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제113화 불멸의 군대 (4)
공기가 갈라지는 섬뜩한 소음이 연이어 울렸다.
목을 노리고 찔러 오는 쾌속한 검격에, 네더만은 자세를 낮추며 적의 하체를 검으로 쓸어 갔다.
그것을 뛰어올라 가뿐히 피해 낸 적이, 낙하하며 검을 수직으로 내리긋는다.
네더만은 검을 그어 올려 그것을 쳐 냈다.
콰-앙!
날붙이가 맞부딪치며 공간을 커다랗게 울리는 굉음이 일었다.
격돌의 여파로 칼날이 지잉 울었지만, 그것을 가눌 여유는 없었다.
쐐액!
튕겨 낸 검이 측면에서 휘어 들어오고 있었다.
짐승의 송곳니처럼 매섭게 파고드는 새하얀 섬광.
일순, 두 개의 칼날이 어지러이 얽혀들며 폭발음이 중첩되듯 터져 나간다.
콰과과과광!
흐릿한 잔영만을 남기는 궤적이, 쾌속하면서도 잔혹하게 움텄다.
오직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것에 목적을 둔 살검.
네더만은 그것을 마주하며 혀를 내둘렀다.
전쟁터를 굴러먹던 자라서 그런지, 검을 허투루 휘두르는 법이 없다.
모든 검격이 필살의 의지를 담고 있다.
확실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
자연스레 벌어진 간격으로 잠깐의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네더만은 검을 움직이지 않는 그 잠깐의 틈을 타 입을 놀렸다.
“이름이 뭐냐? 고블린도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데, 너도 이름 정도는 남겨야지.”
“어레온. ‘검은 짐승’이라고도 불리지. 네 목을 벨 자의 이름이니 잘 기억해라.”
“이거 참, 용 잡는 칼로 짐승을 베게 생겼군. 왠지 내가 손해 보는 장사인 거 같은데. 블랙 드래곤이 될 생각은 없나?”
장난기 어린 말과 달리 네더만은 검병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동시에 주변의 대기가 폭발할 듯 일렁인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첨예한 기세가 둘에게서 치솟아 올랐다.
공간마저 찢어발길 것 같은 흉포한 기운.
둘은 간격을 가늠하며 서로를 탐색했다.
네더만은 짐승처럼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상대의 강력한 기파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을 느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공간에 들어서는 감각.
생사의 기로에 들어선 것이다.
지금부터 실책은 단 한 번만 허락된다.
그것이 곧 죽음과 연관되기에.
검을 쥔 사내로서 가슴 뛰는 순간이었다.
쾅!
발끝이 폭발하며 네더만의 신형이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쏘아졌다.
그것은 적도 마찬가지.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이내.
둘의 칼날에서 마력의 불꽃이 타오른다.
어레온의 칼날에서는 선홍빛처럼 붉은 오러가.
네더만의 칼날에서는 영롱한 녹빛의 오러가.
그 색색의 궤적이 서로의 생을 빼앗기 위해 어지러이 얽혀들었다.
콰과과과광!
찰나에 격돌하는 검격.
그때 빽빽이 얽히는 궤적 틈새를 비집으며 사선으로 떨어지는 송곳니가 있었다.
솨아악!
어지러운 검로 속에 숨겨 둔 녀석의 진정한 이빨.
놓치지 않는다.
콰앙-!
목을 물어뜯기 위해 쏘아지는 그 검을 비껴 쳐 내는 동시에, 적의 허리춤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곧게 뻗은 녹색의 섬광이 어레온의 옆구리를 스치듯 지나치며 붉은 꽃을 피워 냈다.
하나, 검흔은 깊지 않았다.
그가 피해 낸 탓.
어레온은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아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살벌한 자식.’
오히려 더욱 깊숙이 이를 들이미는 녀석에, 네더만은 이를 악물며 몸을 휘돌았다.
앞으로 뻗어졌던 검극이 되돌아오며 공간을 휘감는다.
그것을 따라 녹색의 오러가 부채꼴 모양으로 이지러지며 적의 검을 막아 갔다.
콰아앙-!
오러를 피워 낸 두 개의 칼날이 부딪치며 공간이 진동했다.
동시에 사납게 일어나는 돌풍.
한발 늦게 대응했음에도, 네더만은 적의 검격을 속도로 극복했다.
검속이라면 자신 있는 그였다.
적의 검격을 막아 내던 네더만의 검이 돌연 질풍처럼 일어나 상대의 우측 어깨를 향해 쏘아진다.
빛살처럼 뻗어지는 녹색의 섬광.
피슛!
그것이 완전히 지나치고 나서야 어레온의 어깨에서 뒤늦게 핏물이 튀어 올랐다. 동시에 네더만의 허벅지에서도 핏물이 튀어 오른다.
하나, 둘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검을 뿌렸다.
허공에 흩뿌려진 핏물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시금 얽혀드는 궤적.
사위를 뒤흔드는 폭발과 함께 작은 전장이 가열하게 타올랐다.
