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제124화 본격적인 걸음 (5)
청천벽력과 같은 루시안의 선언에 이리엘은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빠지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제 와서는 아니고. 네가 왜 제네스와 함께했는지 잊었어?”
이리엘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그녀 또한 본인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그제야 상기한 듯했다.
이리엘이 나를 따라 수도로 향했던 이유는 왕세자가 살아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녀의 임무는 왕세자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것과, 만약 살아 있다면 그를 북부의 흰사자로 영입하는 것.
두 가지 모두 가짜 왕세자의 죽음으로 결말이 났다.
이리엘의 역할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혼자 북부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이곳에 남아 있어도 돼. 세실리아가 있으니 심심하지는 않을 거야.”
루시안의 말에 이리엘은 입술을 잘근 물었다.
누가 봐도 승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다분해 보였다.
“싫어. 나도 갈 거야.”
“어디로. 누굴 따라서.”
현재 우리 일행은 두 패로 나뉘어 있었다.
통합을 위해 움직이는 루시안과 심판을 위해 움직이는 나.
그녀가 굳이 함께하고자 한다면 루시안 쪽이 나았다.
보다 위험도 적을 테고, 그녀의 무력은 변절자들을 심판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니.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것은 나였다.
“당연히 제네스 님이지.”
“왜?”
“그래야 인원수가 맞잖아.”
“…….”
회의실에 잠시 적막이 일었다.
숫자를 맞추자고 이쪽을 선택하겠다니.
루시안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이 된다고 해서 한 말은 아니지?”
“당연히 농담이지. 내가 바보야?”
다들 아무런 부정을 하지는 않았다.
이리엘은 그것에 더 열이 받았는지 씩씩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고작 그런 이유로 저 인간을 선택했겠어! 나 굉장히 합리적으로 판단한 거거든!”
“나는 네가 제네스와 함께 가야 할 이유를 전혀 모르겠는데.”
루시안의 냉정한 눈빛이 그녀를 직시했다.
“제네스를 따라가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그야…….”
“말했듯, 네가 그 길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없어.”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고 떨어지는 단호한 목소리.
하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익스퍼트 초급에 이른 이리엘이 무엇을 할 수 있겠나.
그녀는 도움이 되는 전력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지만.
그리고 그것은 루시안을 따라가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대로 그녀가 맡을 역할은 더 이상 이곳에 없었다.
“없기는 왜 없어! 나 할 일 엄청 많거든! 그렇죠, 알렌 형님.”
“……으응?”
갑작스런 이리엘의 물귀신 작전에 알렌이 당황한 채 말끝을 흐렸다. 이리엘은 그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오빠는 모르겠지만, 제네스 님이 얼마나 까탈스러운데. 알렌 형님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데 지금 이 작전에서 제네스 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해? 적들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여정 내내 조금의 불편함 없이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할 거 아냐. 알렌 형님 혼자서는 무리야. 내가 알아. 그래서 나도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구!”
루시안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이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럴 만도 한 게, 금쪽같은 제 여동생이 내 수발을 들겠다고 저리 성화를 부리고 있으니 충격을 받을 수밖에.
그리고 사실 나도 놀랐다.
그녀가 저리 열정적일 줄이야.
심판을 위한 길은 상당히 지난한 길이 될 터였다.
노숙도 많이 할 수밖에 없고 이래저래 불편할 수밖에 없는 여정.
지금까지 함께 일정을 소화해 왔기에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저리 적극적이라니.
독립의 과정을 현장에서 함께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알렌 형님도 말해 보세요. 제가 있으면 좋잖아요. 저 인간이 오죽 유별나요? 셋이 나눠서 하던 일을 혼자 해 봐요. 얼마나 죽을 맛이겠어요.”
별안간 남매 사이에 끼게 된 알렌이 난감해하며 입을 열었다.
“아, 뭐 제네스 님이 워낙 유별나기는 하시지만-.”
“봤지!”
알렌이 말을 맺기도 전에 이리엘은 단박에 턱을 치켜들었다. 원하는 답을 얻어 낸 그녀는 곧장 다음 목표로 눈길을 돌렸다.
“네더만 씨도 한번 말해 봐요. 저 인간의 성격이 얼마나 유별난지. 솔직히 저 까탈을 어떻게 혼자 감당해요. 겪어 봐서 잘 알잖아요. 우리가 뒷담화 하면서 쌓은 우정이 얼마냐구요.”
“뭐, 그건 맞는 말이기는 해. 저 녀석을 혼자 감당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저 자식은 악마야. 알렌은 얼마 못 가 뼈만 남은 변사체로 발견되고 말겠지. 젠장, 가기 전에 고기나 듬뿍 먹여야겠군. 불쌍한 알렌 녀석.”
“……역시 네더만 씨밖에 없습니다.”
알렌이 감격에 차 바라보자, 네더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썹이 절로 꿈틀거린다.
배알이 꼬이기 시작한 나와 달리, 이리엘은 다시 한번 턱을 치켜들며 기세를 키웠다.
“들었지! 혼자서는 절대 무리야. 이대로는 알렌 형님이 큰일을 치르게 될 거라고! 내가 무조건 도와줘야 해!”
루시안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 그래도 안 돼. 그냥 이곳에 있어.”
“저번에는 보내 놓고 이번에는 왜 안 돼!”
“그때는 정말 어쩔 방법이 없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왜? 위험해서?”
“그래, 위험해서.”
“그 부분은 걱정 마. 이제 내게는 든든한 호위가 있으니까.”
이리엘이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네스를 들어 보였다.
“깡! 깡!”
네스는 앙칼지게 짖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지금이야 하찮게 보이지만, 본체를 드러낸다면 웬만한 기사들은 간단히 찜 쪄 먹을 수 있는 녀석이었다.
