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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후 천하제일인이 되어 귀환했다-128화 (128/228)

제128화

제128화 죽고 싶은 남자 (4)

이리엘은 침대에 늘어지게 누워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레인 지부에서 내준 방이었다.

사전에 연락을 취해 놓았던 덕에 번거로운 과정 없이 곧장 그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흰 사자는 어디 계십니까?

반짝거리던 그들의 눈망울이 불현듯 떠올랐다.

다들 제네스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마그네트 지부 때와 다르지 않은 상황.

그럴 만도 하지.

시간이 갈수록 흰 사자의 업적은 쌓여만 가고 있었고, 그에 따라 그의 위명 또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구름을 가르고 있으니, 그를 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신수, 레오니랜서의 화신이라 믿는 이들도 있을 지경이니 말 다 했지.

하지만 제네스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를 낳아 주신 부모님도 계실 거였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던 어린 시절도 분명 있었을 거였다.

워낙 인간 같지 않아서 그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상상이 쉽사리 되지 않지만.

그 제네스가 아가였다니.

검 대신 젖병을 들고 있었다니.

“풉.”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뒤뚱뒤뚱 걸었을 그의 뒤태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아우! 귀여워!

짧은 팔다리로 허공을 휘적거릴 때 얼마나 귀여웠을까.

그때는 꺄르르 꺄르르 잘도 웃었을 테지?

이리엘은 꼬꼬마 제네스를 상상하며 홀로 쿡쿡 웃어 댔다.

그러고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에효.”

또 시작이네.

하지만 귀여운 걸 어떡해!

포르센에서만 해도 자신의 마음을 엄격히 관리하던 그녀였지만, 이미 반쯤 포기한 지 오래였다.

이제는 아예 초탈해 버렸달까.

그렇다고 고백할 생각은 절대 없다.

지금 고백한다고 연애가 가능한 상황도 아니거니와 지금도 그렇게 멸시하는데.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다가는…….

펼쳐질 끔찍한 앞날에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생각만으로도 오한이 든다.

그냥 이렇게 혼자 좋아하다 말겠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영원할 리도 없지 않은가.

“내가 어쩌다 그런 인간을 좋아하게 돼서.”

마침 제네스도 없겠다 시원하게 혼잣말을 한 이리엘은, 침대에서 버둥거리며 성질을 한껏 부렸다.

그렇게 하니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한결 낫다.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이리엘!”

알렌의 목소리였다.

“예?”

이리엘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열린 틈으로 잔뜩 상기된 알렌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터졌나 본데.

“무슨 일인데요?”

알렌이 다급히 이리엘의 손목을 끌며 말했다.

“빨리 나가 보자! 제네스 님이 바레인가로 향하고 계신 모양이야. 흰 사자가 나타났다며 다들 난리가 아니라고!”

“예? 아니, 지부에 들르지도 않고요?”

알렌을 뒤따르던 이리엘의 눈썹이 꼬인 속만큼 비틀렸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까는 오늘 밤에 간다고 해 놓고서는!

“이 인간이.”

게다가 자신들에게 아무런 말도 않고!

‘나한테 인사도 안 하고!’

뿔이 잔뜩 난 이리엘이 네스처럼 콧잔등을 들썩였다.

분명 마그네트에서 언제 가면 언제 간다, 또 가면 언제쯤 돌아온다, 말해 주기로 약속했으면서.

심통을 담아 볼을 부풀린 이리엘은 알렌의 뒤를 다급히 따랐다.

알렌의 말대로 도시에 소란이 번지고 있었다.

* * *

도시를 관통하여 바레인가의 정문까지 기다랗게 이어지는 대로.

빽빽하게 늘어선 사람들은 대로의 시작이자 끝인 바레인가의 정문을 긴장된 낯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앞에 선 한 사내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흰 사자 가면을 쓴 사내.

대로를 가로지르며 수많은 시민을 몰고 온 그의 걸음은, 정문을 앞두고 멈춘 상태였다.

성벽의 망루에 선 바레인가의 병사들은 굳은 낯빛으로 흰 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알렌과 이리엘을 비롯한 바레인 지부 사람들은 일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뒤통수들 때문에 그 광경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알렌은 까치발을 들고 이리저리 기웃대며 상황을 살폈다.

“아직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은 거 같은데?”

저편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주변의 웅성거림 덕분에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으레껏 제네스를 뒤따르는 폭발음이 들리지 않으니 대치 상태란 것을 짐작할 뿐.

“앞으로 가 봐요!”

이리엘의 말에 알렌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파를 가르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죄송합니다!”

곰과 같은 덩치를 가진 데다 익스퍼트 초급에 이른 그를 일반 사람들이 막아설 도리는 없었다.

알렌은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사람들을 헤치고 금세 가장 앞 열까지 도착했다.

