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제130화 무너지는 늑대 (2)
화르르.
대기를 가르는 칼날 위로 맹렬하게 불꽃이 타올랐다. 시뻘건 불길이 사위를 단숨에 휘감았다. 검이 그어지는 궤적을 따라 염화가 기다란 곡선의 수를 놓았다.
마치 화룡이 꽈리를 틀며 몸을 뒤틀듯, 주변을 짓이겨 버리는 화염의 춤.
콰과과과과광!
그 강맹한 일격이 강화기사들을 쓸어버린다.
자연적으로 일어난 불길이 아닌, 내력에 속성을 부여하여 피어난 불꽃.
그것의 생명력과 지독함은 악랄했다.
그저 화염이 스친 자리에서도 거센 불길이 타올랐다.
일대를 뒤엎는 뜨거운 열기.
내 주변을 화염이 뒤덮고 있었다.
절단 난 강화기사들의 시체는 그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어 흩날렸다. 빈 갑옷만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뜨겁게 달궈졌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단숨에 3분의 1에 달하는 강화기사들이 쓸려 나갔다.
눈을 회까닥 뒤집은 주르하가 검은 뇌전을 떨어뜨렸다.
콰자자자자작!
주위로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낙뢰.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내게 집중적으로 떨어지며 일대를 단숨에 초토화한다.
발바닥에 위치한 용천혈에 진기가 닿는 순간, 신형이 구름처럼 불어나 뇌전 사이사이를 누빈다.
그러다, 쿵!
찰나에 벌어진 빈틈 사이로 나는 내달렸다.
번갯불 사이를 쾌속하게 가로지르는 신형.
수직으로 들이치는 벼락의 틈새로 수평의 벼락이 뻗어졌다.
천령신공 보법편.
제2장 추뢰(追雷).
자리에서 푹 꺼지듯 점멸한 신형은 어느새 녀석의 앞에 있었다.
푸확!
불꽃을 품은 검력이 사선으로 떨어지며 녀석의 몸뚱이를 절단 냈다.
동시에 황금빛 가루로 흩어지는 녀석.
굳은 낯빛의 주르하가 저편에서 불쑥 솟아났다.
죽다 살아난 표정의 그가 나를 가리키며 악을 써 댔다.
“어서 놈을 죽여라!”
녀석의 명령에, 아직 죽지 못한 이들이 달려들었다. 조금 전 시체마저도 불태우는 그 잔혹한 일격을 보았음에도 그들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불꽃을 향해 제 몸을 던지는 부나방처럼, 그들은 제 몸을 던졌다.
화르르!
칼날에 불길이 타오른다.
쾅!
눈앞에서 떨어지는 묵직한 검을 쳐 낸다. 동시에 칼날 위로 타오른 불꽃이 마치 살아 있는 용처럼 꿈틀거리더니 녀석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단숨에 타올라 재가 되어 사라지는 녀석.
나는 녀석을 뒤로한 채 내게 쇄도해 오는 이들에게 쏘아졌다.
꿈틀거리는 화룡(火龍)이 사위를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생명을 가진 듯 강화기사들을 통째로 삼키며 그들을 태웠다.
나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런 나를 따라 화룡은 먹구름 사이를 누비듯 검은 갑옷 일색의 강화기사들을 가로질렀다.
한바탕의 검무.
끊이지 않는 우아한 궤적이, 흐르듯 이어진다.
그러다 이내 춤사위가 멎었다.
더 이상 함께 어울릴 이들이 존재치 않았다.
주변은 내가 피워 낸 불꽃들만이 살아남아 일대를 태우며 일렁이고 있었다.
주르하는 그 중심에 선 나를 착잡한 기색의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 새끼들을.”
“황제의 직속 친위대라고.”
내 물음에 녀석이 내게 도끼눈을 떴다.
“그런 자가 프렌치아에 온 이유가 뭐지.”
불멸의 부대 때문만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존재가 그다지 유용치 않았다. 가짜 얼굴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라고 해도 제국으로 돌아갈 시간은 충분했다.
녀석은 나를 비웃듯 웃음을 흘렸다.
