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제131화 무너지는 늑대 (3)
몇몇 방계 혈족과 가신들이 모여 만들어 낸 검진.
바레인가에 속한 이들이라면 반드시 익혀야 하는 ‘무리 지은 늑대’였다.
늑대는 홀로 싸울 때보다 무리 지었을 때 강해지는 법.
합을 맞춘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모두 바레인가의 기본 검술에 기반한 무위를 가지고 있었고, 해당 검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기에 짧은 시간 내에 검진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흰 사자의 날카로운 발톱 앞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지만.
콰가가가각!
초승달 형태로 흰 오러(검기)가 검진을 내달린다. 그 앞에 놓인 것들을 모조리 갈라 버리며.
그것들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발톱이 긁고 지나간 자국처럼 깊은 고랑이 남아 있었다.
그 위로 바레인가의 핏물이 고여 든다.
“이 개X은 새끼가! 감히!”
처참히 쓸려 버리는 아군을 보면서도 제 몸을 돌보지 않으며 달려드는 이들.
콰과과과광!
오러와 오러가 맞부딪치며 우레와 같은 굉음이 일었다. 동시에 사방으로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가는 이들이 있었다.
흰 사자의 검격은 무자비했다.
발광하는 푸른빛이 이지러질 때마다 붉은 핏물이 이곳저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고함과 비명만이 아스라이 흩어진다.
그의 검에서 뿜어진 섬광은 지우개처럼 바레인가를 지워 가고 있었다.
소란스러웠던 전장이 점차 고요해져 간다.
단단했던 전열이 창졸간에 무너져 있었다.
아르세올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흰 사자는 조금 전까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호흡이 골랐다.
그가 검을 쥔 자세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자는 지치지 않았다.
그렇게 판단한 아르세올이 남은 자들에게 소리쳤다.
“놈을 지치게 해야 한다! 최대한 물고 늘어져! 팔이 잘려도 목이 베여도 죽어서도 달려들어라!”
이미 무너진 검진을 유지하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어차피 놈을 막을 수는 없어.’
그렇다고 온전히 보내 주지는 못한다.
그는 자신의 처절한 죽음을 결심했다.
어떻게 해서든 놈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물고 늘어지는 것.
그래서 조금이라도 녀석을 지치게 하는 것.
그것이 목적이었다.
자신만 그런 각오를 다진 게 아닌지, 다른 이들 또한 극렬하게 몸을 던지고 있었다.
가문의 영화를 함께했던 봉신 가문의 가주와 가신들이 마지막 불꽃을 활활 태웠다.
제 몸을 돌보지 않는 필사의 각오.
그 절박한 검격들이 흰 사자에게 떨어지고 있었다.
녀석의 손끝에서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콰과과과과과!
일대 반경을 그대로 밀어 버리는 휘황한 빛의 폭발.
반원을 그린 빛의 장막이 크기를 키우는 동시에 주변의 공간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구오오오오오.
빛무리가 사라지고 드러난 광경은 참혹했다.
제 목숨도 돌보지 않고 몸을 던졌던 이들이 모두 처참히 죽은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그 중심에 여전히 고고하게 서 있었다.
늑대 무리를 홀로 휘젓는 흰 사자.
그의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저항조차 용납되지 않는 재앙과도 같이.
“으아아!”
기합과 같은 비명이 잠깐의 적막을 부순다.
다시금 녀석을 향해 몸을 던지는 가신들.
오른팔이 잘린 자는 왼팔로 검을 쥐었고, 양팔이 잘린 자는 입으로라도 검병을 물고 달려들었다.
다리가 잘리고 허리가 잘려도 그의 발목을 잡기 위해 바닥을 기었다.
그를 내원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서.
바레인가를 멸문할 존재를 이곳에 잡아 두기 위해.
“끄아압!”
아르세올 또한 그 처절한 전장에 제 몸을 던졌다.
사력을 다한 일검.
그 어느 때보다 깔끔히 그려 낸 궤적이었다.
전장에서 벼려진 집중력이 자신의 검력을 한 단계 성장시킨 듯했다.
흰 사자는 등을 보이고 있었다.
녀석을 벨 수 있다!
손끝에서 확신이 든 순간에, 녀석이 뒤로 돌았다.