그 뒤를 바짝 따른 이리엘도 그 옆에 나란히 섰다.

훤히 트인 시야에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둘은 서로를 동시에 마주 봤다.

서로의 눈동자에는 선명한 물음표가 떠올라 있었다.

정문 앞에 흰 사자 가면을 쓴 이가 보였다.

그런데.

“그러니 나를! 절대 잊지 말거라!”

제네스가 아니다.

뒷모습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제야 선명히 들리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물음표를 지운 그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흰 사자는 마치 그들의 의문을 알아차린 것처럼 천천히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나는!”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잡혔다.

“너희들이 죽인 리에나의 남편! 마르켈이다!”

* * *

제네스 일행과 헤어진 마르켈은 식당에서 마지막 점심을 먹으며 술 한잔을 걸쳤다.

곧장 행동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가면과 염색약 등 이것저것을 구매하여 흰 사자 가면을 만들고 나니 해가 슬슬 저물어 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조악하지만, 누구도 흰 사자 가면을 직접 본 자는 없을 터였다.

이 정도면 잠깐은 적들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무겁게 웃은 그는 골목으로 들어가 흰 사자 가면을 쓰고 나왔다.

그리고 대로를 걸었다.

“뭐, 뭐야?”

“흰 사자다!”

가면을 쓴 자신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사람들.

허리춤에 검까지 매고 걸으니 다들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누가 미쳤다고 지금 상황에 흰 사자 가면을 쓰겠는가.

죽고 싶은 자가 아니라면.

자신이 걷는 길 뒤로 사람들이 금세 구름 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그들도 자신을 잠깐이나마 진짜 흰 사자라 착각할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목소리가 잠깐이나마 성벽을 넘을 테지.

그는 그렇게 정문 앞에 섰다.

“바레인가는 들으라!”

마르켈은 그 앞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는 바레인가를 앞에 두고 할렌트가 벌인 죄를, 총독부가 저지른 범죄를 낱낱이 규탄했다.

그들이 사람들을 납치하여 인체 실험을 하는, 천인공노할 짓을 벌였으며.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수많은 가정의 평안을 부순 것을 소상히 까발렸다.

“나는 너희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주했다.

“천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 천 번을 네놈들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을 것이다!”

자신의 말이 성벽 너머까지 닿게끔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러니 나를! 절대 잊지 말거라!”

망루에 선 기사들은 굳은 얼굴로 그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흰 사자의 등장에 바레인가의 내부는 들썩이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보다, 그가 말을 끝내기 전에 병력을 집결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우선이었다.

덕분에 마르켈은 하고 싶던 모든 말을 바레인가의 정문에 쏟아 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그가 흰 사자 가면을 벗으며 소리쳤다.

“할렌트가 죽인 리에나의 남편! 마르켈이다!”

일순, 장내에 싸늘한 정적이 내렸다.

병사들의 동공이 파르르 흔들렸다.

“크하하하하!”

마르켈은 박장대소하며 그들을 크게 비웃었다.

좌중에 번지는 웅성거림.

마르켈의 태도에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그를 내려다보던 병사들도.

그가 진짜 흰 사자가 아니란 걸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리엘은 그를 알아보자마자 뛰쳐나갔다.

성벽 위에서 활을 겨누는 이들을 본 까닭.

그런 그녀를 알렌이 막아섰다.

대로의 중심에 선 그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미 늦었다.

“아주 쥐새끼처럼 잔뜩 겁을 먹었-.”

콰직.

적의 화살이 그의 오른쪽 가슴팍에서 솟아나듯 박혔다.

그 충격에 마르켈의 상체가 한쪽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크흡!”

고통을 참으며 몸을 세우는 마르켈.

그런 그의 몸 위로 화살들이 날아와 틀어박힌다.

퍼버버벅.

순식간에 여덟 발의 화살이 그의 몸 곳곳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리엘은 입을 막은 채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가로 금세 물기가 차오른다.

알렌 또한 아랫입술을 잘근 물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르켈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한쪽 무릎이 먼저 바닥에 닿고, 이내 바닥으로 기울어져 간다.

그는 그 와중에 입꼬리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이걸로 되었-.’

턱.

일순, 기울던 세상이 우뚝 섰다.

무언가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마르켈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자신의 옆에 내려선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흰 사자 가면을 쓴 이가 거기 서 있었다.

“이렇게나 성격이 급한 줄 몰랐군.”

그 안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마르켈의 핏발 선 눈이 크게 뜨였다.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피를 머금은 기침이 튀어나와 말을 막았다.

‘……흰 사자가 제네스였어?’

마르켈은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바레인에 가기 위해 호기롭게 테이난을 떠났으나, 얼마 가지도 못하고 숲에서 길을 잃었다.

