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제115화 가짜와 진짜 (1)
포털.
차원을 잇는 문.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마법적 가설이었지만, 그것이 눈앞에 실존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아-!
붉게 일렁이는 포털 안에서 먹구름 같은 것이 급류가 몰아치듯 쏟아져 나왔다.
그것에서 전해지는 막대한 마력의 파동.
나는 내게 밀려오는 짙은 검은색 운무를 갈랐다.
피슈슈슈슛!
손끝을 따라 일렁이는 섬광.
곡선의 궤적이 얽히고설키며 내 앞으로 검막을 만들어 냈고, 그것에 닿은 검은색 운무는 먼지처럼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다.
몰아치던 그것이 한차례 지나가고 나서야 시야가 트였다.
포털은 여전했으나 더 이상의 돌풍은 없었다.
안정적으로 개방됐는지 상층부는 고요했다.
“크아악!”
그때 저편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창졸간에 곳곳에서 일어나는 처절한 소리들.
나는 시선을 돌려 도시를 바라보았다.
먹구름 같은 것이 강물처럼 흐르며 도시를 쓸어 가고 있었다.
비명은 그 앞에 놓이거나 삼켜진 이들의 것이었다. 할렌트 또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저것들이 불멸의 부대인가.”
“그래. 죽지 않는 이계의 그림자들. 이제 그것이 나의 손에 들어왔음이다.”
빠르게 도시를 삼켜 가는 것들의 폭발력은 상당했다.
적(敵), 아(我)를 구분치 않는 듯했다.
죽지 않는 것들이 살아 있는 것들을 모두 죽이고 있었다. 그것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생을 잃은 시체들이 무너져 내렸다. 시체들은 하나같이 무언가에 절단된 듯한 상흔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먹구름 안에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할렌트가 말했다.
“왕세자가 제어를 잃은 탓에 폭주하는가 보군. 차원의 문을 닫지 않는 한 멈추지 않을 게야. 이대로라면 움파움파 부족도, 광부들도 모두 쓸려버릴지 모르겠군.”
녀석의 말에 나는 별다른 동요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결 방법은 간단하지 않나.
나는 바닥에 쓰러진 가짜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저것들이 도착하기 전에 저 자식을 죽이면 되겠군.”
“가능할까?”
할렌트가 씩 웃었다.
가짜 왕세자는 기절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처웃는 걸 보니 뭔가 다른 수작이 있나 본데.
나는 대수롭지 않게 검을 내리그었다.
기다랗게 뻗어진 검기가 수직으로 떨어지며 녀석의 목을 갈랐다.
촤-악!
칼끝에서부터 녀석의 목까지 이어지는 일직선의 검흔이 바닥에 새겨졌다. 그것을 보고 화들짝 놀란 이리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 팔을 잡고 늘어졌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에요!”
“컹! 컹!”
늑대 녀석도 내게 사납게 짖으며 적의를 드러냈다.
“가짜인 녀석이다. 지금 상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지. 그런 녀석 때문에 다른 이들이 죽어야 하나?”
“…….”
이리엘은 아랫입술을 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 소맷자락을 힘없이 놓았다.
“동감이다.”
할렌트가 내 의견에 동의하고 나섰다.
녀석이 동의하자, 나도 놈과 같은 쓰레기가 된 거 같아 괜히 배알이 꼬였다.
하지만 방도가 있나.
저것들이 다른 이들을 죽이게 할 수 없었다.
저 정도 속도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섬을 가로지를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할렌트의 표정은 10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자의 것이 아니었다.
내 의문을 읽었는지 할렌트가 입매를 비틀며 입을 열었다.
“아쉽겠지만, 이제 저 녀석 또한 불멸이다.”
“과연 그렇군.”
나는 가짜 왕세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단된 목 주위로 흐른 핏물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흐른 핏물은 바깥으로 번지고 있는 게 아니라, 다시 녀석의 몸속으로 스며들며 머리통과 목을 붙이고 있었다.
“……!”
이리엘은 그것을 보며 입을 막았다.
내게도 꽤 신기한 장면이었다. 기인이사(奇人異士)를 많이 봐 왔지만, 잘린 목이 붙는 건 또 처음이다.
Dr. 주르하 때와는 또 달랐다.
나는 흥미롭게 그 광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지?”
“알려 줄 거라고 생각하나.”
“방법이 있기는 한가 보군.”
“그건 나도 모르지.”
할렌트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였다.
