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제119화 새로운 소속
푸른 파도가 치는 해안가.
정박해 있는 선박 앞으로 흑소만큼 커다란 늑대가 꼬리를 살랑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늑대라 부를 수 없는 녀석을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얘 뭐야.”
“……네스요.”
이리엘이 멋쩍게 웃으며 녀석의 털을 쓸었다.
그 옆에 선 그녀는 이제 도시락이 아니라 가벼운 후식처럼 보일 지경이다.
“오늘 보니까 이렇게 커 있더라구요.”
“여기에는 왜 데리고 온 거지?”
우리는 현재 제국군의 범선을 개조하여 섬을 떠나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었다.
거기에 저 늑대는 함께할 수 없다.
도시에 들어가는 순간, 몬스터로 몰려 사냥당하고 말 테지.
그것은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을 터.
이리엘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늑대를 바라보았다.
“배에 태우려고 데려온 건 아니에요. 얘가 도저히 떨어지질 않아서 같이 온 거지.”
녀석은 커다란 머리통을 이리엘에게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덩치는 산만 한 게 하는 짓은 강아지와 다름이 없다.
“알아서 처리해.”
“……네.”
이리엘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녀석의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미안해, 네스.”
이리엘이 녀석을 부르는 소리에 눈썹이 절로 꿈틀거린다.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 이름이다.
얼핏 들으면 내 이름처럼 들리니.
“네가 너무 커서 함께할 수가 없어. 네가 요만한 강아지처럼 조그맸으면 좋았을 텐데.”
이리엘이 양손으로 강아지만 한 크기를 그려 주며 네스를 설득해 갔다.
저런다고 늑대가 알아들을 리 만무하지만.
“컹! 컹!”
한차례 짖은 녀석의 몸에서 빛 무리가 뿜어져 나온 건 그때였다.
새하얀 빛에 감싸인 녀석의 몸집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아진 빛 무리는 이리엘이 손으로 그렸던 크기만큼 작았다.
“뭐, 뭐야?!”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이리엘이 화들짝 놀라며 네스를 바라보았다.
마법을 부리다니.
그 많은 마력을 소화하더니 아무래도 몬스터가 아니라 영물이 되어 버렸나 보다.
둔갑술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
하긴, 차원의 틈새를 만들기 위해 10년간 막대한 마석을 쏟아부었을 텐데 얼마나 많은 마력이 담겨 있었겠나.
영물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모두 내 덕이기는 하지만, 더럽게 운이 좋은 녀석이었다.
“우와아! 네스! 어떻게 한 거야!”
이리엘은 녀석을 품에 번쩍 안아 들고는 푹신한 털에 볼을 비볐다.
“너무 귀여워!”
“깡! 깡!”
녀석 또한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려 댔다.
이리엘은 환히 웃으며 내게 시선을 던졌다.
“이제 데려가도 되죠!”
“마음대로. 대신 이름은 바꿔라.”
“무슨 소리예요. 전부터 네스였는데. 계속 네스라고 부를 거거든요! 그렇지, 네스야.”
빌어먹을.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팩 돌렸다.
멍청한 왕세자 녀석은 하필이면 늑대 이름을 네스로 지었단 말인가.
잠시 후.
모든 준비를 끝낸 배가 이모텔섬에서 힘차게 출항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배 후미에 선 이리엘은 해안가에 줄지어 있는 움파움파족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들 또한 해안가까지 나와서 우리를 배웅하고 있었다.
“언젠가 꼭 놀러 오게!”
“까먹지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까먹지 않기는.
나는 그들 중 몇몇은 오늘이 가기도 전에 우리를 까먹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솨아아.
항해하기 좋은 바람이 불어온다.
우리는 처음과 달리 푸르러진 이모텔섬을 바라보며 점차 멀어져 갔다.
* * *
파도가 넘실거리는 광활한 바다를 항해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
저 멀리 포르센 항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아-.”
뱃머리로 나와 내륙을 바라본 광부들은 깊은 탄성을 터뜨렸다.
“드디어…….”
짧게는 두 달, 길게는 8년 동안 이모텔섬에 있었던 이들이었다.
그 시간이 짧았건 길었건, 광산에 있던 나날들은 희망 없는 무채색의 삶과 다르지 않았을 터.
그런 이들에게 내륙은 꿈에나 그리던 고향과 다름이 없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른 이들이 포르센 항구를 보며 흐느꼈다.
뱃머리는 금세 눈물바다가 되었다.
통한의 눈물이 아닌 감격의 울음이었다.
