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제111화 불멸의 군대 (2)
우리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건망증이 부족 내력이라더니…….
그게 진짜였군.
“아, 뭐였지?”
“그거잖아!”
“그게 뭔데.”
“……그러게, 질문이 뭐였더라?”
다시 표정을 굳힌 녀석이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질문해 주겠나.”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를 데려가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아! 맞아! 그래, 그것을 물었었지.”
“그래, 기억났다! 지금 녀석들이 진행하고 있는 의식, 그것을 막아야 한다! 우리는 그 방법을 너희들에게 알려 주려고 왔고!”
“맞아! 바로 그거였어! 녀석들은 지금 금지된 힘을 깨우려 하고 있다고! 우리는 그것을 막아야 해!”
“그래! 그거야! 그래서 너희들의 힘이 필요한 거라고!”
세 녀석은 솟아오른 기억을 낚아채듯 제각각 말을 쏟아 냈다.
이런 녀석들과 대화를 하려니 나까지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내가 말했다.
“멈추는 방법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지.”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까먹지 않았다고!”
나는 네더만을 보았다. 그에게 업혀 있던 알렌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렀다가 움직이자.”
네더만은 내 선택을 반기며 업고 있던 알렌을 내려놓았다.
“아주 좋은 생각일세. 이제 이 세 살배기 사내자식은 내려 줘도 되겠군. 곰 같은 허벅지로 저들도 못 따르지는 않을 거 아냐.”
알렌 또한 지지 않고 투덜거렸다.
“바라던 바입니다. 저도 업히기 싫다구요!”
“훌륭하군. 드디어 걸음마를 떼려는 겐가.”
나는 입씨름을 하는 둘을 두고 그들에게 말했다.
“앞장서라.”
“좋아. 마을로 안내할 테니 잘 따라오라고!”
대화를 마친 녀석들은 풀숲을 빠르게 내달렸다.
움직임이 꽤 날렵했다.
우리는 그 뒤를 여유롭게 따랐다.
다행히 마을로 돌아가는 길은 까먹지 않는 듯했다.
“잠깐! 이 길이 맞아?”
“맞을걸?”
“맞아.”
“아, 맞네. 기억났어.”
“가자!”
……이런 녀석들을 믿어도 되는 건지.
하는 짓을 보고 있자면 불안하기는 하지만, 의식에 관한 전반적인 상황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이리엘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녀석들이 치르는 의식도 막아야 했다.
일단 녀석들의 족장을 만나 보는 수밖에.
나는 찜찜한 마음으로 녀석들의 뒤를 따랐다.
* * *
휙. 데구루루.
새빨간 사과가 포물선을 그리며 풀숲에 떨어지자, 흐릿한 그림자가 질풍처럼 그것을 쫓아 한입에 물었다.
와그작.
그러고는 저편을 바라보며 꼬리를 흔드는 녀석.
바람에 일렁이는 잿빛 갈기와 송아지만 한 큰 몸뚱이를 가진, 그것의 정체는 커다란 늑대였다.
“돌아와, 네스.”
네스는 주인의 부름에 혀를 날리며 달려가 배를 까뒤집었다.
“잘했어.”
가짜 왕세자는 그런 녀석의 배를 긁어 주었다.
“라이칸 울프예요. 새끼 때 다친 것을 우연히 구해 줬는데 그때부터 절 이렇게 잘 따릅니다. 제 유일한 친구지요. 이 녀석이 없었다면 전 이곳에서의 생활을 버티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아. 네.”
이리엘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음에도 가짜 왕세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특히나 붉은 사과를 좋아합니다. 붉은 사과만 보면 사족을 못 쓰지요.”
“제가 붉은 머리였으면 더 좋아했겠네요.”
네스 옆에 쭈그려 앉아 있던 왕세자가 청발의 이리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랬다면 먹잇감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을걸요.”
“…….”
“농담입니다.”
둘은 덩치에 안 맞게 재롱을 부리는 네스를 가운데 두고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 갔다.
기사들에게 감시받으며 하는 강제적인 산책이었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푸는 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가짜 왕세자는 네스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일행들이랑 떨어져 많이 놀랐겠습니다.”
“저하가 더 놀라셨을 텐데요.”
이리엘의 말에 가짜 왕세자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생각보다 충격은 크지 않군요.”
이리엘은 의외라는 눈빛을 던졌다.
하루아침에 그간의 삶이 부정당했음에도 충격이 크지 않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짜 왕세자가 생각보다 덤덤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멍해 보였는데 생각보다 그 충격에서 빠르게 벗어난 듯했다.
