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제110화 불멸의 군대 (1)
창졸간에 변한 시야.
앞으로는 빽빽한 무채색의 숲이, 뒤로는 잿빛의 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런.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네더만의 낭패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을 둘러보니 가짜 왕세자뿐만 아니라 이리엘도 없었다.
“제네스 님!”
그것을 알아챈 알렌이 사색에 질린채 소리쳤다.
“눈 안 멀었다.”
“그치만!”
“귀도 안 먹었고.”
“그거참 다행이군.”
네더만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하자 알렌은 황당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에 그런 말장난이 나오냐는 의미로 보였다.
물론 나는 장난이 아니었지만.
내가 말했다.
“이리엘을 해코지하지는 않을 거다.”
“그걸 어떻게 아시는데요.”
알렌 녀석이 못 미덥다는 식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저 자식이.
나는 주먹을 들까 하다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나름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왕세자란 놈이 제 약혼녀 하나 못 지킬까.”
“……못 지킬 거 같은데요.”
알렌은 더욱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긴, 그녀석이 믿음직스럽지는 않지.
하지만 그럼에도 괜찮다.
할렌트와 이리엘은 모르는 사이가 아니니.
내 약혼식 때도 봤겠고, 내가 기억하기로 그녀의 아버지 트레터 세리어스와 할렌트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리고 가짜 왕세자도 내세웠겠다, 과거 약혼녀까지 있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게다가 우리를 막기 위한 인질로 삼을 수도 있고.
그런 이유로 이리엘의 안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당황스럽기야 하겠지만, 똑 부러지는 아이니 잘 헤쳐 나가겠지.
그러니까.
우리만 잘하면 된다.
“그나저나 이 자식 무슨 수를 쓴 거지?”
네더만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열심히 돌아가도 다시 이리로 날아오면 어째. 나름의 대책을 생각해야 할 거 같은데.”
“보안 마법의 일종이겠죠?”
“그렇겠지.”
네더만과 알렌이 의견을 맞추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녀석은 우리 셋을 손가락을 튕기는 간단한 동작으로 해변까지 이동시켰다.
개인의 능력으로는 그가 대마법사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
아무래도 도시에 보안 마법을 설치해 놨겠지.
광산에서 캐낸 마석을 생각하면 마력은 충분히 수급될 터.
나는 짧게 고민 후 입을 열었다.
“일단 방도는 돌아가면서 생각해 보자. 알렌은 네가 업어라.”
“내가?”
네더만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제 가슴팍을 손으로 짚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가끔 알렌을 세 살배기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어. 자, 이 튼실한 허벅지를 보라고. 곰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 아닌가. 그런데 이 굵직한 다리를 가진 녀석을 업고 뛰라니.”
“저 녀석 속도에 맞추면 속도가 나지 않아.”
일단 최대한 빨리 불멸의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알렌의 속도로는 따라오지 못한다.
저 녀석도 다 알면서 괜한 투정을 부리는 것이고.
“난 남자를 업을 생각이 전혀 없다네. 특히나 저렇게 거뭇한 녀석은 말이지. 그냥 여기 버리고 가는 건 어떤가?”
“버리다뇨! 절 혼자 두고 갈 생각이에요?”
알렌이 서운하다는 듯 항변했다.
“그러지 말고 업어 주세요!”
“미치겠군.”
네더만은 엉겨 붙는 알렌을 밀치며 기함을 토했다.
“난 너 같은 애를 둔 기억이 없단 말이다.”
“그럼 이참에 한번 가져 보면 되겠네요! 저도 이리엘을 구하러 가야 된단 말입니다.”
“제 발로 걷지도 못하는 놈이 가서 뭐 하게.”
나는 실랑이하는 녀석에게 말했다.
“좋은 말 할 때 빨리 업어라. 이럴 시간이 없다.”
“그럼 네가 업어, 인마! 새파랗게 젊은 놈이. 나는 아침마다 무릎이 쑤시는 중년이라고! 게다가 결혼도 안 한 총각이지. 허리라도 삐끗하면 자네가 책임질 텐가!”
네더만은 강하게 반발했다.
꽤나 업기 싫은 모양인데.
하여간 이 녀석도 좋게 말하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니 결국 협박의 칼을 꺼낼 수밖에.
“너도 여기 버려지고 싶나 보지?”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 어서 다녀오게. 어차피 자네 혼자서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기는 하지. 그럼 한숨 자고 있어라.”
그 한숨이 일생이 되겠지만.
