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제122화 본격적인 걸음 (3)
네더만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었다.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길래?”
“넌 왕의 자질을 판단하는 요소가 뭐라고 생각하냐.”
“뭐, 혈통이 최고지.”
“그거 말고.”
“흠. 그냥 가장 큰 세력의 우두머리가 하는 거 아니겠어?”
평소 그런 것에 대해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네더만이었다.
그에 대해 고심할 생각도 없었고.
“하여간, 검 드는 것 외에는 무지렁이라니까.”
“그게 무슨 섭섭한 소리야. 내가 술에도 얼마나 박식한데. 도박에도 조예가 깊은 편이고.”
“매일 잃기만 하는 녀석이?”
“젠장. 그러고 보니 제네스 이 자식, 낭만의 바다이야기에서 딴 돈 중에 내 몫을 제대로 안 줬잖아. 그걸 까먹고 있었군. 양심적으로 내가 주선한 자리인데 수수료까지 해서 반절은 떼 줘야 맞지 않아?”
“벌써 취했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아, 미안. 갑자기 잊고 있던 게 기억나서. 그래서 네가 생각하는 요소는 뭔데.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봐.”
“포용력.”
“포용력?”
카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것은 그 사람의 그릇의 크기를 의미하기도 하지.”
“하긴, 박쥐 같은 널 품은 것만 봐도 포용력이 있는 거 같기는 해.”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야.”
“어련하실까.”
“그 녀석은 사람을 품을 줄 아는 재능을 가졌어. 그야말로 왕이 될 재목이지. 녀석의 밑으로 인재가 모여드는 건 우연이 아니야. 그건 움푹한 웅덩이에 물이 고이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라고.”
“사위로 삼았다고 꽤나 극찬하는군. 이제 딸 바보에서 사위 바보가 될 참이냐.”
“좀 진지하게 들어 볼 생각은 없어?”
“응? 나 엄청 진지한데.”
네더만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의자에 늘어지게 기대앉아 술을 병째로 들이켜면서.
진정성은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자세였다.
카드론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어쨌거나 너도 겪어 보면 알게 될 테지.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가, 자식아!”
* * *
루시안은 이리엘과 세실리아와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그들과의 만남이 끝나면 나를 따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는 그가 떠난 후에도 여전히 레이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단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구상한 계획을 들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찮네.”
내 무력을 십분 활용한 전략이었다.
이대로만 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그가 물었다.
“어디를 먼저 멸문하시겠습니까?”
나는 프렌치아 전도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공표하고자 하는 다섯 개의 가문이 그 위에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말했다.
“바레인가.”
“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현 프렌치아의 최강이라 불리는 가문이자, 총독 할렌트의 가문. 그리고 내 어머니의 가문.
나는 그 바레인가를 가장 먼저 멸문하고자 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내가 시선을 주자 그는 말을 이었다.
“왕이 되지 않겠다는 마음, 여전하십니까?”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나는 콧방귀를 끼며 녀석을 보았다.
아까 식사 자리에서 내 이야기만 들어도 심경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을 터.
“바보라서 하는 질문은 아닐 테고.”
“그냥 직접 듣고 싶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심경의 변화가 없었는지.”
“만약 있었다면.”
“그 또한 염두에 두어야겠지요.”
나에 대한 대비 또한 준비하겠다는 의미.
“그걸 당사자한테 묻겠다고?”
“딱히 방법이 없던데요.”
레이크는 표정 변화 없이 뻔뻔하게 굴었다.
본래 표정이 없는 놈이기는 하지만.
당사자에게 속내를 묻는 게 바보 같아 보이긴 해도, 내 성정을 파악하고 그리했다면 현명한 선택이다.
나는 굳이 거짓을 말하지 않을 테니.
“그럴 일은 없다. 지난번에 이미 말했듯, 나는 녀석을 왕으로 세울 작정이니까.”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으니 혹시나 했습니다.”
“괜한 데 힘 빼지 마. 귀찮아서 하래도 안 해. 그리고 내가 그걸 원한다면 너는 어차피 막지 못한다.”
녀석의 계책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그 머리통을 베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니 그냥 믿으라는 의미였다.