나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가짜 왕세자가 불멸이 된 것이지, 그 자신이 불멸이 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제가 기다리던 힘은 의미 없이 저편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왜 아무런 동요가 없지?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말했다.
“너도 목숨이 여러 개냐?”
“아니. 나는 한 개다.”
“그런데 왜 그리 여유롭지.”
“간단한 거 아니겠나.”
할렌트가 씩 웃었다.
“힘을 얻었으니까.”
스스스스슥.
바닥을 스치며 다가오는 소리가 있었다.
떠났다고 생각했던 불멸의 부대가 그와 내 사이로 내려서기 시작했다.
자욱이 앞을 가려오는 검은 운무.
나는 그제야 그 안에 담겨 있던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검은 불꽃처럼 일렁이는, 인간과 비슷한 형상을 한 이들.
제각각 무언가 무기를 꼬나쥐고 있는데, 구체적인 형상을 가진 것들은 아니었다.
마치 뭉친 구름 같달까.
때문에 수를 어림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기파가 상당했다.
죽지 않는 소드 마스터를 얻은 것과 같다 했던 그 말은 사실인 듯 보였다.
“크어어어-.”
기묘한 울음소리를 내며 구름 사이로 붉은빛을 방출하는 녀석들.
멋대로 폭주하던 처음과 달리 누군가의 제어를 받는 듯 전열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쩐지 여유롭더라니.
검은 먹구름이 좌우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할렌트가 드러났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어찌 된 일이지?”
분명 의식을 치른 건 가짜 왕세자였다.
통제를 해도 가짜 왕세자의 몫 아니었나.
“정신 제어다. 저 녀석에게 심어 놨지.”
가짜 왕세자의 정신을 통제하는 것으로 이들을 통제한다라.
“왜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저 녀석 하나였다고 생각하나?”
할렌트는 자신의 승기를 자신하는지 순순히 말해 주었다.
“차원의 문을 몸에 새기는 의식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위험 부담을 안지. 그래서 그것을 대신할 그릇이 필요했다. 많은 이들이 그릇 판별 실험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 갔으나, 저 녀석은 개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놈이야. 그래서 세자의 얼굴을 준 것이다.”
대략적인 상황이 이해가 됐다.
가짜 왕세자의 존재는 차원의 문을 새기기 위한 그릇.
그런 녀석에게 세자의 얼굴까지 주어 정치적인 이득까지 노린 듯했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리엘에게 말했다.
“네더만이랑 알렌에게 가 봐. 밑에 있을 거다.”
“……몸조심하세요.”
뒤편에서 이리엘의 발걸음이 멀어져 갔다.
할렌트도 그런 그녀를 굳이 쫓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우리 둘뿐이었다.
그가 말했다.
“불멸의 부대는 나 또한 아직 잘 모르는 미지의 힘. 그것을 시험하기에 너는 참으로 적당하구나.”
솨아악!
할렌트의 손짓을 따라 검은 운무가 들이닥친다.
나는 그것을 갈랐다.
촤-악!
수직으로 양분되는 검은 운무.
깨끗이 반으로 갈랐음에도 손끝이 가볍다.
마치 허공을 벤 듯하다.
죽지 않는다는 의미를 알겠다.
그렇다고 실체가 없는 이들은 아니었다.
솨아악!
검은 운무 안에서 일렁이는 형상들이 검과 창 같은 병장기들을 사방에서 휘둘러 온다.
콰과과과광!
그것은 명백한 실체를 가지고 허공을 가르고 바닥을 부쉈다. 그리고 그렇게 실체를 가지는 찰나의 순간에는 녀석들 또한, 베인다.
촤-악!
흩뿌린 검광에 삼켜진 것들이 소멸하듯 흩어지며 검은 입자로 부서져 내렸다.
하나 지극히 일부일 뿐.
구름처럼 넓게 퍼졌던 것들이 나를 집어삼키려는 듯, 팔방에서 덮쳐 왔다.
일순, 칼끝이 푸르게 타올랐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3장 낙화유검(落華流劍).
분화하며 폭발하듯 뻗어진 빛줄기들이 사방에 휘날린다.
나부끼는 꽃잎처럼 변화무쌍하게 사위를 휩쓰는 검기.
찰나 실체를 가졌던 것들은 그 푸른 꽃잎에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먹구름이 개듯 시야가 맑게 트였다.
하나, 그것도 잠시.
가루들이 다시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운무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그들이 가진 불멸의 의미를 나는 완전히 이해했다.
하나, 세상의 만물은 모두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법.
대가 없는 무한한 힘은 존재할 수 없다.