그는 네스를 바라보며 말을 계속해서 이어 갔다.
“아마 외숙부의 말을 이해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곳에서 10년, 저는 프렌치아만을 바라보고 살아왔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만 고민했죠.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고, 그 힘으로 여태까지 버텨 왔습니다. 그들은 제 삶이고 꿈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 제가 가짜라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저는 이제 죽어도 왕세자로서 죽을 겁니다.”
네스를 쓰다듬던 손길이 문득 멈춘다.
“나는 누가 뭐래도 제네스 쿤 프렌치아란 말입니다.”
이리엘은 그 집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옆에 선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닌, 그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가짜 왕세자가 할렌트에게 크게 반항하지 못했던 건 어쩌면 누구보다 간절하게 왕세자이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엘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냥 그의 삶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남들이 가짜라고 한다고 삶이 가짜가 되나요. 남들이 진짜라고 한다고 해서 삶이 진짜가 되는 것도 아니고요. 저하가 지난 시간 동안 진심으로 살아왔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다면, 저하의 삶은 언제나 진짜일 거라고 생각해요.”
묵묵히 그 말을 곱씹던 가짜 왕세자는 네스의 목덜미를 쓸며 말했다.
“네스, 이 사람 보이지?”
“컹!”
“내 부인이 될 사람이야. 나와 똑같이 대해야 해. 알겠지? 이 사람이 네 새로운 주인이기도 한 거야.”
“컹! 컹!”
네스는 마치 말귀를 알아들은 것처럼 크게 짖고는 배를 발라당 까뒤집었다. 생긴 것과는 달리 굉장히 온순한 녀석이었다.
“한번 쓰다듬어 보세요.”
“저는 왕세자님과 결혼할 생각이 없는데요.”
“알겠으니 쓰다듬어 보세요. 네스가 안달이 났지 않습니까.”
이리엘은 쭈그려 앉아 네스의 배를 쓸었다.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네요.”
손에 닿는 감촉이 푹신했고, 보드라웠다.
“사과도 한번 줘 보세요.”
고개를 끄덕인 이리엘이 저 멀리 사과를 던졌다.
사과는 담장을 넘어 저 멀리 숲속으로 사라졌다. 왕세자가 던지던 거리에 비하여 배는 더 멀 듯했다.
이리엘이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세게 던졌나 봐요.”
그럼에도 네스는 그것을 재빠르게 쫓아 달려갔다.
그 다급한 뒷모습을 보며 둘은 잠시 웃었다.
가짜 왕세자가 말했다.
“왜 나와 결혼을 안 한다는 겁니까? 프렌치아의 왕비가 될 수 있는데.”
“왕비가 되면 뭐가 좋은데요?”
“……어, 뭐 여러모로 좋지 않겠습니까.”
“저하는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왕이 되려고 하시나요?”
“그건 아닙니다. 나는 국민을 위해, 이 나라의 번영을 위해 왕이 되고 싶은 거지요.”
가짜 왕세자의 눈빛은 단호했다.
적어도 진심으로 보였다.
“저도 그런 걸 위해 왕비가 될 생각은 없어요.”
“……제가 실언을 했네요. 미안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제가 예쁜 탓이죠, 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누구나 바보가 되니까요.”
벙찐 가짜 왕세자를 보며 이리엘은 말을 이었다.
“현재, 프렌치아 왕국은 존재하지 않아요. 제국에 강제로 합병되어 프렌치아 총독부 아래 가혹한 지배를 받고 있죠. 그런 나라의 왕비가 되어 뭐 해요. 나라도 국민도 없는 허수아비일텐데요.”
밝은 햇살이 그녀의 속눈썹 위에 내려앉는다.
“무엇보다 약혼의 맹약은 프렌치아가 패망하고 세리어스가가 멸문하는 순간 이미 끝났어요. 전 더 이상 이리엘 세리어스가 아니에요. 그냥 이리엘일 뿐이죠. 당신이 진짜든 가짜든 결혼할 생각이 없다구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아니고요?”
“네?”
생각지 못한 당혹스런 질문에 이리엘의 몸이 움찔했다.
가짜 왕세자는 그것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렇군요.”
“저 아직 좋아하는 사람 없거든요!”
“제네스입니까.”
“네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머리라도 다쳤어요? 제가 그 인간을요? 아뇨! 죽었다 깨어나도 아니거든요! 참 나! 사람을 어떻게 보고.”