그와 함께 이곳저곳에서 피어나는 붉은 핏물.
칼날에 덧씌워진 첨예한 오러는, 그들의 살갗에 직접 닿지 않고도 흔적을 새겼다.
창졸간에 생사가 갈리는 그 치열한 전장 속에서 그들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서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치달았다.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 펼쳐지는 날선 검도.
둘의 신형은 서로의 사각을 밟아 가며 어우러지고 있었다.
쿠르르르릉.
검과 검이 얽히며 발생한 충격파가 커다란 울음을 내었다.
네더만의 눈빛이 번뜩인 건 그때였다.
적의 빈틈을 포착한 까닭.
사위를 점하며 쏘아진 쾌검이, 결국 단단한 이빨의 틈을 벌리고야 만 것이다.
이 순간만을 노리고 있던 네더만은,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쿵!
발끝에서 폭발한 힘이 지반을 밀어낸다.
앞으로 쏘아지는 동시에 손끝으로 이어지는 힘의 동선이 있었다.
네더만은 그 폭발력에 칼날을 얹었다.
휘몰아치는 바람 13 검류.
제4식 질풍의 틈새.
녹빛의 검격이 적의 칼날을 타고 올라가 빗살처럼 뻗어진다.
압축된 세찬 광풍이 짐승의 아가리를 찢어발기며 공간을 그대로 관통했다.
촤-악!
어둠을 기다랗게 가로지르는 하나의 빛줄기.
그 궤도 위에 놓여 있던 어레온의 머리통이 허공을 날았다. 동시에 내부를 세차게 뒤흔들던 굉음과 충격파가 뚝 멎는다.
털썩.
무거운 적막 속에서 적의 신형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생을 잃은 적 앞에서 네더만은 씩 웃었다.
그는 이처럼 찰나에 생사가 갈리는 결착의 순간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그 이후에 맞이하는 승리의 희열.
이때만큼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게 명백해지는 순간도 없다.
“술이 무지하게 당기는군.”
네더만은 녀석의 옷을 찢어 자신의 상처들을 동여맸다. 다른 곳은 몰라도 옆구리를 가른 상처는 꽤 깊었다.
“크으. 쓰리구만.”
간단한 응급처치를 마친 그는 쉴 새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세 살배기와 다름없는 알렌이 적의 심장부에 홀로 간 까닭.
가만히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거, 나도 애 아빠가 다 됐어.”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알렌을 따르기 위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 * *
……이 녀석이 흰 사자?
주르하는 멀끔한 모습의 흰 사자를 바라보았다.
“문 앞을 지키는 자가 있었을 텐데.”
“당연히 베었지.”
할렌트의 말로 그는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검사라 했다.
기사 짓을 때려치우고 전장에서 굴러먹던 놈이라지.
흰 사자는 그런 녀석을 베고 왔음에도 검흔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가 소드 마스터라는 것에는 여지가 없을 듯했다.
거기에 공간을 아우르는 묵직한 존재감까지.
눈앞의 이자가 흰 사자인 것은 분명했다.
“클클클. 생각보다 젊은 놈이었구나.”
주르하가 속아 넘어가자 알렌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신의 허세신공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이제 네더만이 올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기만 하면 됐다.
보아하니 상대도 그것을 원하는 눈치.
주르하 또한 본인이 흰 사자의 전력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을 터였고, 의식을 완성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서로 원하는 바가 같은 것이다.
“두 번이나 죽였거늘,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지?”
알렌이 먼저 서두를 떼자, 주르하는 그것을 옳다구나 하고 받았다.
“클클클. 어떻게 살아 있냐니. 죽은 적이 없으니 살아 있는 거 아니겠나.”
그 대답에 알렌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했다.
제네스라면 이때 어떻게 말했을까?
그는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입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두 녀석 모두 그리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이다가 목이 베였지. 묻는 말에나 답해라. 나는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다.”
“흘흘흘.”
주르하는 웃음을 흘릴 뿐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알렌은 계속해서 말했다.
“첫 번째도 그렇고 두 번째도 그렇고, 네놈을 죽이니 시체가 사라지더군.”
그는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동시에 적에게 원하는 답을 끌어내기 위해, 그간 일행들과 함께 주르하에 관해 추측하며 나눴던 의문들을 자연스레 끄집어냈다.
“처음에는 동일 인물인 줄 알았으나, 두 번째 녀석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나와의 만남을 기억하지 못하는군.”
“그래서?”
“그러니 각기 다른 인물이란 이야기지.”
“클클클. 맞다. 우리는 각기 다른 인물이나 다름없지.”
애매한 답변이었지만, 녀석은 순순히 자신의 의도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네놈이 얼굴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목소리까지 똑같이 변조가 가능한데다, 거기에 인체 강화까지. 인체를 다루는 부분에 있어 인류의 의학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는 솜씨였다.”
“크헬헬헬! 네가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구나. 그렇다! 이 몸의 실력은 이미 신의 경지에 이르렀느니라!”
경박하지만,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자였다.