계속 베다 보면 불멸의 동력을 알 수 있을 터.
그것은 높은 확률로 시전자와 연관되어 있을 거였다.
쾅!
나는 다시 뭉쳐 가는 운무 사이를 가로지르며 할렌트에게 쇄도했다.
물 흐르듯 뻗어지는 검격을 할렌트가 제 검으로 막아 냈다.
콰아앙!
뒤로 몸을 빼내며 충격을 흘린 녀석이 안광에 이채를 띠었다.
“과연 대단한 검력이군. 어떻게 그 나이에 그 정도로 강해질 수 있지?”
“궁금한가.”
“물론.”
“나도 너한테 궁금한 게 많은데 말이야.”
콰과과과광!
찰나에 검격이 얽혀 들자 사위의 노면이 짓뭉개 지며 터져 나갔다. 운무의 형태를 이룬 것들이 다시금 내게 쇄도해 왔지만, 나는 그것들을 베어 내는 동시에 할렌트를 압박해 갔다.
쿠르르르릉!
폭발하는 검격에 우레와 같은 폭음이 울었다.
짧은 시간, 수차례 검격이 오갔다.
녀석은 그 검격을 받아 내기 버거웠는지, 충돌의 반동을 이용해 거리를 벌렸다.
나는 그와 그 주변에 내린 거뭇한 것들을 무심히 보았다.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만.”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무력이군.”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까다롭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할렌트가 아직 불멸의 부대를 다루는 것에 익숙지 않다는 것이, 내게 굉장히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내 검을 막아 내는 동시에 그것들을 다루기가 벅찰 테지.
그는 그 때문에 오히려 본인의 무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불멸의 부대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오히려 두 힘을 함께 사용하기에 각각의 힘이 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 미숙함을 십분 활용하는 중이었고.
덕분에 상황이 생각보다 쉽게 흘러갈 듯했다.
녀석이 이 힘에 익숙했거나, 이 힘을 다루는 별개의 존재가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전투가 됐을 테지.
그래서 가짜 왕세자의 역할이 중요할 듯했다.
“네놈만 죽이면 이 힘을 제어할 사람은 가짜 왕세자뿐이겠군.”
“아니. 어차피 녀석은 제국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죽어야 벗어날 수 있는 금제지.”
한번 찔러 봤더니 역시나 할렌트 외에 다른 이들도 가짜 왕세자를 제어할 방법이 있는 듯하다.
제국의 꼭두각시로 쓰려는 속셈이었겠지.
그것을 확인하고자 던진 질문이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네놈의 목적은 뭐지? 고작 죽음이 두려워서, 권력을 얻고자 변절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는 호흡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잠깐의 소강상태가 기꺼울 테지.
노린 바였다.
녀석을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오기 위해 사납게 몰아붙인 것이니.
그의 변명을 듣고 싶었다기보다, 그저 궁금했다. 내가 알던 그는 변절을 택할 사내가 아니었으니까.
“날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는 픽 웃고는 이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륙을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 것이다.”
……천하일통(天下一統).
멍청한 놈들이나 꿈꾸는 포부였다.
이 넓은 땅덩어리를 통일해서 뭐 어쩔 건데.
“그렇게 할 일이 없나. 그래서 얻는 게 무엇인데.”
“하나의 나라. 하나의 국민.”
“하나를 위한다는 놈들이 프렌치아 국민들을 그리 핍박했나.”
“모든 결과에는 대가와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그 결과가 찬란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는 법이지. 어차피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게 될 거다. 중요한 건, 그로 인해 무엇을 얻는 가지.”
“그 대가가 너의 것이어도 말이냐.”
“아니. 나는 그 대가를 치르지 않기 위해 변절했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씁쓸했다.
그가 변절을 선택하게 되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고뇌가 있었을 테지.
하나, 우스운 말이었다.
결국 대의를 위해 국민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턱도 없는 말.
무엇이 크고 작은지.
무엇이 무겁고 가벼운지.
그것은 오로지 권력자의 가늠좌를 따른 무게추일 뿐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멋대로 작은 것이라 치부하고 짓밟는.
힘을 가진 자들의 오만.
하지만 내게는 녀석이 작다 치부하는 프렌치아 국민, 한 명 한 명의 삶이.
녀석이 크다 말하고 있는 천하일통(天下一統)보다 한없이 무거웠다.
그런 이유로.
“이제 네놈의 목과 네놈의 가문과 네놈의 제국이.”
나는 검병을 움켜잡았다.
“작은 것이 될 차례다.”