“예. 확실히 막을 방도가 없긴 하더군요.”
“알면 됐다.”
“그래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또 뭔 일을 시키려고.”
“저는 이제 독립 이후를 생각하는 중입니다.”
확실히 그 이후를 염려할 때가 됐기는 했다.
우리가 독립을 선포한다고 해서 제국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으니까.
천지를 메울 대군을 이끌고 오겠지.
내 몸은 하나다.
그들 모두를 막아 낼 수는 없다.
레이크가 말을 이었다.
“제네스 님 덕분에 독립을 선포할 수 있는 시기는 앞당겨졌습니다. 하지만 프렌치아를 완전히 정비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요.”
독립을 선포하는 것과 프렌치아가 전처럼 안정적인 나라가 되는 것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독립 선포가 제국과의 강제 합병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왕국으로 거듭나겠다 공표하는 것이라면, 안정적인 나라가 된다는 건 국토 전역에 깔린 제국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변절자들까지도 싹 다 정리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제국이 그때까지 프렌치아를 가만둘 리 없겠지.
“그래서 일부러 시기를 늦추는 방법도 생각은 해 보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급진적인 독립이 아닌, 천천히 세력을 넓혀 가자는 의미.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녀석이 하는 고민이 무엇인지도 대충 알 만하다.
“루시안은 뭐래.”
“제네스 님 의견을 따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땅따먹기처럼 안전하게 세력을 넓히는 게 확실하기는 하겠지만, 어느 세월에. 차라리 황제의 목을 베고 말지. 어차피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제국을 이겨 내는 수밖에 없어.”
내가 황제의 목을 베는 것을 목적으로 두지 않는 건, 내 목적이 복수가 아니라 국민들에게 나라를 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어차피 제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
레이크가 말을 이었다.
“천천히 간다면 10년 예상하고 있습니다.”
“뭐? 10년? 그따위 계획은 당장에 집어치우고, 다른 방도가 있으니 그 말을 꺼냈겠지?”
녀석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네. 사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준비해 둔 계획이 있습니다. 도박이 필요하지만요.”
내 그럴 줄 알았지.
녀석은 애초에 이 계획을 염두에 두고 움직였을 거다.
날 또 어디로 돌리려는 작정인가 본데.
지금까지는 그것에 관해 말하기 위한 서두였을 테지.
“지금 당장에 할 일은 아니고요. 독립을 선포한 후에 진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게 뭔데.”
레이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나 안 바래다줘도 되거든.”
이리엘의 말에 루시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미안하지만, 나도 갈 길 가고 있는 건데.”
“에? 오빠도 우리랑 같은 건물에 있었어?”
“아니, 거기 말고 다른 데.”
“뭐야, 같은 방향이라며.”
“어. 제네스에게 가는 길이야.”
이리엘은 입술을 삐쭉거리며 루시안을 아래위로 훑었다.
“나 이제 몇 번째로 밀리는 건데.”
“그러게.”
“참 나.”
이리엘이 기가 차다는 듯 헛숨을 뱉었다.
“그래도 언니랑 좋아 보이던데.”
이리엘은 혼자 쿡쿡거리며 루시안을 팔꿈치로 찔러 댔다. 예상했지만, 둘은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렸다.
“아주 장가 잘 갔어.”
“너도 슬슬 시집가야지.”
“나는 아직 젊거든요! 그런데 그럼, 결혼식은 독립 후에 하는 거야?”
“그래야지. 어차피 지금은 공개할 수도 없으니. 사실 약혼한 상태나 다름없지.”
약혼이라는 말에 이리엘의 표정이 찰나 굳어졌다.
그것을 알아챈 루시안이 말문을 열었다.
“많이 심란했겠어.”
“뭐 그랬지.”
가짜 왕세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진짜 똑같더라. 컸으면 그렇게 컸을 거야.”
“하긴, 성인이 된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루시안도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차라리 가짜라서 다행이다 싶어. 안 그랬다면 더 슬퍼졌을 거 같아서.”
식당에서 나눴던 대화만 봐도 그가 살아 돌아왔다면 상황이 복잡하게 얽혔을 듯했다.