앞으로 이들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터였다.
그리고 다행이라 한다면, 이모텔섬에서 가져온 마석으로 이들의 노역을 적절히 보상해 줄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급여는, 굽이치는 해협에서 마석이 갖는 값어치를 환산하여 지급할 작정이었다.
그것을 위해 네더만과 알렌은 우리보다 먼저 포르센 항구로 떠난 상태였고.
아마 지금쯤이면 대략적인 일 처리를 모두 마쳐 놓았을 터.
이들의 임금은 광산에 머문 시간별로 차등하여 지급할 예정이다.
그것으로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받을 수야 없겠지만, 다시 살아가기에는 충분한 도움이 될 거였다.
타닥.
발끝에 단단한 지반이 밟혔다.
배를 정박한 우리는 드디어 내륙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다들 감격에 찬 눈으로 낯선 세상을 둘러보았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신기하게 다가오는 듯했다.
“오셨어요.”
알렌과 네더만이 그런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굽이치는 해협에서 미리 조치를 해 둔 덕분에 우리는 별다른 문제 없이 광부들과 함께 포르센에 들어설 수 있었다.
“모두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포르센 지부 사람들까지 나와 광부들의 인솔을 도왔다. 광부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지부에서 모두 지원해 줄 예정이었다. 얻은 마석을 모두 처분한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이다.
“……알스.”
“……알렌.”
알렌과 알스는 한바탕 부둥켜안으며 해후를 나눴다.
“정말 고맙다.”
알렌을 바라보는 알스의 눈가에는 여러 겹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알렌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심히 돌아가.”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으려나.”
“그러게.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알렌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내가 몇 번이고 한 말이었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알스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아마 그를 위해 따로 준비한 돈인 듯했다.
“편히 받아.”
“아, 됐어. 지금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너 주는 거 아니거든. 내가 돌아갈 때까지 데이지 잘 보살펴 주고 있으라고.”
“한눈팔지 않도록 감시하라는 거냐.”
알스가 픽 웃으며 말하자, 알렌은 얼굴을 붉히며 볼을 긁적거렸다.
“그런 건 아닌지만, 어쨌거나.”
알스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생, 과부 만들면 안 된다.”
“당연하지.”
알스는 다시 한번 진하게 포옹한 후 광부들의 뒤를 따랐다. 알렌은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리엘이 그런 알렌의 등을 치며 옆으로 섰다.
“데이지랑 가족들에게도 점수 왕창 땄겠어요.”
“하하. 그렇지.”
알렌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네더만도 그 모습을 보며 한마디를 보탰다.
“비명횡사만 하지 않으면 결혼하겠구만. 나보다 나은데?”
“그럼요. 저는 한 여자만 바라보는 순정파라고요.”
알렌이 눈에 힘을 주며 말하자 네더만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짓이군.”
“이제 좀, 철들 때도 되지 않았어요?”
이리엘의 핀잔에 네더만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을 이어 갔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철이 들다니. 사내는 철이 들면 죽은 거나 다름없는 거라고. 평생 내가 들 철은 검 하나면 충분하네.”
하여간 입만 살아 가지고.
내가 말했다.
“됐고, 지부로 간다.”
“넵! 어서 지부로 가시죠!”
내 말에 알렌이 반색하고 나섰다.
“제네스 님과 이리엘에게 전해야 할 뜻깊은 소식들이 산더미라고요.”
음흉한 미소를 짓는 꼴을 보니, 우리가 이모텔섬에 있는 동안 내륙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진행된 듯했다.
“오셨습니까.”
굽이치는 해협의 포르센 지부장, 헨손이 내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우리는 어느새 지부 회의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알렌과 네더만을 비롯해 지부장 녀석까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표정들이 그따위야.”
내 말에 알렌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가장 큰 사건부터 말씀드리자면, 북부의 흰사자와 굽이치는 해협이 합병했다는 소식입니다.”
“네? 정말요?”
이리엘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막았다.
두 세력의 합병이라니.
네 개의 파벌로 이루어진 독립군의 힘의 평형이 단숨에 기울어진 것이다.
독립을 위해서는 독립군의 통합이 가장 우선인 바.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네더만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는 나를 타박했다.
“좀 인간적인 반응을 보일 수는 없는 건가? 어찌 조금도 놀라지를 않아. 하여간 인간성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다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듣자마자 기절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죠.”
알렌도 또한 말을 보태며 입을 빼쭉거렸다.
내 무덤덤한 반응이 꽤나 아쉬운가 보다.