스릉.
“자, 잠깐만. 업으면 될 거 아닌가. 이 빌어먹을 자식아!”
“그러게 왜 튕겨요. 제네스 님 성격 잘 아시면서.”
“아휴, 잔말 말고 업히게나. 내가 이 나이 먹고 곰 같은 사내새끼를 업게 될 줄이야. 이참에 가운데 다리를 제거하는 건 어때? 그럼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할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 결혼할 사람 생겼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왜 이렇게 정이 없어요!”
“쓸데없는 말 말고, 집중해라. 빠르게 나아갈 거다.”
그렇게 잠깐의 실랑이를 끝내고 숲을 향해 나아가려는 찰나.
스스슥.
무채색의 숲에서 낯선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소파에 왕세자와 나란히 앉은 이리엘은, 할렌트에게 차를 대접받고 있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홀로 남았을 때는 실로 당황스러웠지만, 할렌트는 생각보다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
따로 구금하지도 않았고, 제네스와 일행들은 해안가에 안전하게 도착했을 거라며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도 했다.
제네스가 소드 마스터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상당히 여유로운 태도.
이리엘은 그래서 더 불안했다.
그 여유가 방심의 발로라기보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 같았기에.
하지만 별다른 방도는 없었다.
어차피 제네스는 이곳에 돌아올 테니, 자신은 그때까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하는 수밖에.
할렌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
“날 잊을 정도로 어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다고 알은체할 사이도 아니죠.”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루시안과 저택을 빠져나가던 때, 성으로 들어오던 바레인가(家)의 깃발을.
까만 배경 안에서 정면을 응시하던 늑대의 형상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었다.
당시, 그 가문의 주인이 바로 이자였고.
“내가 너희 가문을 멸문시켰다고 생각하는 게냐.”
“아뇨.”
프렌치아가 패망하던 날, 가문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
할렌트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아버지에게 변절을 권함으로써 루시안과 자신이 빠져나갈 시간을 만들어 줬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알고 있으니 다행이구나.”
“왜 죽은 왕세자를 능멸하는 거죠? 그리고 저 사람은 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겨야 하는 건데요?”
“내가 저 녀석의 인생을 빼앗았다고?”
할렌트가 씩 웃으며 가짜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리엘의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잔뜩 주눅 든 모습이었다.
“어떠냐. 당돌한 아이지?”
할렌트가 그를 싸늘히 보며 말을 이었다.
“그것이 태생이란 것이다. 내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너와는 다르지. 내가 너의 삶을 빼앗은 것 같으냐.”
“…….”
왕세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의 진정한 태생을 가르쳐 주랴.”
할렌트는 무심히 그의 과거를 이야기해 갔다.
“너는 어린 노예였느니라. 어디를 가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가축처럼 살다가 이름 모를 곳에서 죽었을 테지. 하지만 노예로 태어났던 너는 지금 왕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평생 꿈꿔도 품지 못할 이 아이를 가질 수도 있지.”
할렌트의 눈빛이 이리엘을 향했다.
“어떠냐. 너의 약혼녀였던 아이다. 그리고 곧 너와 결혼하게 될 아이고.”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리엘이 벌겋게 달아올라 소리치자, 할렌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왜? 너는 왕세자와 약혼한 사이가 아니더냐.”
“이 사람은 진짜 왕세자가 아니잖아요!”
가짜 왕세자는 그런 이리엘을 바라보았다. 그 슬픈 눈을 마주한 이리엘은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할렌트는 그런 이리엘을 보며 씩 웃었다.
“가짜라고? 이 녀석이 가짜라고 누가 그러든.”
“네?”
“나는 이 녀석을 왕세자라 세상에 공표할 것이다. 그리고 이 녀석 또한 본인을 왕세자라 할 것이고. 감히 누가 이 녀석을 가짜라 하겠느냐. 네가 백날 소리쳐 봐야 누가 너의 말을 믿겠느냐.”
이것은 할렌트가 제네스와 일행들 앞에서 진실을 밝힌 이유이기도 했다.
할렌트에게 왕세자의 진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언제고 가짜를 진짜로 만들 수 있으니까.
이리엘이 아랫입술을 물며 입을 다물자, 할렌트는 왕세자를 보았다.
“고개를 들어라.”
“…….”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왕세자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부정당한 삶에 비통한 표정이었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듯 보였다.
할렌트는 그런 그를 싸늘히 힐난했다.
