력은 남아 있지 않을 터였다.
이미 바레인가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10년 전에 일어났어야 할 일이지.’
그의 입가로 자조적인 미소가 맺혔다.
변절은 당시 가주였던 할렌트의 선택.
가문에서 할렌트의 입지는 절대적이었으나, 그럼에도 꽤 많은 반발이 있었다.
상당수의 혈족이 가문을 등지고 프렌치아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자연스레 변절자가 되었다.
초창기에는 바레인가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졌다며 혀를 차는 내부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끝을 모르고 성장하는 가문에, 다들 할렌트의 선택이 옳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 모르고.’
가문의 영화를 위해 나라를 팔았으나, 그 영광을 누린 건 고작 10년.
그 대가로 가문은 변절자가 되어 이 순간 침몰하고 있었다.
왜일까.
문득 왕비, 세이넨과 나눴던 마지막 대화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왕궁이 불타오르던 날.
자신은 할렌트의 명으로 그녀를 찾았었다.
-바레인가가 변절을 선택했다는 겁니까.
자신을 뚫어지게 직시하던 그 서늘한 눈동자가, 여전히 잊히지 않고 똑바로 기억났다.
-그래서 저 보고 지아비와 자식을 적에게 넘기고 나라와 국민을 배신하면서까지 살아남으라고요?
-가주는 어찌 그런 선택을 했답니까!
-대체 무엇을 위해서요! 제 몸에 바레인가의 피가 흐른다는 게 처음으로 낯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온 국민이 나라를 위해 싸우는데, 그동안 권세를 누려 온 바레인가가 그들을 저버리다니요.
벌레 보듯 경멸하는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처음 보는 눈길이었다.
-가서, 할렌트에게 전하세요.
-저는 그 뜻을 따를 수 없다고. 왕비가 된 후로 저는 왕가의 사람이 되었으며, 바레인가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고. 또한 왕비는 그것을 다행이라 여기고 있으며, 지아비와 함께. 나라와 함께. 이곳에서 죽을 것이라고. 그렇게 전하세요.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언제나처럼 곧았다.
어렸을 적부터 그런 아이였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친절하나 분별이 확실한, 똑 부러지는 아이.
자신이 말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후회는 오라버니가 하게 되겠죠.
-저는 그저 가문의 그릇된 선택에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어떻게 그런 선택을……. 프렌치아를 위해 충정을 바쳤던 선조들께서 통탄하실 겁니다.
세이넨은 그렇게 왕과 함께, 나라와 함께 죽었다.
당시에는 후회하게 될 일은 없을 거라 장담했는데.
훗날, 명예와 바꾼 실리가 가문을 얼마나 부흥시켰는지 보여 주려 했건만.
그것만이 이 선택을 조금이나마 이해받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건만.
이래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결국, 세이넨의 말이 옳았다.
바레인가는 프렌치아가 멸망하던 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해야 했다.
명예와 함께 멸문한 가문들처럼.
이렇게 허무하게 스러질 것이었다면 말이다.
참으로 변절자다운 생각이 아닐 수 없으나, 그저 죽음 앞에서 뱉는 작은 넋두리일 뿐이었다.
가문이 하루아침에 멸문하는 중이었으니까.
“…….”
언젠가부터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지독한 적막이 대전에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콰아아앙!
뒤편에서 선명한 폭발음이 울었다.
대전의 거대한 문이 터져 나간 것이다.
저벅, 저벅.
적막한 홀에 그의 발걸음이 울렸다.
헤일런스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의 앞으로 솟아나듯 나타나는 다섯 개의 그림자.
가주의 안위를 지키는 바레인가의 숨은 송곳니.
그들의 앞에서 흰 사자는 걸음을 멈췄다.
‘……정녕 괴물이군.’
헤일런스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수없이 많은 이들을 베고 이곳에 왔을 텐데도 그는 말끔했다.
어느 누구도 그의 발목을 잡지 못한 것이다.
헤일런스는 명을 기다리는 자신의 그림자들을 향해 말했다.
“그동안 수고했다.”
그것은 죽으라는 명령인 동시에, 그들에게 전할 수 있는 마지막 격려였다.
“충!”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흰 사자를 향해 쇄도하는 이들.
흰 사자 또한 자세를 낮추며 숨은 송곳니를 마주해 갔다.