흰 사자의 정면이 시야에 채 다 담기기도 전에 새하얀 섬광이 눈앞에서 이지러진다.
콰직!
무언가 반응할 새도 없이 세상이 빙글 돌았다.
옆으로 누운 세상에 다시금 흰 사자의 등이 보였다.
아르세올은 끝까지 그 등을 쫓으려 했으나, 그의 몸은 저편에서 힘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 * *
적들의 검진은 제법 날카로웠다.
전체적인 대형을 연습할 시간이 길지 않았을 텐데도 막강한 전력.
아무래도 바레인가의 가신들인 듯한데,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것이 총독부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결과는 다르지 않지만.
풀썩.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녀석마저 차가운 바닥에 허물어졌다.
내 주위로 붉은 핏물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그 위로 시체들과 그들이 쥐었던 병장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그 사이를 걸었다.
늑대의 송곳니는 부러졌다.
저벅, 저벅.
다시 하나의 문을 넘자, 너른 정원이 드러났다.
그 뒤로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가주전.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품은 대저택.
나는 내 앞으로 도열한 이들을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실제의 풍경이 합쳐지며 생생한 장면으로 심상에 흐른다.
그런 내 귀로 서늘한 음성이 내렸다.
“감히 이곳까지 발을 디디다니.”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에 눈꺼풀을 들었다.
앞으로 도열해 있는 70여 명의 인물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익숙하게 다가오는 얼굴들도 드문드문 있었다.
바레인가의 혈족들.
면면을 보니 직계와 방계는 물론이거니와 장로들까지 모두 모인 듯했다.
이들이야말로 바레인가의 정수.
그들이 굳은 낯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용케 이곳에서 기다렸군.”
내가 저들이 쌓아 올린 것들을 짓밟으며 걸어올 때, 당장에라도 뛰쳐나오고 싶었을 거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은 생살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었을 테지.
그럼에도 그들은 기다렸다.
지친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하지만 이를 어쩌나.
나는 여전히 지치지 않았는걸.
“건방진 놈. 가면을 벗고 정체를 밝히거라.”
늙은 늑대가 눈에 시퍼런 안광을 발하며 으르렁거렸다.
그 주위로도 머리가 센 백발의 인물들이 있었다.
최전선에서는 물러나 있었을 이들.
젊었을 적 혈기는 없으나 기세는 날카로웠다. 나이가 들며 쇠약해진 근육은 마력으로 충분히 보완이 가능할 터. 만만히 볼 자들은 아니었다.
바레인가 쪽에서도 나를 막는 데 사활을 건 듯했다.
그도 그럴 게, 그들에게는 도망칠 명분이 없었다.
흰 사자가 전대 가주인 할렌트의 목을 벤 것을 떠나서, 내 선전 포고를 피해 도망친다면 그들의 명예는 땅바닥에 곤두박질칠 테니까.
지킬 명예가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변절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세간의 평가와 스스로 세운 긍지는 별개이니.
정체를 밝히라 호통하는 이에게 내가 말했다.
“주인을 물었던 개X끼들에게 밝힐 정체는 없다.”
“끄응.”
그는 주름진 얼굴을 붉히며 화를 삭였다.
당장에 마땅한 대꾸를 할 수는 없었을 테지. 명백한 사실이니까.
“그렇게 나온다면 네놈의 목을 베어 내고 확인하면 그만이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들이 검을 쥐며 전면으로 나섰다.
언젠가 바레인가를 가장 앞에서 이끌었을 노장들.
이번에는 가문을 위해 가장 먼저 죽을 요량인 듯했다.
나는 그런 이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조금 전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무리를 짓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움직임으로 보아 합을 맞출 수 있는 소수로 여러 무리를 편성한 듯했다.
한꺼번에 달려들기보다는 차륜전을 구사하고자 하는 건가.
이 또한 ‘무리 짓는 늑대’의 변형인 것 같은데.
“흥이 났으면 좋겠군.”
녀석들의 낯빛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는다.
가문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일에 흥을 돋우어 달라니.
눈이 돌아갈 만도 했다.
“이런 고얀!”
노성을 터트리며 쇄도해 오는 이들.
모두 다섯이었다.
젊었을 적만큼은 못하겠지만, 노련미가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쇄애액!