한번 띄워 줬더니 확 딸려 온다.
알렌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다고 네가 같은 얼굴로 수술한 여럿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흠. 왜지?”
“그런 몰골로 살아가길 바라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이냐.”
이것은 당시 이리엘의 주장이었다.
“크크크큭.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다니 뇌가 썩어 문드러진 놈이로다.”
반응을 보니 확실히 얼굴을 바꾼 건 아닌 듯하고.
“쌍둥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지?”
“그런 몰골로 살아가는 자가 둘이나 되다니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이 또한 이리엘의 주장이었다.
주르하는 지금까지와 달리 잠시 뜸을 들이다가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내 몰골이 어디가 어때서!”
알렌은 녀석의 항변을 깔끔히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같은 얼굴을 가진 다른 인물도, 쌍둥이도 아니라면 마법을 부린 게 분명하다고. 나는 그것이 분신을 만들어 내는 마법이 아닐까 예상한다만.”
알렌의 말에 주르하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저 되는대로 세웠던 가설이었지만,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네가 그런 마법적 능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아무리 마법이라도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아.”
여기가 분기점이었다.
지금까지 겪은 녀석의 경박한 성정을 봤을 때, 만약 흑마법을 통해 벌인 일이라면 녀석은 마법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며 유세를 부릴 테니까.
“클클클. 용케도 거기까지 생각해 냈구나.”
하지만 녀석의 반응은 건조했다.
적어도 흑마법으로 벌인 일은 아닌 듯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마법에 관해 지식이 깊은 일행은 없었지만, 아무리 마법이라도 같은 인간처럼 사고하는 분신을 만들어 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어렸을 적, 마법이 전능하다고 믿을 때나 상상해 본 일이었다.
또 다른 나를 만들어 내는 일.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테니까.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처리할 때.
몸이 하나로 모자랄 때.
나 외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
하지만 말했듯 그건 불가능하다.
그럼 녀석은 대체 어떻게 분신을 만들어 낸 걸까?
너무 부러운데?
알렌은 순수한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너는 대체 어떻게 분신을 만들어 내는 거지?”
알렌의 물음에 주르하는 입을 크게 벌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하!”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알렌을 보며 상당히 만족한 듯했다.
“당연히 분신을 만들어 내는 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 몸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신의 힘을 가졌느니라. 네놈들은 절대 얻을 수 없는 힘이지.”
“신의 힘?”
“그것까지는 자세히 알 필요 없다. 곧 죽을 놈이 그것을 알아 무엇 하랴.”
녀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구구구구.
푸르게 타오르던 화로와 그 위로 이어진 굴뚝이 부르르 떨었다.
의식의 진행이 끝을 향해 가고 있는 듯했다.
알렌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네더만 씨는 아직인가……?’
녀석은 이제 충분한 시간이 되었다고 판단했는지 결착을 보려는 기세였다.
아무래도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듯했다.
여기서 주르하와 전투를 벌인다면 자신은 단숨에 죽고 말 터. 하지만 망설이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야.”
알렌은 머리를 맹렬하게 굴리며 최대한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 젖어 있었다. 등골이 싸했고, 마른침이 목울대를 타고 힘겹게 넘어갔다.
조금의 움직임만으로도 허장성세는 바로 들통나고 말 것이다.
익스퍼트 초급에 갓 진입한 이가 어찌 소드 마스터 흉내를 내겠는가.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나…….
하지만 상대는 마법사.
그것이 가능했다면 진즉에 도망쳤을 거였다.
어쩌지…….
난관에 봉착한 그때, 그의 귓가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자식 뭐야? 왜 저따위로 생겼어?”
알렌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반가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그 자리에 있었다.
저 얼굴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왔군.”
그럼에도 알렌은 싸늘히 말했다.
네더만은 그런 알렌을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렇게 정 없는 목소리를 내다니.
“…….”
이 자식 왜 이래?
* * *
쿠구구궁.
일대를 쓸어버리는 검격에 반경에 있던 지반과 건물이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어지럽게 뒤집힌 폐허의 공간.
나는 그 중심에 홀로 우뚝 서 있었다.
풀썩.
이걸로 아리아트 기사단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네더만과 알렌이 먼저 갔음에도 제단의 상공을 보니 의식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어디로 갈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정했다.
의식을 저지하는 쪽에는 네더만이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라 믿었다.
알아서 잘 하겠지.
못 미덥기는 하지만, 그곳에 녀석의 앞을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있을 확률은 희박했다.
그리고 지금 가 봐야 큰 의미도 없을 터.
파밧.
나는 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제단의 상층부를 향해 걸음을 박찼다.
* * *
휘이이이잉!
“끄으으.”
가짜 왕세자가 신음을 삼키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마법진에서 피어난 기류가 일대의 공간을 사납게 휘감으며 바람의 장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번쩍!
일순 가짜 왕세자 왼팔에 새겨진 문양에서 시야를 가릴 정도의 맹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그 앞 허공에서,
구구구구구!
검붉은 선이 세로로 그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