녀석의 목적은 역시나 하잘것없는 이유였다.
막연한 궁금증도 풀었겠다, 이제 놈의 목을 벨 차례.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마안-!!”
소리를 쫓으니 의식을 되찾은 가짜 왕세자가 우리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싸움을 그만두거라! 감히 누구 앞에서 이따위 행태를 벌이는 것이냐!”
할렌트는 그런 그를 보며 반색했다.
불별의 군대를 제어할 이가 따로 있다면 승기를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가짜 왕세자는 뭔가 조금 달랐다.
상당히 비장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오른팔을 포털 안에 밀어 넣은 상태였다. 그것을 바라본 할렌트 또한 미간을 사납게 구겼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할렌트가 그를 싸늘히 보았다.
스스스슥.
할렌트의 주변에 있던 불멸의 부대가 왕세자의 뒤편으로 구름처럼 흘러가 집결했다.
할렌트의 눈빛이 한차례 동요했다.
가짜 왕세자가 그런 그를 보며 웃었다.
“역시 신체 일부가 다른 차원에 있으면 정신 제어가 말을 안 듣나 보군요.”
이계의 마력 자기장이, 가짜 왕세자 몸에 새겨진 정신 제어가 발동되는 걸 방해하는 듯했다.
할렌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런가 보군. 예상치 못한 변수다. 그런데, 그래서? 차원의 문을 평생 열고 있기라도 할 테냐.”
할렌트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예상대로 차원의 문을 무한정으로 개방하고 있을 수는 없는 듯했다.
“너는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이다. 그러니 얌전히 말을 따라라. 그러면 굳이 정신 제어를 할 일은 없을 것이니.”
“여태 그랬던 것처럼요?”
“그래. 웬일로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프렌치아도 제게 주시는 겁니까.”
“왕가의 인물은 될 수 있겠지.”
그저 왕족으로 살라는 말이었다.
그에게는 부와 명예가 쥐어질 거란 의미이기도 했다.
하나, 프렌치아는 쥐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이해한 듯 가짜 왕세자는 쓰게 웃었다.
“사실 저놈이 제 목을 베었을 때 정신이 들었습니다. 죽는다는 거 섬뜩하더군요.”
녀석은 나를 한차례 노려보고는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동시에 별거 아니라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가짜 왕세자는 할렌트를 보며 낯빛을 굳히고는 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참으로 무엄하구나, 할렌트 바레인.”
“뭐라?”
할렌트의 눈썹이 사납게 비틀렸다. 가짜 왕세자는 지금까지와 달리 할렌트를 흔들림 없이 직시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 몸이 만만한가 보지?”
너희들?
녀석이 말한 너희들은 나와 할렌트를 의미했다.
그의 시선이 그것을 증명했다.
“나는 왜.”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할렌트와 하나로 묶일 이유가 없었다.
“닥쳐라! 네놈도 내게 가짜라며 무엄하게 굴지 않았느냐.”
“그건 사실이지 않나.”
“닥치래도!”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할렌트가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한번 죽다 살아나더니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구나.”
“나는 제네스 쿤 프렌치아다!”
왕세자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그의 안광이 뜨거운 열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 나라, 프렌치아의 왕세자란 말이다! 어디서 감히 이 몸에게 주제를 논하느냐!”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인가.”
“아니, 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다. 이제야 그런 것이 억울할 정도로.”
그 말대로였다.
그의 눈빛은 전과 달리 흔들리지 않았다.
단단한 신념을 품은 시선.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할렌트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가짜 왕세자는 짓씹듯 말을 이었다.
“네놈은 내게 진짜로 살게 해 준다고 했지. 하지만 나는 말이다, 단 한 번도 가짜로 산 적이 없느니라. 나는 지난 10년간 나라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지난 10년간 이 나라 국민들을 생각하며 살아왔단 말이다!”
그가 울분을 토해 내듯 소리쳤다.
“그럼에도 이 몸이 가짜라고?! 가짜 왕세자라고!”
“그래, 네놈은 가짜다.”
할렌트는 격하게 감정을 토해 내는 그와 달리 침착하게 말했다.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고 생각하지? 모두 의도한 바였다. 인간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니. 프렌치아를 향한 네 마음은, 한심하고 천한 네놈이 10년간 제 몫을 다할 수 있도록 만든 족쇄일 뿐이다.”
“그럼 지금까지 왕세자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내 삶은 무엇인데? 그 시간은 아무것도 없던 것이 되나?”