얼굴까지 시뻘겋게 붉히며 발끈하는 그녀는, 지금까지 차분하던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마치 입을 다물고 있던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는 것 같았다. 가짜 왕세자는 그런 그녀를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만 보게 됩디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쉽게 알 수 있지요. 그 자식, 부럽네요.”
“거, 아니라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가짜 왕세자는 저편에서 돌아오는 네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구하러 올 거라 믿습니까?”
“네, 그럼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이리엘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럴까요?”
“그런데 만약 할렌트가 죽으면 그때는 어떡할 거예요?”
“외숙부가 죽는다니. 설마 그 자식에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가 믿고 있는 세계에서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요. 그럼 당신을 왕세자로 만들어 줄 사람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럼 그때는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럴 일이 있을까요.”
“한번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 봐요.”
돌아온 네스를 맞이한 가짜 왕세자는 녀석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잠시 고심하다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냥 대륙의 이곳저곳을 네스와 함께 여행하고 싶군요. 이 섬을 벗어나 너른 세상을 자유로이 다니는 겁니다.”
그의 시선이 널따랗게 펼쳐진 하늘을 향했다.
“지난번 잠깐 제국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오랜 시간 동안 섬을 벗어났던 긴 여정이었죠.”
그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환히 웃었다.
“비록 마차의 작은 창으로 세상을 보았지만, 이곳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더군요.”
이리엘은 추억을 회상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작 작은 창을 통해 본 세상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
그는 그동안 이곳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런 삶을 이리엘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이곳에는 일상을 탈출할 개구멍도 없으니까.
“이 섬에서는 광산을 순찰하는 거 말곤 낙이 없거든요. 그것도 몇 달에 한 번 나설 수 있지만. 그래서인가, 어제는 간만에 좀 즐거웠습니다.”
그래도 있었구나, 개구멍.
“비록 인질이기는 했지만. 내게 친절한 자들과 대화는 거의 처음이었거든요. 제네스 그 자식은 빼고.”
그는 눈짓으로 뒤편의 기사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다들 무뚝뚝해서.”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도 있었지만, 모두 그와의 대화를 기피했다. 사담을 나눈 것이 할렌트의 귀에 들어가는 날이면 혼쭐이 나는 까닭. 고작 1년에 한 번씩 이곳을 찾는 그였지만, 그의 명은 절대적이었다.
그랬기에 자신은 홀로 이 외딴 섬에서 10년을 보냈다.
네스와 함께.
“……의식은 다 끝나가요?”
이리엘의 말에 가짜 왕세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완전히 막바지입니다. 광산에는 마지막 의식 전에 그 잠깐의 틈을 타서 갔던 거고. 아마 내일이면 끝난다는 거 같던데. 그렇게 되면 안타깝지만, 제네스와 그 일행들은 모두 죽게 되겠지요.”
“그럴 일은 없을걸요. 그 인간이 무지막지하게 강하거든요. 이번에 보여 줬던 건 빙산의 일각이라구요.”
“……신뢰가 상당하군요.”
“네. 쉽게 표현해서 성격이 더러운 만큼 강해요.”
가짜 왕세자는 단숨에 그의 강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거, 무진장 강하겠군.”
“그렇죠.”
씩 웃은 이리엘은 무채색 숲이 일렁이는 저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네스와 일행들이 그곳에 있을 터였다.
* * *
움막이 옹기종기 모인 움파움파족의 마을.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족장의 거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움파움파족은 길을 걸으며 묻지도 않은 설명을 곁들였다.
“우리 부족은 본래 섬의 중심인 불멸의 도시에서 살고 있었지만 할렌트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지.”
“맞아. 그랬었지! 개자식! 우리는 다른 건 몰라도 원수는 절대 잊지 않는다고!”
옆에 있는 녀석이 그제야 기억났는지 발끈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녀석도.
“그럼! 그 자식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는데!”
대체 뭐 하는 놈들인지.
저들의 대화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다 사납다.
“뭐야? 누구야?”
족장에게 가는 길.
제 할 일을 하고 있던 부족원들이 하나둘 주변을 기웃거리며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이잖아.”
“아, 이번에 섬에 왔다는.”
“그래.”
“왜 데려왔는데.”
“……왜 데려왔더라?”
“할렌트를 막으러 왔지!”
“아, 맞다.”
서로 이야기하며 기억의 조각을 맞추는 이들.
누가 봐도 움파움파족이었다.
네더만은 그런 이들을 보며 쿡쿡거렸다.
