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제129화 무너지는 늑대 (1)
온몸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폭발하는 성문.
후두두둑.
나는 휑하니 개방된 성문을 넘어 그 안으로 발을 디뎠다.
비장한 얼굴의 기사들이 그런 내 앞에 도열해 있었다.
마르켈이 진짜 흰 사자인 줄 알고 대비를 하고 있었던 듯한데.
나는 가만히 그들을 훑었다.
하나같이 왼쪽 가슴팍에 송곳니를 드러낸 늑대의 문양을 품고 있다.
아마 이들이 바레인가의 무력부대 중 하나인 ‘방랑하는 늑대들’인 듯하다.
그들의 위명은 익히 알고 있었다.
바레인가의 전면에서 움직이는 이들이니.
그들의 중심에 선 자가 말했다.
“비겁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다수로 겁박하고 있기에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하늘 위로 색색의 마법진이 피어나더니, 작게 응축되며 내 발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초록색, 보라색, 붉은색, 검은색.
무려 네 가지 색을 띠는 마법진.
보안 마법의 중첩이었다.
보통의 보안 마법은 수성 중심이기에 대인 마법을 준비해 놓지 않는다.
적이 이곳까지 다다랐다면 그들의 머릿수는 다수가 분명할 테고, 적은 인원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에 그렇다.
일반적으로는 총독부 때처럼 가드를 쓰거나 성벽, 성문을 강화하는 게 통상적인 보안 마법이다.
이런 대인 보안 마법은 주로 암살자를 막기 위해 침실이나 암살의 위협이 큰 공식 석상에서 사용한다.
아마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듯한데.
“보안 마법은 이게 다인가?”
적들은 검을 곧추세우며 나를 포위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날카롭게 드러나는 송곳니.
사냥감을 발견한 늑대들의 걸음이 바람을 서늘히 세운다.
나는 그 중심에서 빈주먹을 쥐어 보았다.
몸이 천근을 인 듯 무겁고, 기력이 빠지며 시야가 흔들린다. 검을 쥔 적들이 콧잔등을 들썩거리는 늑대로 보였다. 손끝은 저릿하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귓가에서 쿵쿵 뛰었다.
중력 강화, 독, 마비, 환각.
이 상태로 전투를 벌인다면 확실히 어려운 싸움이 될 듯했다.
하나, 보안 마법 또한 그저 마력의 구속일 뿐.
천령신공 심법편.
무극천승심결(無極天昇心結).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
세 개의 단전에서 풀어진 내력이 구결을 따라 너른 혈도를 도도히 질주한다.
용천부터 백회까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잘 닦인 가도처럼 뻗은 혈도와 전신 세맥의 다발 안으로 대해와 같은 내력이 일시에 흘렀다.
끝없는 하늘에 오르기 위해 만들어진 심결의 진기가, 폭발하듯 풀어져 나왔다.
정순하고 광대한 기의 발산이 끝없는 원을 그려 내며 팔방을 삼키는 고리를 만들어 낸다.
구구구구궁!
실체가 지워진 심상의 영역.
색색의 끈이 나를 쇠사슬처럼 옭아매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끈은 알 수 없는 문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하학적인 문양의 마법적 수식들.
내 몸에서 무극천승심결의 진기가 터져 나오자 그 끈들은 세차게 떨리며 바깥으로 팽창했고, 동시에 구속력을 잃기 시작한다.
그그그그긍!
나를 구속하려는 수식의 끈과 그것을 끊어 버리기 위한 심결의 대치가 이어졌다.
그것으로 발생한 후폭풍이 사위를 헤집는다.
적들은 감히 그 폭풍 안으로 발을 디디지 못했다.
나를 단단히 구속하던 보안 마법이 끊이지 않고 뿜어지는 내력의 파동에 몸을 부르르 떤다. 내력의 고리가 나와 끈 사이에 널찍한 원의 공간이 생길 정도로 그것을 밀어내고 있었다. 수식의 끈은 그 공간 자체를 휘감았다.
그러다 이내.
콰아아아앙!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끊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마법적 수식들.
수식의 결합력이 상당한 고등 보안 마법임에도 그러했다.
늘어진 시간 속 심상의 공간에서 벌어진 공방이 있었으나, 바깥에서 본 이들은 단숨에 보안 마법이 깨져 버리는 광경으로 목도했다.
쿠르르르릉.
보안 마법을 유지하던 구조물들이 일제히 힘을 잃고 무너져 내린다.
“……마, 말도 안 되는.”
그 광경을 본 이들의 입가에 경악성이 어렸다.
이런 식으로 보안 마법을 부수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을 거다.
보통은 보안 마법을 발동하는 주체인 구조물을 부수니까.
하나, 이것은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법이든 주술이든 모든 것은 기의 활용.