나와 이리엘의 반응을 관찰하기 위해 그런 음흉한 미소들을 짓고 있었을 테니.
나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그래서 누가 대장인데.”
합병이 이뤄졌다면 한 명의 수장을 선출했을 터.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물었다.
네더만 녀석이 입꼬리를 씰룩이며 답했다.
“카드론 녀석이 고개를 숙였다더군. 자네들 수장이 한 성깔 하나 봐.”
제 오빠 이야기에 이리엘이 눈을 부릅뜨고 나섰다.
“우리 오빠가 성격이 얼마나 유한데요! 네더만 씨와 달리 품행이 바르기 그지없다구요!”
“그래? 자네와는 또 다른가 보구만.”
“제 성격이 어때서요! 저 어디 가면 인품이 훌륭하다고 칭찬이 자자하걸랑요!”
“허. 그렇게 자기 자신을 몰라서야. 이거 세 살배기 애가 여기 하나 더 있었군그래.”
“지금 제 성격이 더럽다는 거예요?!”
이리엘이 목소리를 높이며 노려보자,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네스가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냈다. 그제야 그 작은 생물체에 관심을 둔 네더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스가 죽으면서 새끼라도 낳은 겐가?”
네더만과 알렌은 네스가 깨어나는 걸 보지 못하고 떠났기에 저 녀석이 네스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터였다. 이리엘은 갸르릉거리는 네스를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죽기는 누가 죽어요. 얘가 네스예요.”
둘의 고개가 동시에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네스를 떠나보낸 슬픔으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게야? 그 정도로 정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그게 아니라, 네스가 몸집을 이만큼 줄인 거라구요.”
서로 눈을 마주친 네더만과 알렌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렌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네스는 왕세자님을 따라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너무 염려하지 마.”
“아니, 이 사람들이 사람 말을 못 믿네.”
뿔이 난 이리엘이 네스를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스 한번 본 모습을 보여 줘.”
그녀의 말을 따라 엉덩이를 씰룩이며 회의실에 한복판으로 간 네스의 몸에서 일순 빛 무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돌풍이 일어 실내를 휩쓸었고, 이내 잿빛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가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넓었던 공간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덩치였다. 그 모습을 본 네더만과 알렌, 지부장은 약속한 것처럼 입을 떡하고 벌렸다.
“대체 뭔가 저건.”
“네스가 저렇게 됐다고?”
본인이 네스임을 손쉽게 증명한 네스는, 다시 몸집을 줄인 뒤 이리엘의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여전히 멍한 표정의 세 녀석에게 짖어 댔다.
“깡! 깡!”
“봤죠?”
그런 녀석을 이리엘이 흐뭇하게 웃으며 쓸어 만졌다.
“…….”
잠깐의 적막 이후, 네더만이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군. 그런 의미에서 우리 쪽에서도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도록 하지. 이리엘 집안의 경사랄까.”
네더만은 엉큼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오빠 결혼했다.”
“네?!”
이리엘은 다시 한번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얼마나 놀랐는지 몸을 한차례 들썩일 정도였다.
나는 합병했다고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픽 웃었다.
카드론 자식.
내 그럴 줄 알았지.
그가 합병을 선택한 이유에는 내가 총독부를 휘젓고 가짜 할렌트의 목을 벤 것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결국 루시안에게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 거다.
아마 레이크 녀석도 함께 있었겠지.
루시안은 누구보다 왕의 자질을 가진 녀석이었고, 레이크는 내가 무림맹의 군사인 제갈문학을 떠올릴 정도로 뛰어난 책략가.
그들은 내가 봐도 빼어난 인재들이었다.
거기에 나까지 포함해서 보면, 프렌치아에 승률이 있다고 여겼을 터.
언제고 왕이 될 루시안을 잡고자 정략혼인을 추진하는 건 그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세실리아 언니랑요?”
“그렇지.”
“언니라면 당연히 찬성인데,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스럽기는 하네요.”
이리엘은 혼이 반쯤 빠져나간 듯했다.
어쨌거나 깔끔하게 합병이 된 듯한데.
카드론 녀석이야 박쥐 같은 놈이라 끝까지 경계를 풀 수는 없지만, 이제 완전히 한배를 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리엘이 놀란 가슴을 진정한 기미를 보이자, 알렌이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이유로 저희에게 새로운 소속이 생겼는데요. 두 세력이 합쳐지면서 새로이 건립된 단체의 이름은 바로.”
창가로 기다란 햇볕이 비쳐 들었다.
“‘프렌치아 임시정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