“클클클. 이유는 무슨. 이곳에서 마음껏 실험하기 위함이지. 실험 쥐들이 넘쳐나는 곳 아닌가.”
예상은 했다.
오직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따로 목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기에 물었을 뿐.
반응을 보니 있어도 쉽게 말해 줄 요량은 없는 듯한데.
그렇다면 더 말 섞을 이유가 없다.
녀석이 죽을 이유는 이미 차고 넘치기에.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게 해 주마. 그걸로도 네 죄를 씻기에는 부족하겠지만.”
“감히-.”
쾅!
말을 걸음으로 자르며 쇄도했다.
간격이 찰나에 흩어지고, 나는 녀석을 사선으로 베어 가고 있었다.
촤악!
애먼 허공만이 갈라졌다.
동시에 주변으로 솟아나는 수십 발의 마력탄.
이미 내 공격을 예상하고 준비한 듯했다.
콰과과과광!
수십 발의 마력탄이 한 점으로 뭉치며 터져 나간다.
하나, 나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
황금빛으로 물들며 셋으로 나뉘는 녀석.
마찬가지로 세 갈래로 나뉜 검기가 푸른 실을 달고 날아가 분신들의 심장을 단숨에 꿰뚫는다.
쾅!
그리고 동시에 걸음을 박찼다.
“히익!”
눈앞에서 불쑥 솟아난 나를 보며 숨을 들이켜는 녀석.
마법사 놈이 아무리 달려 봤자 이런 잔재주로는 내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었다.
피슈슈슈슛!
허공에서 솟아난 검은 가시들이 검은 창처럼 쏟아졌다. 동시에 뒤편에서 돌아오는 은밀한 칼날들이 있었다.
벗어날 방위를 모조리 선점한 치밀한 공격.
손끝을 따라 발한 새하얀 섬광이 그것들을 모조리 부쉈다.
콰과과과광!
그 사이로 쏘아진 비검기가 녀석의 목을 잘라 냈으나, 이내 황금빛 가루로 날리며 사라진다.
번거롭기는.
나는 저편에서 솟아나 도망치는 녀석의 뒤를 단숨에 잡았다.
콰앙!
수평으로 그어지던 검이 단단한 배리어에 부딪혀 막혔다. 식은땀을 흘리는 주르하가 두 손을 앞으로 뻗어 배리어를 형성하고 있었다.
나아가고자 하는 힘과 밀어내는 힘이 서로를 밀어붙이며 수평을 이뤘다.
“이제 분신을 만들어 낼 여력이 없나 보지?”
“클클클! 과연 그럴까!”
목소리가 들려온 건 뒤편이었다.
동시에 뒤에서 휘몰아치는 마법이 있었다.
멀티캐스팅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여러 마법의 연계가 부드러웠다. 그쪽으로 별다른 지식은 없지만, 나와의 근접전에서 이 정도로 실력을 발휘한다는 건 그의 마법적 역량을 가늠케 했다.
콰과과과광!
강력한 폭발과 함께 세찬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었다. 녀석의 마법은 제 분신과 애먼 지반만 부순 채 스러졌다.
지반을 박차며 녀석에게 쏘아졌다.
그런 내게 분화되어 쏘아지는 검은 칼날들.
마치 살아 있는 새처럼 비행하며 날아든다.
공간을 자르는 절삭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검을 휘둘렀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4장 광휘폭검(光輝爆劍) 방(防).
찰나에 내 중심으로 응축되는 검막.
콰과과광!
그것은 녀석의 배리어와 비슷한 효과를 발휘했다.
주변을 쓸어버리는 광역기의 무공을 호신의 용도로 사용한 것이다.
“뒈져랏!”
내가 발을 디디기 무섭게 다시 한번 뇌전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 반경이 일대를 덮을 정도로 광범위했다.
그것들이 내 그림자를 찢으며 뒤로 흩어져 간다.
쾅!
다시금 걸음을 박차자, 나를 잡기 위해 바닥에서 솟아난 수식의 끈들이 달려들었다. 불온한 기운이 담긴 것을 보니, 저주 마법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천령신공 심법편.
무극천승심결(無極天昇心結).