무극천승심결은 기를 운용하는 방식이 정점에 닿아 있는 극상의 기예.
심결을 이용하여 마법을 부릴 수는 없지만, 나를 억제하는 것들을 부수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 이것은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이들이나 흉내 낼 수 있을 법한 무공(武功).
그러니 이들에게는 불가해한 일이겠지.
나는 긴말 없이 검병을 움켜잡았다.
이내 손끝에서 검광이 폭발했다.
콰과과과광!
* * *
“클클클. 보안 마법을 그런 식으로 부술 줄이야. 과연 괴물 같은 놈이로다. 저러니 할렌트마저 당했지.”
Dr. 주르하는 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지붕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방랑하는 늑대 무리를 홀로 휘젓는 흰 사자의 무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늑대들은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쓸려 나가고 있었다.
“언제 나설 생각이십니까.”
가주, 헤일런스는 그 광경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철저히 준비한 보안 마법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고, 그의 움직임을 따라 피어나는 푸른 섬광이 장내를 휩쓸고 있었다.
붉은 피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난다.
고함과 비명으로 물들어 가는 전장.
모두 아군의 것이었다.
“일반 기사들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점멸하듯 움직이는 흰 사자의 표홀한 움직임은 가히 귀신의 것이라 해도 무방했다.
높은 지대에서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그리 보였다.
그런 자가 눈앞에서 움직인다면 과연 그것을 제대로 좇을 수 있을까?
헤일런스는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저것은 흰 사자의 전력도 아닐 터였다.
실제로 본 그의 무력은 소문으로 접한 것보다도 압도적이었다.
그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눈앞에서 바레인가의 기사들이 허무하게 생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 심정은 생살이 찢기는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그는 자존심을 꾹꾹 누르며 주르하에게 부탁했다.
“나서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주르하는 그것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끌끌끌. 보채기는. 그럼 이제 슬슬 나서 볼까.”
그들이 선 건물 아래에는 흑색의 갑옷으로 무장한 강화기사들이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도열해 있었다. 그 육중한 자태를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는 주르하였다.
“낄낄낄. 내 새끼들이지만, 참으로 훌륭해.”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주르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공을 계단처럼 밟으며 지면에 내려섰다.
몰골을 제외하고 본다면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의 고절한 신위.
헤일런스는 그런 그를 보며 눈가에 힘을 주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분신을 하나로 모았다더니.
확실히 전과 다른 신위를 보이고 있었다.
과연, 황제의 직속 친위대다운 면모.
만약 주르하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바레인가는 흰 사자를 결단코 막아 낼 수 없었을 터였다.
아니, 자신들뿐만이 아니라.
현 프렌치아에서 그를 막아 낼 수 있는 가문은 단연코 없었다.
* * *
콰과과과광!
전장을 가로지르는 참격이 사방에 휘몰아쳤다.
푸른 섬광이 앞을 막는 이들의 몸뚱이를 가르며 쏘아진다.
바레인가의 방랑하는 늑대.
총독부 휘하의 기사단인 까마귀 기사단과 동급으로 평가되는 기사단이었다.
현 프렌치아에서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바레인가의 송곳니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나 특임대보다는 한참 아래였다.
그런 이들이 내 앞을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콰광!
양측에서 쏘아지는 칼날을 쳐 내며 검을 그었다.
제비처럼 나는 비검기(飛劍氣)에, 그 궤도 위에 놓인 여럿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동시다발적으로 허물어지는 녀석들 사이로 트이는 시야.
적진을 무참히 유린하던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Dr. 주르하.
그가 내 앞에 있었다.
“크헬헬헬헬!”
눈을 마주치자 정신 사납게 웃는 녀석.
내가 말했다.
“여전하군.”
“나와 구면인가 보군.”
“그래. 세 번이나 죽였지.”
“이런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예상은 했다만 역시 네놈이었구나!”
정확히는 두 번이었으나, 네더만의 것까지 합쳤다. 덕분에 실없이 웃던 녀석의 얼굴이 금세 흉악해졌다.
하지만 괘념치 않는다.
웃는 낯이나 흉악한 낯이나 똑같이 흉측하니.
녀석의 얼굴을 보니, 잊고 있던 것이 하나 생각났다.
「불멸의 도시」 해석본.
움파움파 마을의 족장에게 의뢰해 놓고 찾지 않았다. 돈은 지불했으니 상관없겠지.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 녀석이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감히 내 분신들을 죽이다니! 오늘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야 말 것이다!”
녀석을 중심으로 음침한 마력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마치 주변의 마나가 거친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듯했다.
검처럼 버려진 기사의 기세와는 달랐다.
마치 일대의 공기가 증발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 온다.