대기를 가르며 떨어지는 송곳니들.
수많은 이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을 늙은 늑대들의 능수능란한 이빨이, 사위를 헤집으며 떨어져 내렸다.
세월의 축적으로 다져진 효율적인 검격.
그 궤적에서 그들이 넘어온 전장이 실타래처럼 풀어져 나온다.
나는 그것에 맞서 검을 그었다.
푸른 섬광이 세차게 타오르며 빛을 발했다.
콰과과과과광!
팔의 궤적을 따라 사위를 휩쓰는 검기의 파랑.
흩뿌려진 칼날이 노장들의 몸을 찰나에 갈라 버리고 지나간다.
후두두둑.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핏물과 육편들에, 장내에는 잠깐의 정적이 일었다.
호기롭게 나선 다섯의 노장이 단 일격에 참살당한 탓이다.
칼날에 사정을 둘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날카로이 벼렸다.
적들의 검에는 동귀어진을 노리는 처절함이 담겨 있었다.
적당히 어울려 주겠다는 애매한 각오로 상대했다가는 자칫 피곤해질 수 있다.
나는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이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음.”
* * *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파르탄 바레인은 형제들을 단칼에 찢어발기는 흰 사자의 검을 보며 아득한 벽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대항할 수 있는 무력이 아니었다.
바레인가의 이빨은 그에게 조금도 닿지 못했다.
그야말로 심판의 검.
자신들은 그 칼날에 처형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무너지고야 마는 것인가.’
그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진한 탈력감이 전해졌다. 300년을 넘어서는 가문의 긴 역사가, 하룻밤에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눈앞의 현실이 꿈결처럼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문은 세워진 이래 가장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나라를 변절했다는 오욕을 감수한 대가로 얻은 이득은 컸다.
총독, 할렌트를 등에 업고 왕가에 비견되는 권력을 누려왔음이다.
그런데 그 높디높은 위상이.
지난 10년간 쌓아 올린 막강한 권세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고작 한 사내에 의해.
‘이럴 수는 없다.’
그는 이를 악물며 검을 세게 움켜쥐었다.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음이야.’
그의 안광이 시퍼렇게 타오른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명예를 버리고 취한 실리.
그 끝이 이리 허망해서는 안 됐다.
어떻게 해서든.
몸이 갈가리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저 녀석을 막아 내야 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흰 사자를 막기만 한다면.
저 녀석을 이겨 내기만 한다면.
가문은 그것을 발판으로 다시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다시금 흰 사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흘렀다.
조금 전 나섰던 형제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녀석 주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그는 결연한 걸음을 옮겼다.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녀석의 몸에 칼을 꽂겠다는 일념 하나로.
쾅!
발끝에서 지반이 폭발하듯 터져 나간다.
전력을 다한 걸음.
함께 나선 이들 모두 한마음이었다.
“끄아압!”
제 한 목숨은 돌보지 않은 채, 오직 적의 숨통만을 끊겠다는 독기가 서린 검.
혼신의 전력을 담은 궤적을, 단 하나의 섬광이 꿰뚫는다.
콰직!
선뜩한 무언가가 가슴께를 스쳐 지나갔다.
가슴팍이 서늘하면서도 뜨거우면서 휑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지 않았다.
하나, 그럼에도 흰 사자에게 검을 내지르려 이를 악물었다.
비틀거리던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풀썩, 바닥에 쓰러진다. 차디찬 바닥을 흐르는 뜨거운 핏물이 볼을 적셨다. 부릅뜬 눈은 현실을 부정하듯 흰 사자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정원에는 더 이상 살아 있는 늑대가 존재치 않았다.
흰 사자는 다시금 고요해진 장내를 가로질러 가주전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화르르.
늘어뜨린 칼끝에서부터 화마가 타오른다.
콰아아앙!
그것이 가주전을 기다랗게 가로질렀다.
건물의 외벽을 가로지르는 선명한 검흔이 남았다.
깊게 새겨진 흔적에서 일어난 불꽃이 차차 주변을 삼키기 시작한다.
이 안에는 현 바레인가의 가주, 헤일런스 바레인이 있을 터.
흰 사자는 화마가 온전히 가주전을 삼키기 전에, 그의 목을 베고 나올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