나를 중심으로 고리처럼 일어난 푸른 파동이 일대의 공간을 밀어냈다.
나를 감으려던 끈은 그것에 닿아 가루처럼 파스슥 부서져 내렸다. 무극천승심결의 내력은 정심한 기운이었다. 흑마법과 같은 혼탁한 기운에 오히려 더 큰 효과를 발휘했다.
“빌어먹을!”
제 마법들이 모두 실패하자 녀석은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이미 녀석의 앞에서 검을 그어 가고 있었다.
직선으로 그어지는 새하얀 섬광.
콰아아앙!
그것이 녀석을 앞에 두고 멈췄다.
칼날이 거뭇한 바람의 장벽에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멈춰 있는 검을 본 녀석이 식은땀을 훔치며 소리쳤다.
“네놈이 과연 배리어를 뚫을 수 있을까!”
튕겨 내는 반동을 향해 휘돈 몸이 반대쪽 측면을 베기 위해 파고든다.
콰아아앙!
배리어를 보다 깊게 파고들었지만, 녀석을 베지는 못했다.
“네놈은 날 죽일 수 없어! 배리어의 강도는 미스릴을 넘어서느니라! 마력을 두른 검으로도 절대 훼손할 수 없다고!”
나는 날 밀어내는 배리어의 반(反)탄력을 이용해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금 앞으로 쏘아지며 검을 뻗었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2장 흑관섬(黑貫閃).
칼끝에 타오르는 선연한 강기.
응축된 푸른 섬광이 배리어를 뚫고 들어갔다.
콰아아아앙!
“끌끌끌! 벨 수 없대도!”
한층을 뚫어냈음에도 검은 여전히 무언가에 막힌 듯 나아가지 못했다.
배리어는 아무래도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듯했다.
구구구구구구!
두 개의 힘이 수평을 이루며 집중된다.
일대가 그 충격파에 밀리며 지반이 움푹 가라앉았다.
콰드드드득.
시리게 푸른 칼날이 파고들수록 녀석은 배리어에 강도를 높이며 칼날을 밀어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주르하가 흉측한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배리어에 두께를 더했다.
쿠구구구구구!
서로를 밀어내는 힘이, 힘을 더하며 일대의 지반이 다시 한번 움푹 가라앉는다.
두 개의 힘이 한 점에서 격돌하고 있었다.
상황은 자연스레 힘겨루기로 들어갔다.
“크헬헬헬! 네놈이 과연 이 몸의 막대한 마력을 버틸 수 있을까!”
녀석은 배리어의 강도를 더하며 웃어 댔다.
아무래도 마력의 양에 자신이 있는 듯했다.
하나 녀석은 몸을 피하지도, 다른 마법으로 나를 견제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방어에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
전력과 전력이 부딪치고 있기에 녀석은 더 이상 멀티캐스팅을 할 여력이 없는 듯했다.
분신도 만들어 내지 못하겠지.
나는 힘을 더하여 녀석을 더욱 몰아붙였다.
흉측한 얼굴이 더욱 사납게 일그러졌다.
천지가 뒤틀리듯 굉음이 일어나는 공간, 두 개의 힘이 끊어질 듯 팽팽히 당겨진다.
그 안에서 내가 말했다.
“마르켈이란 자가 있다.”
“뭐?”
소음을 뚫고 들어간 목소리에, 그는 안면을 비틀었다.
“네놈이 죽인 리에나란 여인의 남편이지.”
“크윽.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그가 전해 달라더군.”
점차 밀고 들어오는 칼날에, 그의 눈에 핏발이 선다.
“끄으.”
“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네놈 심장에 칼을 박아 넣을 거라고.”
“갑자기 무슨 개소리냐!”
“나는 약속했다.”
콰드드득!
칼날이 파고들며 점차 배리어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녀석은 마력을 모조리 불어넣었다. 뼈만 남은 가냘픈 팔에 핏줄이 선명하게 돋아 오른다.
“으으으윽!”
“목소리를 대신 전해 주겠다고. 또, 그들의 심장에 칼을 박아 주겠다고.”
점차 파고드는 칼날은 어느새 그의 가슴팍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 검은 그의 목소리이자, 그의 한이다.”