이것이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의 힘이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흥미롭게 보았다.
지금까지 만나 왔던 주르하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마나의 요동.
“네가 본체인가?”
“눈치 하나는 빠르구나. 클클클.”
내 물음이 흡족했는지, 그는 금세 굳은 낯을 풀고 실실거렸다.
“네놈을 상대하기 위해 하나가 됐지. 영광으로 여기거라. 근 10년 만에 완전체이니라. 덕분에 마력이 넘칠 듯 흐르는구나. 크하하하하!”
녀석은 몸 상태가 만족스러운지 허리까지 꺾으며 웃어 댔다.
이것이 녀석의 전력이겠지.
아무래도 흩어져 있던 분신들을 하나로 모아 전력을 복구한 듯한데.
내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그럼 이제 네놈만 죽이면 네 몰골을 다시 볼 일은 없겠군.”
“네가 이 몸을 죽일 수 있을까?”
주르하의 안광이 퍼렇게 타오른다.
자신감에 찬 표정.
나는 그의 뒤로 늘어서 있는 거뭇한 것들을 바라보았다.
아마 저들을 믿고 있을 테지.
사위를 점하는 그들의 기파가 강맹하다.
정제되지 않은 폭발적인 기운이 거대한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신체의 수련이 아닌, 오로지 개조를 통해 만들어진 자들.
“크르르.”
그들의 깊은 투구 사이로 흐르는 울음이 들린다.
“이것이 그간의 노고의 결정체다! 인간인 네놈이 감당할 수 있는 아이들이 아니란 말이다! 크헬헬헬!”
“생긴 것만 인간의 탈을 벗은 게 아니군.”
“뭐라?”
주르하는 한차례 미간을 찌푸리고는 내 말을 이해했는지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클클클. 이들의 무력을 파악했나 보군. 본래 불리할 때 혓바닥이 길어지는 법이지.”
나는 눈을 싸늘히 가라앉혔다.
“도를 넘어섰음이야.”
갑옷을 입은 탓에 체형이 보이지 않지만, 이들의 기세로 보아 생전에 기사였던 자들이 분명했다.
고도로 신체를 단련한 자들이 아니고서야, 일반인의 신체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이 정도의 전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이들이 놈의 수족이 되는 것에 자원하지는 않았을 터.
또, 이것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무고한 이들이 얼마나 희생되었는가.
죽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죄였다.
검병을 움켜쥐는 순간, 찰나에 공간을 돌파하는 섬광이 있었다.
콰아아앙!
그것이 주르하의 앞에서 막혔다.
반투명한 장벽이 녀석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배리어인가.
“이 새끼가 건방지게 기습을! 당장 저것을 찢어 죽여 내 앞에 대령하거라!”
휘적이는 스태프를 따라 검은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나며 사방에서 짓쳐들어왔다.
검은 폭풍처럼 들이치는 녀석들.
그 뒤를 녀석의 웃음소리가 따른다.
“크하하하하!”
천령신공 보법편.
제3장 수류(水流).
걸음이 부드럽게 흐른다.
막는 것이 있으면 돌아 흐르고, 밟히는 것이 있으면 넘어 흐른다.
산운(散雲)이 회피에 최적화된, 변화무쌍한 보법이라면, 수류(水流)는 적의 공격을 흘리고 그것을 넘어 집어삼키기까지 하는 물의 흐름을 닮은 걸음이었다.
콰과과과광!
흐르는 신형을 따라 그려지는 푸른 장막.
그것이 공간을 덮을수록 적들의 몸이 굼떠지기 시작한다.
마치 깊은 물에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녀석들을 심해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크아앙!”
그들은 그것에 강하게 저항하며 몸을 뒤흔들었다.
제 몸을 돌보지 않는 움직임.
관절이 뒤틀리고 갑옷이 우그러지며 뼈가 부러져도 그들은 내게 창을 찌르고 검을 휘둘러 왔다.
그 검격이 자못 날카롭다.
이성을 잃었음에도 그들은 생전에 몸속에 새겨 넣었던 궤적들을 본능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검을 수천 번, 수만 번 휘둘러 왔을 테지.
콰과과과광!
그런 이들이 강화한 신체를 가지니, 이성을 잃었어도 전력은 상당했다.
특임대.
확실히 그 이상.
주르하의 자신감은 그저 허풍만은 아니었다.
하나, 나는 평소와 달리 그들의 무력을 가늠하며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이미 죽은 자들이었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꼭두각시가 된 피해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다시 한번 죽음을 내리는 것뿐.
그들 또한 완전한 안식을 바라고 있겠지.
화륵.
칼끝에서 타오른 시뻘건 불꽃이 찰나에 사위를 덮는다.
천령신공 검법편.
열화의 장(章) 화룡(火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