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제107화 가짜 왕세자 (5)
광산을 벗어난 우리는 팔자 좋게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왕세자가 말을 탈 줄도 모르니, 우리가 달리는 속도를 따를 수 없는 까닭.
녀석을 업고 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게 급히 달릴 필요는 없었다.
“내 마차인데, 왜 내가 마부석에 앉아야 하는 건데.”
마부석에 앉은 가짜 왕세자가 툴툴거리며 불평했다.
마차의 내부에는 나와 이리엘, 네더만이 앉아 있었고, 그는 알렌과 함께 마부석에서 말을 몰았다.
내가 말했다.
“너 심심할까 봐.”
사실은 편히 가는 녀석이 꼴 보기 싫어 말을 몰라고 내보냈다. 알렌은 그런 녀석에게 말 모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고.
녀석이 내부와 이어진 작은 창으로 눈을 부라렸다.
“심심하기는! 이 몸은 훗날 프렌치아를 이끌 몸이다. 말을 모는 법 따위는 몰라도 된다고!”
“그래.”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녀석은 저리 사납게 구는 것치고 꽤나 열성적으로 말 모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말은 하기 싫다고 해도 재밌나 보다.
역시 저 자식, 심심해서 광산에 온 게 맞았다.
“이럇!”
열심히 호령하며 말을 모는 가짜 왕세자.
“어떠냐? 이 정도면 괜찮지?”
칭찬해 달라며 꼬리를 흔드는 녀석에게 알렌은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다.
“역시 금방 배우시네요. 대단하십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그 말에 코를 슥 훔치며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녀석을 보니 절로 가슴이 답답해 온다.
저렇게 모자란 녀석이 내 행세를 하고 있다니.
이리엘 또한 그를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전이랑 달라지기는 한 거 같아요.”
“당연하지. 저 녀석은 가짜니까.”
“나 가짜 아니라니깐!”
나를 보며 눈을 희번덕 뜨는 가짜 왕세자.
하여간 가짜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귀신같이 알아먹는다. 눈을 한번 흘기고는 다시 말 모는 데 집중하는 가짜 왕세자를 보며, 네더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왕세자라 하기에는 살짝 모자란 건 사실인데, 이제 나는 저 녀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는걸.”
네더만은 갈수록 녀석에 대한 의심이 흐려지는 듯했다. 그만큼 녀석의 말과 행동은 거짓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가 스스로를 진정 왕세자라 믿고 있기에 가능한 일.
그런 녀석의 진심은 긴가민가하는 일행의 마음을 기울게 만드는 요소였다.
나는 다시금 확실하게 말했다.
“아니, 저 녀석은 가짜다. 죽는다.”
뒤를 돌아보려는 왕세자에게 말을 덧붙였다. 그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가만히 화를 삭였다. 침울해하는 녀석을 알렌이 옆에서 달래 주었다.
“곧 익숙해지실 거예요.”
네더만이 말했다.
“자네는 확신하나 보군.”
“물론.”
“약혼녀였던 나도 구별이 안 가는데, 자기가 어떻게 확신한다는 건지.”
이리엘이 옆에서 입을 내밀고 쫑알거렸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불멸의 도시에서 할렌트를 만나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이쯤에서 쉬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무채색의 세상이 까맣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애초에 늦은 시간에 출발했기에, 하룻밤은 노숙하며 보내야 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일행들.
이제 내가 딱히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제 할 일을 척척 해낸다.
나는 그들이 노숙할 자리를 만들고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한편에 가만히 앉아 할렌트가 본인의 입으로 가짜 왕세자의 정체를 밝히게끔 유도할 방법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가짜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넌 여기서 뭐 해?”
“나 뭐.”
“가서 도와.”
내가 턱짓을 하자 녀석은 입술을 빼쭉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요리 중인 이리엘에게 쫄래쫄래 다가가 말을 걸었다.
“큼큼, 요리를 잘하시나 봅니다.”
이리엘은 옆에서 기웃거리는 녀석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잘하지는 않고 하다 보니 늘었어요.”
“그렇군요. 저…… 괜찮으시다면 옛날이야기 좀 해 주시겠습니까? 저도 과거에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서요.”
“아. 그럼요.”
이리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환히 웃었다.
나는 녀석의 말이 꼴사나웠지만, 이리엘이 무어라 이야기할지 궁금하여 잠자코 있었다.
“저하는 참 착하고 어진 사람이었어요. 제가 짓궂게 장난쳐도 매번 받아 주셨거든요.”
그게 짓궂은 장난이었다고?
눈앞으로 그녀가 벌였던 난장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것은 짓궂은 장난으로 매도될 것들이 아니었다.
“제가 그때는 성격이 더러웠거든요.”
“지금보다도?”
네더만이 슬쩍 끼어들자, 이리엘은 기품 있는 얼굴로 국자를 들었다. 그에 네더만은 계속하라는 듯 손을 들었다.
“그리고 나라를 매일같이 생각하셨지요.”
“그건 지금과 같군.”
“특히 저희 오빠랑 친하게 지내셨는데, 만날 때마다 나눌 말이 어찌나 많은지. 저한테는 눈길 한번 안 주셨어요. 매번 나라에 관한 이야기만 하셔서 제가 끼어들 틈도 없었죠. 그래서 어린 마음에 투정을 좀 부렸었던 거 같아요. 그렇게라도 안 하면 절 쳐다보지도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난장을 피웠던 거군.
관심 끌려고.