“바레인가의 피가 섞인 얼굴이다. 그 얼굴로 그따위 한심한 표정을 짓지 마라.”
“……예.”
왕세자가 표정을 억지로 정돈하자, 할렌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가짜가 될지 진짜가 될지는 모두 네 선택에 달렸다.”
“…….”
“만약 네가 너의 삶을 되찾기를 원한다면 그 얼굴을 뜯어 노예로 팔아 주마. 네 천한 이름도 돌려주고 네 본래의 삶도 되찾게 해 주마. 하지만.”
왕세자를 직시하던 눈가에 서늘한 바람이 인다.
“네가 진짜가 되겠다고 한다면, 너는 왕세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네 얼굴과 네 이름을 되찾고 싶거든 언제든 말하라.”
그는 찻잔을 들며 여유롭게 말했다.
“말했듯, 선택은 모두 너의 몫이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이리엘은 답답했는지 가짜 왕세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요. 좀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제네스 님 앞에서는 말도 잘하더니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됐어요.”
“그, 그것이…….”
가짜 왕세자는 하얗게 질린 채 말을 더듬었다.
그는 자신이 가짜란 이유로 주눅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애초에 할렌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저 싸늘하고 차디찬 눈을 마주할 때면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외숙부라 여긴 그의 명을 거역한 적도, 거역할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잠자코 있던 할렌트의 눈가에 흥미가 일었다.
“그 녀석의 이름이 제네스인가? 공교로운 일이군.”
“제가 답답해서 그런데 뭐 좀 물어봐도 돼요?”
“얼마든지.”
“굳이 왜 이런 일을 벌인 건데요? 총독까지 하는 사람이 왜 가짜 왕세자를 만들고, 불멸의 군대를 얻겠다고 이 사람에게 거짓된 삶을 살게 하고, 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그래서 뭘 얻고자 하는 건데요.”
할렌트의 눈빛이 왕세자를 향했다.
그가 어깨를 떨었다.
“한심한 놈. 왕세자란 놈이 주둥이를 그렇게 가볍게 나불거려서야.”
“그, 그건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줄 알고-.”
“그만.”
이리엘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할렌트는 이리엘도 의외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이리엘은 그 기세를 몰아 질문을 계속했다.
“고작 독립군을 몰아내자고 지난 10년간 고생한 건 아닐 거잖아요. 제국과 함께하는 걸 보면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네 말이 맞다.”
할렌트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작 독립군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과한 일이지.”
“그럼 왜 그런 건데요?”
“그것은 네가 알 필요 없다.”
“조금 전에는 얼마든지 물으라면서요!”
“답해 준다고 하지는 않았지.”
할렌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나가 보거라. 정원을 돌며 둘이 가까워지는 시간을 갖는 게 좋겠지. 곧 결혼할 사이 아니냐.”
“저는 결혼할 생각 없거든요!”
“그리고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제가 답할 거 같아요?”
“네가 살아 있다면 루시안, 그 녀석도 살아 있겠구나.”
“아뇨. 오빠는 죽었어요.”
“거짓이 서툴구나. 나가 보거라.”
“거짓말 아니거든요!”
할렌트의 부름에 문밖에 있던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나란히 앉은 둘을 보며 말했다.
“세자 내외를 모셔라.”
* * *
우리는 무채색 숲에서 등장한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원은 총 셋.
나무창을 쥔 채 동물의 가죽으로 지어 입은 복색이 하나같이 특이했다.
오랜 세월 문명에 벗어나 살아온 사람들 같달까.
이런 자들이 섬에 있을 줄이야.
“너희들을 데리러 왔다.”
그들이 말했다.
그래도 다행히 공용어는 할 줄 아나 보다.
“정체부터 밝히는 게 순서 아닌가.”
내 말에 중앙에 있던 자가 쥐고 있던 창으로 바닥을 찍으며 비장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모텔섬의 주인이자, 이 섬의 지킴이인 움파움파족이다.”
움파움파족?
나와 네더만은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촌장의 부족이 분명했다.
그의 선조는 섬 밖으로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을 잊어 그곳에 정착하게 됐다고 했다.
그들이 떠나온 곳이 불멸의 도시이자 이모텔섬이었으니 이곳에 움파움파족이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왜 우리를?
내가 말했다.
“우리는 갈 길이 급하다. 이유부터 말해라.”
“너희들을 데리러 온 이유 말이냐?”
“그래.”
다시 한번 창을 비장하게 내려찍은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뒤편에 선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그게 뭐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