여전히 경쾌한 그 움직임을 따라 검을 쥔 손이 흐릿해진다.
동시에 손끝에서 핀 섬광이 사위를 점해 오던 그림자들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콰과과과광!
대전에 깔린 대리석이 그 여파에 쪼개지고 갈라지며 뿌연 구름을 일으켰다.
가주의 그림자가 되기 위해 고도로 단련된 이들이었음에도, 흰 사자의 일격에 한 줌 핏물이 되어 바닥에 뿌려졌다.
그가 가신들과 혈족들을 어떻게 뚫고 왔는지가 한눈에 보였다.
“참으로 허무하군.”
헤일런스는 이를 악물며 검병을 움켜잡았다.
흰 사자의 아득한 검격에 순전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대체 어떻게 한 명의 인간이 이만큼이나 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저항의 의지조차 꺾어 버리는 압도적인 무력.
재해가 휩쓸고 간 농경지를 바라보는 농민의 마음이 이러할까.
가문만을 위해 몸 바쳤던 생애가 한순간에 덧없이 흩어지는 듯했다.
결과는 빤했다.
그럼에도 헤일런스는 흰 사자 앞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것이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 * *
“참으로 허무하군.”
헛헛한 목소리와 함께 검을 쥐는 헤일런스 바레인.
나도 안면이 있는 자였다.
어머니를 아꼈던 외숙부로 기억한다.
왕궁에도 자주 놀러 왔었지.
그는 언제나 나를 환히 웃는 낯으로 대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결연하다.
“그동안 쌓아 올린 탑이 이리 한순간에 무너질 줄이야.”
스르렁.
칼날이 드러나는 동시에 대전의 공기가 서늘하게 일어선다.
바늘의 첨단처럼 뾰족하게 솟구치는 기세.
처음부터 전력을 다할 작정인 듯했다.
자신의 패배를, 바레인가의 멸문을 이미 상정했겠지.
“억울한가.”
“그럴 리가.”
그는 억지로 입매를 비틀었다.
자신들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터.
쿵!
녀석의 발끝에서 묵직한 울림이 일었다.
화살처럼 쏘아지는 신형을 칼날이 뒤따랐다.
여러 방위를 동시에 점해 오는 빽빽한 송곳니.
거대한 늑대가 아가리를 쩍 벌리며 주둥이를 들이미는 듯하다.
나는 그것의 궤도를 손쉽게 틀었다.
콰가가가각!
검기와 검기가 엇갈리듯 맞부딪치며 푸른 전격이 일다가 이내.
카앙!
녀석의 칼날이 반으로 잘린 채 천장까지 높이 치솟아 올랐다.
“죽어랏!”
그럼에도 그는 반밖에 남지 않은 칼날 위로 푸른 섬광을 피워 냈다.
강제로 빚어 올려진 검강.
선천지기까지 끌어 쓴, 생을 쥐어짠 전력이었다.
콰아아아앙!
나는 그것마저도 단숨에 부수어 버렸다.
산산이 깨져 흩어지는 칼날 속에서도 녀석은 주먹을 쥐고 몸을 던졌다. 나는 그런 녀석의 측면을 휘돌아 뒤를 점했다.
긴말은 필요치 않았다.
촤-악!
그가 뒤로 도는 동시에 새하얀 섬광이 녀석의 목을 치고 지나갔다.
목에 붉은 선을 그리며 풀썩 쓰러지는 바레인가의 정점.
콰득.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던 칼날이 그제야 벽에 박혀 들며 소리를 내었다.
벽면에는 늑대 무리가 양각되어 있었다.
부러진 칼날은 그 중심에 선 우두머리의 머리통에 박혀 있었다.
헤일런스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이로써, 바레인가는 멸문한 것이다.
화르르륵.
어둠을 집어삼킨 거대한 불길이 가주전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정원으로 나온 나는 그 불길을 잠시 지켜보았다. 프렌치아의 정점에 올라 있던 가문이 한순간에 재로 화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바레인가의 씨를 말려 버린 건 아니었다.
그들의 어린 자식들과 부인들도 남아 있었다.
변절의 죄로 구족을 멸해야 하지만, 나 혼자 힘으로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남은 이들의 죄는 나라를 완전히 되찾은 뒤에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쿠구구구궁.