“며칠만 같이 살면 없던 건망증도 생기겠는데?”
네더만의 말에, 우리를 안내하던 녀석이 별안간 뒤를 돌아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당신은 건망증을 결코 가질 수 없어. 이것은 부족에게 내려진 신의 축복이라고! 그 덕분에 우리는 서로 힘을 합심하여 더불어 살아갈 수 있지.”
상당히 자부심을 가진 표정이었다.
이들에게 건망증은 불편한 문제가 아닌 신의 축복인 것이다. 네더만은 그 반응에 흥미롭다는 듯 옅게 웃었다.
“그렇다면 족장은 부족원 중에 건망증이 가장 심한 사람이 하려나?”
“물론.”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자신 있게 답하는 녀석.
아무래도 건망증의 정도가 이들에게는 명예로까지 작용하나 본데, 앞으로 있을 족장과의 대화가 수월하지는 않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여기야. 족장님의 집!”
“거기는 너네 집이고! 저기가 족장님의 집이야!”
“아, 맞다.”
다른 것들보다 좀 더 커다란 움막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족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움막의 기묘한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연륜이 담긴, 깊이 파인 주름 때문일까.
우리를 바라보는 그윽한 눈빛에서 세월을 담아 빚어진 지혜가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히 현자의 풍모.
그가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말문을 떼었다.
“이분들은 누구지?”
“족장님이 모셔 오라고 하셨던 분들입니다.”
“내가 그랬었나. 근데 왜?”
“금지된 힘을 깨우려는 의식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래! 맞아! 그랬었어. 어서들 오시게!”
족장은 우리를 환히 맞아 주었다.
역시나 예상대로의 만남이었다.
“우리 부족은 세상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아 버린 까닭에 건망증이라는 신의 축복을 받았다네. 내륙에서 왔다면 이상하게 보일 테지. 부디 넉넉한 마음으로 이해해 주게.”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으로 자리에 앉으라 권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이곳에는 무슨 일인가?”
“족장님이 모셔 오라고 하셨던 분들입니다.”
“내가?”
마치 처음 말하는 것처럼 친절히 설명하는 부족원.
이 정도면 금붕어가 아닌가 싶은데.
새대가리일 수도 있고.
“아, 맞아! 그랬었지! 그럼 까먹기 전에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를 해 보세.”
잠깐의 적막이 이어졌다.
그가 푸근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런데 본론이 뭐였더라?”
빌어먹을.
.
.
.
우리가 움막을 나온 건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룬 우리는 불멸의 도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너른 숲길을 달리며 네더만은 길게 숨을 뱉었다.
“하,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정말이지, 답답해 죽을 뻔했어.”
그에 등 뒤에 업혀 있는 알렌도 그에 동조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저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뜨거운 게 울컥울컥 올라오더라니까요.”
나도 동감하는 바였다.
그들의 의도치 않은 정신 공격에 피로감이 몰려올 정도.
“정말이지 죽일 뻔했다.”
끝없이 돌고 도는 이야기에 부처님도 주먹을 들지 않았을까 예상한다. 성격 급한 이는 그 자리에서 뒷목을 부여잡고 졸도할 판.
나도 답답함을 참기가 심히 어려웠다.
글을 적어 대화라도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용하는 문자도 다르고, 그건 또 안 된다고 하니.
“그래도 이걸 얻었으니 다행이죠.”
알렌은 제 목에 걸려 있는 작은 유리병을 들어 보였다.
그 안에는 녹색의 작은 씨앗들이 담겨 있었다.
마나를 먹고 자라나는 ‘불멸초’라는 식물인데, 이것만 있으면 의식에 투입되는 마나를 흡수하여 의식을 멈출 수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 받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품에 넣어 둔 작은 부적.
할렌트의 공간 이동 마법을 방어할 수 있는 주술이 담긴 부적이란다.
공간 이동 마법은 굉장히 섬세한 마법이라, 이것만으로도 무력화가 가능할 거 같기는 하다.
네더만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나저나,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불멸의 부대가 실존할 줄이야.”
그의 말마따나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사뭇 흥미로웠다.
다른 차원의 힘이라니.
그것이 내륙까지 가게 된다면 많은 혼란을 야기할 터.
반드시 막아 내야 했다.
“속도를 높인다.”
움파움파족의 건망증 때문에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됐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에나 도착할 수 있을 듯한데.
예상대로 우리는 다음 날, 동이 터오를 때쯤에야 불멸의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구릉에 서 있었다.
이제, 격돌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