“자, 잠깐만!”
패배를 직감한 녀석이 다급히 나를 본다.
그럼에도 칼날은 계속해서 밀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심장에 새겨 두어라.”
“이런 제기라아아알!”
비명을 지르며 젖 먹던 힘을 다하는 녀석.
나는 검을 내질렀다.
콰아아아아앙!
마지막 배리어까지 찢어지며 제 속도를 찾은 찌르기가 단숨에 녀석의 심장을 꿰뚫었다.
콰직!
놈의 몸뚱이를 뚫은 빛줄기가 광선의 꼬리를 남기며 뒤편의 건물 외벽까지 뚫었다.
쿠르르르르릉.
녀석의 뒤로 커다란 구멍이 휑하니 뚫려 있었다. 검격이 앞을 막는 것을 모조리 관통하며 지나친 까닭. 그 검을 가슴팍에 품은 녀석의 허망한 눈짓이 나를 향한다.
촤-악!
가슴팍에서 빠져나온 검격이 찰나에 흉측한 머리통을 허공으로 날렸다.
허공에 솟구쳤다가 바닥에 볼품없이 떨어지는 머리통.
나는 허물어진 녀석의 시체를 잠시간 보았다.
그는 더 이상 빛 가루로 흩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확인한 뒤에야 바레인가의 내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외원에서는 더 이상 굉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승리의 함성 또한 없었다.
아군이 패한 것이다.
성벽 너머가 타오른 불길로 붉게 일렁이고 있었다.
“결국 그자도 막지 못한 것인가.”
바레인가의 방계, 아르세올 바레인은 허탈한 심경을 입 밖으로 내었다.
황제의 직속 친위대라는 제국의 대마도사.
그가 이끄는 강화기사들의 기세는 마주하는 것만으로 숨이 막혀 올 정도로 강맹했다.
특임대 이상의 전력을 가졌다지.
그러나.
그들조차도 흰 사자를 막아 내지 못한 것이다.
아르세올은 검을 곧추세우며 말했다.
“모두 검을 들라. 흰 사자를 절대 우리의 뒤로 보내서는 안 된다.”
현재 이 자리에는 봉신 가문의 핵심 전력과 방계 혈족 일부를 포함한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물경 103명에 다다른 인원.
모두가 바레인가를 지키기 위해 한달음에 이곳에 모였다. 옆에 선 차리엔 바레인이 씁쓸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설마, 오늘이 바레인가의 마지막은 아니겠지요.”
아직 뚫리지 않은 성문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두 마찬가지.
다들 작금의 상황을 손쉽게 알아챘을 터였다.
아르세올은 그에게 자신의 바람을 전했다.
“아직 흰 사자의 상태를 속단하기 이르다. 부상을 입었거나 상당히 지친 상태일 수도 있어. 우리의 선에서 막아 낼 수 있을지 모른다.”
내원까지 충돌의 여파가 흘러들어 올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
그들을 이겨 냈다 한들 기량 저하가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며 말했다.
“우리 선에서 끝낸다.”
다들 비장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벼락같은 폭발음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콰아아앙!
외원과 내원을 구분하던 성문이 단번에 터져 나갔다. 그리고 그 잔해 안에서 나지막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저벅, 저벅.
그 걸음을 따라 스멀스멀 기어 오는 아득한 기운.
마치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이 밀려오는 듯했다.
다들 마른침을 삼키며 검을 움켜잡았다.
아득하면서 선뜩한 존재감이 내원을 묵직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뿌옇게 흩어지는 먼지 사이로 검을 늘어뜨린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좌우로 길게 뻗은 성벽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인간의 형체.
하나, 그 인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하늘처럼 자신들을 굽어본다.
으득.
아르세올은 그 기세를 받으며 이를 물었다.
겉으로 봤을 때, 그는 멀쩡해 보였다.
분명 조금 전, 대마도사와 강화기사들을 상대했을 것임에도 그랬다.
아르세올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남은 생을 활활 불태워서라도 녀석을 막아 내겠다는 각오가 칼끝에서부터 일어선다.
‘반드시 놈을 막아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바레인가는 역사 속으로 가라앉고 말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