“제네스 님이 익스퍼트 상급까지도 상대할 수 있다고 했어!”
고농도로 응축된 마력을 온몸으로 흡수한 녀석은 더 이상 평범한 맹수가 아니었다.
영물이 된 네스는 먹이 사슬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강철같이 단단한 가죽하며 철마저 손쉽게 씹어 먹을 이빨에 막대한 마력까지.
고도로 단련된 기사도 네스의 본체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나는 무조건 따라갈 거야. 오빠가 말려도 어쩔 수 없어!”
이리엘의 단호한 태도에 루시안은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제네스한테 물어보자.”
“어?”
“결국 제네스가 널 필요로 해야 되지 않겠어? 아무리 네스가 강하더라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결국 중요한 순간에 움직여야 할 건 제네스라고. 네 실력으로는 지금 제네스에게 짐밖에 되지 않아. 그러니 제네스의 의견에 따르자고.”
아주 꼭 맞는 말이었다.
중요한 건 다름 아닌 내 의사지.
“어때? 제네스의 선택에 따르는 게.”
“…….”
이리엘은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싫다고 하면 그녀도 더 이상 억지를 쓸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럼 제네스 님이 선택해요.”
떨떠름하게 대답한 이리엘은 나를 보며 눈썹을 ‘八’ 자로 모았다. 그러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 따라가도 되죠?”
* * *
이른 아침부터 일행들은 모두 중정에 나와 있었다. 배웅을 나온 카드론과 세실리아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여행 장비들을 짊어진 채였다.
“다음에 볼 때는 제대로 격식을 차려야 되겠군.”
카드론의 말에, 루시안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될 겁니다.”
작전상으로 그들이 다시 조우할 때는 루시안은 네 개의 세력을 모두 통합한 프렌치아의 임시정부의 수장이자, 새로운 왕으로 추대될 터.
카드론은 루시안에 대한 신뢰를 말하고 있었고, 루시안은 통합의 자신감을 말하고 있었다.
작별 인사는 길지 않았다.
우리는 짧게 인사하고 여정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루시안 쪽과 우리의 일행이 갈라진 것은 테이난을 완전히 벗어난 후의 일이었다.
우리는 두 개로 나뉘는 길목에 서 있었다.
“이리엘을 잘 부탁한다.”
루시안의 말에, 나는 무심히 답했다.
“알아서 잘 지낼 거다.”
“이번에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여간, 동생 바보 녀석.
“컹! 컹!”
네스가 루시안의 말귀를 알아듣고 짖어 댔다.
자신이 지켜 주겠다는 말 같은데.
숲에 들어선 후 녀석은 본체를 드러낸 상태였다.
백수의 왕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자태가 늠름하기는 하다.
루시안은 입꼬리를 올리며 네스의 털을 쓸어 주었다.
“그래. 잘 부탁한다, 네스.”
“내가 애야? 이리저리 부탁하고 다니게.”
이리엘의 핀잔에 루시안은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 죽을 때까지 애야. 그러니까 몸조심해. 알렌 씨 잘 도와주고.”
“걱정 마시구요, 오빠나 몸조심해.”
“나는 네더만 씨가 잘 지켜 줄 거야.”
“그래서 더 걱정이라구.”
이리엘이 못 미더운 눈초리를 보내자, 네더만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허리춤의 검파를 툭툭 쳐 대며 말했다.
“그게 무슨 섭섭한 말인가. 나만 믿으라고. 조카나 다름없는 세실리아를 식도 올리기도 전에 과부로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아, 네. 참으로 든든하네요.”
네더만과 입씨름을 하는 이리엘을 보며 루시안은 쓰게 웃었다.
“내 하나 남은 혈육이다 보니 걱정이 많다.”
원래 동생 바보였으면서.
내가 말했다.
“네 목이나 간수 잘해.”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무운을 빈다.”
“너도.”
우리는 그렇게 짧게 인사하고 작별했다.
헤어짐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기에.
“후. 이제 다시 시작이네요.”
알렌이 루시안과 일행들이 사라진 자리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나뭇잎 사이로 삐져나온 태양빛이 기다랗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리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저랑 같이 가서 좋죠?”
“그야 물론이지! 루시안 님의 눈치가 보여서 말을 제대로 못 했지만, 나 혼자서 어떻게 제네스 님을 보좌하겠어.”
“그러니까요. 제가 알렌 형님 생각해서 그런 거라구요. 그러니까, 괜한 오해 하지 말아요.”
이리엘의 마지막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매번 무슨 오해를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건지.
내가 말했다.
“괜한 헛소리 할 생각이라면 버리고 간다.”
“칫. 이미 마차 떠났거든요. 이제 반품도 환불도 안 된다고요!”
나는 당돌하게 구는 이리엘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왜 저 녀석의 동행을 허락했을까.
문득 그 결정을 내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쳐다보는 이리엘의 눈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는 게 맞을 거다.
어찌나 불쌍해 보이던지.
어릴 때 익혔던 내 구걸 신공도 그 정도까지는 되지 못했을 터였다.
그렇다고 그것에 넘어가 녀석의 동행을 허락한 건 아니었다.
이리엘이 함께 가는 게 알렌에게도 좋을 테고, 나 또한 하나보다는 둘을 부려 먹기 편할 테니까.
내가 말했다.
“이만 우리도 출발하자.”
“예!”
내 말에 녀석들도 힘차게 대답했다.
설렘을 담은 목소리였다.
이들의 들뜬 감정은 이미 이 여정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독립을 향한 본격적인 걸음 위에 올라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번 겨울이 오기 전에.
이 걸음의 끝에서.
프렌치아의 독립을 선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