제네스가 한 말만 들어 봐도 그렇고.
레이크 또한 같은 생각이었겠지.
결국에는 루시안과도 반목하게 됐을 거다.
그럼 과거의 추억마저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터.
그러니 차라리 잘됐다.
돌아왔어도 더 불행해지기만 했을 거 같으니까.
루시안은 한숨을 푹 내쉬는 이리엘의 머리칼을 헝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무조건 살아 있는 게 더 좋았을 거야.”
이리엘은 눈을 들어 루시안을 보았다.
그는 환히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알잖아.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그 한마디에 마음속에 끼어 있던 짙은 먹구름이 창졸간에 흩어진다.
이리엘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걸렸다.
“맞아. 바보같이 착한 왕세자였어.”
“그래. 네가 여간 못살게 군 게 아니었지.”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치, 훨씬 심했어.”
이리엘이 눈을 사납게 흘기자, 루시안은 괜히 딴청을 피우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는 그런 루시안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뭐랄까.
지금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던 거 같다.
그냥 루시안의 한마디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쨌거나 오빠 덕분에 마음이 좀 넉넉해졌어. 진짜 왕세자도 가짜 왕세자도 잘 보내 줄 수 있을 거 같아.”
루시안의 말이 맞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들은 알고 있었다.
왕세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착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는지.
적어도 루시안과 그가 서로 반목하는 상황은 없었을 거다.
평화롭게 잘 해결해서 힘을 모을 방법을 찾아냈겠지.
분명 그랬을 거다.
자신이 아는 왕세자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루시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남은 제네스는 하나뿐이네.”
“그러게.”
“뭐야? 생각보다 반응이 미적지근한데?”
“응? 뭐, 뭐가?”
이리엘이 당황하며 되묻자, 루시안은 그보다 더 당황하며 동공을 키웠다.
“……너 설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그 인간을? 오빠 미쳤어?”
이리엘이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눈을 흘기자, 루시안의 입이 헉 하고 벌어졌다.
의혹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너 어쩌자고.”
“아, 아니라니깐!”
“에효. 그 자식 쉽지 않을 거 같은데.”
“죽을래? 아니라고 했지.”
두 주먹을 쥐고 시퍼런 불길을 피워 내는 이리엘의 안광에, 루시안은 일단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그는 이미 이리엘의 마음을 확신한 탓이다.
그녀가 저런 눈빛을 보내는 건 과거의 저하 말고 없었으니.
“이건 그냥 묻는 건데, 제네스 평소 성격은 어때? 뭐 생각보다 자상하다거나.”
“자상하기는 무슨. 뭐 별다를 게 있겠어. 오히려 더 하면 더했지. 잔소리가 얼마나 심한데.”
이리엘은 신이 나서 제네스의 뒷담화를 해 댔다. 루시안은 그 말을 들으며 입가가 근질거렸지만, 차마 밖으로 뱉어 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런 놈이 대체 왜 좋은 건데…….
루시안은 이리엘을 다정히 불렀다.
“엘아.”
“응?”
“시집은 최대한 늦게 가자. 나 그 결혼 반대다.”
“무슨 결혼 말하는 거야.”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이리엘이 미간을 잔뜩 구겼다.
“아니. 그냥 널 내 옆에 오래 두고 싶어서.”
“나도 아직 갈 생각 없거든!”
“그래. 잘 생각했어.”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린다.
안 그래도 제네스와 나눌 말이 많았는데, 더 많아진 거 같다.
“오빠.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어디 가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안 해. 내가 바보냐.”
“이상한 생각도 말고. 분명 안 좋아한다고 했다.”
“알았어. 너 그 자식 안 좋아해. 됐지?”
“응.”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리엘을 보고 루시안은 혀를 내둘렀다.
안 좋아하기는.
딱 봐도 좋아하는구만.
그것도 꽤 많이.
에효.
동생 걱정에 한숨부터 나오는 루시안이었다.
하필이면 그 얼음덩이 같은 녀석을…….
대체 걸어 다니는 검 같은 그런 녀석이 뭐가 좋다고.
다른 건 몰라도 하나뿐인 여동생의 남편감으로는 꽝인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