3일간 숲을 헤맸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기력마저 모두 소진되어 가고 있었다.

자신은 사실 그때 모든 걸 포기했었다.

이 숲을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했고, 이대로는 바레인에 제때 도착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허망하게 굶어 죽기는 싫어 절벽 위로 올랐다.

그리고 지금처럼 그들의 죄를 하늘에 소리쳤다.

그리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때 바닥으로 떨어지던 자신을 구해 준 그림자가 있었다.

집채만큼 거대한 늑대.

네스였다.

정신을 잃었던 자신이 깨어났을 때, 그들이 눈앞에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네스에게는 미안했지만, 거짓말을 해서라도 바레인가로 가고 싶었다.

사람의 말귀를 알아들을 줄 아는 네스는 자신이 구해 준 인간이 끝까지 거짓을 말했으니 꽤 억울했겠지.

그래도 한 대 제대로 맞았느니 된 거 아니겠나.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즐거웠다.

여정은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되레 편했다.

그래도 죽고자 하는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래전에 내린 결정이었고, 아내가 실종되었을 때 이미 자신은 죽었다.

아내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 악물고 살아왔다.

아내가 죽은 것을 알게 된 순간, 삶에 미련은 없었다.

폐인이 된 자신을 보며 누군가는 살라고 했고, 누군가는 유난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위로했고, 누군가는 한심하다고, 누군가는 이래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들의 말이 모두 맞다.

틀린 건 자신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돌이킬 수도 없다.

산 자는 살아야 했다.

하지만.

‘아내가 내 삶의 이유였는데. 그녀가 내 전부였는데. 내 시간은 아직도 그녀가 사라졌던, 그날에 멈춰 있는데.’

뭐 어떡하라고.

누군가의 이해도, 누군가의 설득도, 삶의 의미도.

자신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죽기로.

이왕 죽는 거, 삶을 빼앗아 간 원흉에게 그가 저지른 죄를 지탄한 뒤 죽기로.

그들이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들에게 닿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저 허망하게 간 아내를 저승에서 만나면 말해 줘야지.

‘당신을 죽인 이들을 내가 큰소리로 혼쭐 내 주고 왔노라고.’

그걸로 어깨에 힘 좀 잔뜩 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아내에게 더 많은 유세를 부릴 수 있을 거 같다.

자신이 흰 사자와 여정을 함께했었다며.

제네스는 생을 잃어 가는 마르켈을 천천히 대로에 눕혔다.

“네 목소리는 그들에게 닿을 것이다.”

그의 입가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렀다.

“칼날이 되어 그들의 심장에 틀어박힐 것이야.”

그가 몸을 일으키며 발검했다.

스르렁.

“내가 그리 만들어 주마.”

마르켈은 제네스의 낮게 깔리는 음성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의식이 깊숙하게 가라앉으며 잠이 몰려온다.

자신은 어느새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작은 둔덕에 서 있었다.

아내와 함께 자주 거닐던 산책로.

청명한 하늘에서 따뜻한 볕이 쏟아지고, 일렁이는 바람을 따라 풀잎이 춤을 춘다.

그리고.

저편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그 모습에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 그녀가 자신을 발견하고는, 저 멀리서부터 뛰어온다.

“조심해! 넘어져!”

마르켈은 아내를 보며 활짝 웃고는, 그녀에게 마주 달려갔다.

마주친 둘이 서로를 품에 가득 안았다.

마르켈은 아내를 번쩍 들어 뱅글뱅글 돌렸다.

그것을 따라 붉은 꽃잎이 날린다.

부서질 정도로 아내를 꼭 끌어안고 있던 마르켈은 그녀를 품에서 떼어 내 얼굴을 보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머릿속에서 점차 흐릿해져 가던 아내의 얼굴이 눈가에 선명히 틀어박혀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혼자서 많이 외로웠지?”

눈가가 촉촉해진 리에나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어? 나 없이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어?”

리에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놈들한테 크게 한마디 하고 왔으니까. 이제 아무 걱정 마. 내가 같이 있어 줄 테니까, 아무런 걱정하지 말라고.”

그의 말에 리에나는 눈물을 떨어뜨리며 씩 웃었다. 마르켈은 그런 아내를 다시금 꼭 안아 주었다.

“늦어서 미안.”

* * *

마르켈을 조심스레 눕힌 나는, 저편에 굳게 닫힌 정문을 보았다.

쿵!

지면을 찍으며 한달음에 도약했다.

허공을 나른 몸이 회전하며 발끝에 진기가 실린다.

천령신공 기예편.

제5장 선풍회류각(旋風會流脚).

발끝에서 회오리치는 내력.

그것을 따라 당겨지는 바람.

주변의 대기를 휘감아 끌어온 발차기가 굳건한 성문에 닿았다.

콰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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