그는 제 앞섶을 움켜쥐며 말했다.
짙은 한탄이 묻어 나는 목소리.
지난 시간 할렌트가 만든 거짓 속에서 살아왔다지만, 그에게만은 모두 진실인 시간이었고 진심인 시간이었다.
그 모든 삶이 한순간에 부정당했으니 원통할 만도 하다.
할렌트가 말했다.
“그러니 지금까지처럼 내 말을 따라라. 그럼 모든 것은 네가 알던 그대로가 될 것이니.”
“……네가 뭔데. 네놈들이 무엇이길래 내 삶을, 이 나를 가짜라 규정한단 말이야!”
“누가 네놈보고 가짜라고 하더냐!”
할렌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했다.
“이대로 살아가면 진짜가 될 수 있대도.”
가짜 왕세자는 조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진짜가 아니야.”
그의 은안이 시리게 타올랐다.
“나는 지금까지 프렌치아를 위해 살아왔다. 그것은 왕이 되기 위해서도,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야. 나는 프렌치아를, 내 나라 국민들을 사랑했기에, 그들을 이끌고 싶었기에, 그래서 프렌치아의 왕이 되고 싶었다.”
그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네놈을 따라 얻는 삶은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야. 그건 나한테 진짜가 아니야. 나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한심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끝끝내 네놈의 말을 따랐지.”
가짜 왕세자는 싸늘히 입매를 비틀며 할렌트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한 번 목이 베이고 나니, 이제는 그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거 같아.”
무언가 짐을 털어 낸 듯이 홀가분한 표정.
“내게 진짜는 말이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은 말이다, 프렌치아를 이끌며 국민들을 아끼고 보듬는 삶이야. 왕세자로서 국민들의 아픔은 외면한 채 제국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네깟 놈이 무슨 프렌치아를 이끈다는 것이냐. 나라를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애송-.”
“나는 이 나라의 왕세자다!”
할렌트의 말을 자른 가짜 왕세자의 호통이 쩌렁쩌렁 울렸다.
“왕가의 유일한 적통이란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자격은 충분해.”
“……네놈이 제대로 미쳤구나.”
“그래, 내가 잠시 미쳤었지. 하지만 이제 아니야. 내가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국민들을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가짜인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다. 나는 가짜가 아니야.”
일렁이는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흔든다.
“그렇게 살아가느니, 나는 차라리…….”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할렌트를 응시하며 말했다.
“진짜로서 죽을 생각이다.”
그 무엇에도 부러지지 않을 신념이, 은색 눈동자 안에 칼날처럼 세워져 있었다.
“내 나라, 프렌치아를 위해.”
그가 이번에는 나를 보며 소리쳤다.
“제네스! 독립을 원한다 했지! 국민들이 핍박받기를 원치 않는다 했지! 반드시 그들을 지켜라.”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다.”
내 답에 입매를 비튼 녀석이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묻고 싶군. 너는 내가 가짜라고 했다. 내게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고 했어.”
그의 눈빛이 답을 찾은 듯 별처럼 빛났다.
“나는 이렇게 이 몸을 진짜라 증명할 것이다. 너는 나를 무엇으로 가짜라 증명하겠느냐!”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내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의지가 그 안에 있었다.
처음에 보았던 녀석과는 완전히 다르다.
녀석의 진심과 굳은 의지가 하나의 검처럼 벼려져 타올랐다.
신념으로 세워진 굳건한 칼날.
죽음 앞에서도 부러지지 않는, 인간만이 품을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검.
사람은 언제나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간다.
할렌트와 내가 큰 것과 작은 것을 나누는 가늠좌가 다르듯.
우리가 가짜라 해도, 그는 자신의 삶을 진짜로 생각하듯.
그렇다면 무엇이 가짜고 무엇이 진짜인가.
그는 지난 10년간 왕세자로 살았고, 국민과 나라를 향한 그의 마음은 언제고 진짜였는데.
모든 것이 부정당한 삶의 끝에서도 자신의 삶과 신념을 관철하는 자인데.
과연, 그의 삶을 가짜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그는 지금 죽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진짜임을 증명해 낼 생각이었다.
반면, 나는 그가 가짜임을 증명할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말문을 떼었다.
“사과하지.”
내가 아니면서 전생의 내 얼굴을 가진 자.
내가 아니면서 내 행색을 하던 자.
그런 놈이 괘씸했지만.
나는 녀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지금의 나보다는.
“진짜 이 나라의 왕세자다.”
내 말에 씩 웃은 녀석은, 그대로 포털 안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