벌겋게 타들어 가면서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가주전이 결국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것을 본 나의 입가로 씁쓸함이 맺혔다.
그냥.
어머니가 이 광경을 보고 계신다면 슬퍼하실 거 같아서.
사랑했던 가문이 불타오르는 광경에.
죽은 형제들의 처절함에.
그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에.
눈물을 흘리실 테지.
하나,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형제와 가문만큼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셨기에.
그들의 죄는 죽어 마땅했고, 나라를 변절한 가문의 멸문은 당연했다.
내가 아는 어머니는 혈육의 정에 이끌려 그들의 죄를 작게 보실 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엄격히 그들의 죄를 추궁하셨을 테지.
따뜻하고 여리지만, 예와 법도만큼은 누구보다 중요시하는 분이셨으니까.
그래도 가문이 멸문한 오늘 하루 정도는 그들의 죄를 애도하시지 않을까.
어머니가 나고 자란 저택을 집어삼키는, 이 거대한 불길을 바라보면서.
* * *
다음 날.
새털구름이 푸른 하늘에 걸린 이른 아침이었다.
우리는 바레인에서 벗어나, 우리가 지나온 길이 훤히 보이는 한적한 산기슭에 있었다.
이 들판을 따라가다 보면 그곳에는 테이난이 있을 터.
이 자리를 찾기 위해 알렌과 이리엘은 바레인 지부의 지부장을 아침부터 쥐 잡듯 잡았었다.
우리 앞으로는 봉긋이 솟은 작은 봉분이 있었다.
방금 쌓아 올려 황갈색의 짙은 황토로 덮인 봉분이었다.
“이쯤이면 만족하지 않을까.”
알렌이 삽자루를 땅에 꽂으며 얼굴에 묻은 흙을 소매로 닦아 냈다. 이리엘도 몸에 묻은 흙먼지를 팡팡 털어 내며 답했다.
“분명 그럴 거예요.”
봉분의 주인은 마르켈이었다.
“끼잉.”
네스도 그의 죽음을 아는지 납작하게 엎드려 침통해했다. 이리엘이 네스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아내를 만났겠죠?”
“분명 그럴 거야. 지금까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지.”
알렌이 씁쓸하게 답했다.
둘은 깊은 감상에 젖어 있었다. 지난 3주간 한솥밥을 먹었던 자였다. 그간 쌓인 정이 얕지는 않았다. 나도 마르켈의 봉분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삶을 놓아 버린.
“한심한 놈.”
내 말에 알렌이 애잔한 눈길로 그를 대신해 내게 변명했다.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은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세상을 잃은 기분이었겠죠. 그것도 모르고 3년을 고생했으니 더 마음이 곪았을 겁니다.”
“맞아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리엘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녀 또한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었다. 누구보다 그 아픔을 공감할 수 있었을 테지.
나도 마르켈의 마음이 어땠을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렇게까지 공감 능력이 없지는 않았다.
많이 힘들었겠지.
갑작스레 아내를 잃은 그의 삶이 얼마나 쓰라렸을까.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거다.
죽고 싶었겠지.
하지만.
나까지 그 죽음을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내를 잃은 이들이 모두 제 삶을 놓는 건 아니다. 삶의 이유를 잃었다고 모두 제 손으로 제 삶을 놓지는 않는다.
그들이 살아가는 건 아내를 덜 사랑해서도 아니고, 삶의 이유가 덜 소중해서도 아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대부분 그 아픔을 딛고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그 아픔에 둔해지기도 하고, 새로운 행복을 맞이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그 아픔 속에 짓눌려 일생을 그늘 속에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도 어쨌든.
그들은 살아간다.
하지만 녀석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가짜 왕세자 때와는 경우가 달랐다.
녀석은 제대로 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그것은 모순적이지만,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본인을 살렸다.
하나 이자는 죽기 위해, 죽을 것을 빤히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그것은 같은 죽음이라도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마르켈의 마음은 단단했지만 어긋난 것이었다.
그의 삶이 안타까워도, 나는 그저 애석해할 뿐 그의 선택을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죽음으로 홀가분해졌을 테니, 그도 내 이해 따위는 필요 없을 테지.
“가자.”
나는 녀석의 무덤에서 무심히 몸을 돌렸다.
다음 목적지는 동부에 위치한 창기사의 가문, 트레왈로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