그랬다면 그녀의 전략은 확실히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때는 지금보다 덜 예뻤나 보군요.”
“아뇨. 지금처럼 예뻤는데요.”
두 녀석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추임새가 절로 나왔다.
“염병.”
내 말에 이리엘은 도끼눈을 흘겼다.
네더만은 그런 내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상당히 공감하는 눈치였다.
“속이 다 시원했네. 아무래도 우리 저하께서 지난 10년간 혀에 버터 칠만 하고 계셨나 보군. 여자 꼬시는 기술이 장난 아닌걸?”
“무엄하구나! 꼬시기는 누가 누굴 꼬신다는 것이야!”
왕세자의 호령에 네더만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그런 네더만에게 엄지를 들어 주었다.
녀석과 모처럼 마음이 맞는 순간이었다.
둘은 우리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분위기를 잡아 갔다.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저런 사람들이에요.”
“큼큼. 이 몸이 넓은 아량으로 참아야겠지. 그래도 어릴 때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나 봅니다. 날 생각하며 웃는 걸 보니.”
“아, 제가 그랬어요?”
나는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는 녀석들의 대화를 단칼에 잘랐다.
“됐고. 이제 네 이야기나 해 봐라.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며.”
별로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녀석이 현 상황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알 필요가 있었다.
얼핏 들어만 보아도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으니.
나는 그 어긋난 지점을 통해 할렌트가 가짜 왕세자를 만든 목적을 유추해 볼 요량이었다.
녀석은 생각보다 흔쾌히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해 본 적은 없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면 나에 대한 오해도 풀릴 테지. 그때라도 사죄한다면-.”
나는 가만히 주먹을 들었다.
녀석은 못 본 척 딴청을 피우고는 눈치껏 본론을 이었다.
“지난 10년, 설명할 것도 없는 무료한 삶이었지. 저택 안에 틀어박혀 홀로 살았으니. 말할 사람이라고는 군인들과 하인들뿐이었지만, 그들 또한 나와 대화를 나눠 주지 않았어. 이 몸이 지엄한 몸이니 어려워 그랬겠지.”
“왜 10년간 여기 있었던 거지? 나가 보겠다고 하지는 않았나?”
“의식을 치러야 하기에 어쩔 수 없었어. 광산에 들르는 이 시간도 두어 달에 한 번 오는 유일한 자유 시간이라고.”
“의식? 무슨 의식을 말하는 거지?”
“이곳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나는 지난 10년간 프렌치아를 위한 군대를 모으고 있던 거라고.”
의기양양해진 왕세자가 콧대를 세웠다.
나는 다시 한번 주먹을 들었다.
녀석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바로 죽지 않는 ‘불멸의 군대’가 잠들어 있거든.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해 의식을 치르는 중이고.”
“…….”
나는 별말 없이 녀석을 바라보았다.
죽지 않는 불멸의 군대라.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거짓으로 치부하기에는 Dr. 주르하가 괜히 마음에 걸렸다.
왠지 녀석과도 연관된 거 같으니.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는 의문을 하나하나 꺼내 보기로 했다.
“불멸의 군대가 뭔데.”
“나도 의식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밖에 몰라. 그저 외숙부가 그것을 가져야 프렌치아를 지킬 수 있다고 하니 하는 거지.”
“그것으로 프렌치아를 지키겠다고?”
“그래. 나는 프렌치아를 위해 긴 시간 의식을 치러 온 거라고. 이제 그간의 내 노고를 좀 알겠나.”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제국에 강제로 합병되어 총독부 지배 아래 있는 프렌치아이거늘.
총독이자 변절자인 할렌트가 대체 무엇으로부터 프렌치아를 지키고자 한단 말인가.
나는 그 부분에 관해 물었다.
“프렌치아를 누구로부터 지키겠다는 건데.”
“외세로부터. 힘이 있어야 자국을 스스로 지킬 것이 아닌가. 지금이야 힘이 없어 제국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불멸의 군대만 얻는다면 제국도 프렌치아에서 물러날 거라고.”
보호? 제국이 물러날 거라고?
듣다 보니 황당한 이야기였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느니라. 부모가 다 큰 자식을 독립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면 되니. 너희들은 그런 제국의 의도를 오해하고 있었겠지만. 이 몸은 너희들의 심경을 다 이해하느니라.”
이해는 개뿔.
녀석이 현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대충 감이 올 듯했다. 잠자코 있던 네더만이 왕세자의 말을 비꼬았다.
“진짜 부모를 끌어내리고 부모 노릇을 해 주는 제국이라니. 정말이지 훌륭한 양부모로군.”
프렌치아의 왕가를 끌어내리고 총독부를 세운 제국에 관한 지적이었다.
왕세자는 순순히 그 부분에 인정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이자 선대 왕은 희대의 폭군이셨다. 제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왕을 살리고자 국민들을 죽일 수는 없지 않겠나.”
“…….”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녀석이 현 상황을 완전히 제멋대로 알고 있음을 확신한 탓이다.
그러니 저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겠지.
“일단 그렇다고 치자. 할렌트는 그 힘을 왜 너에게 주려는 거지?”
“그야 당연히 내가 왕세자니까.”
“다르게 묻지. 너는 이곳에서 10년간 의식을 치렀다고 했지? 그럼 그 불멸의 군대는 네 것이 되는 거냐?”
“물론이지. 내가 그 때문에 이 답답한 섬에 있는 거라고!”
그는 강변하는 동시에 소매를 걷어 팔뚝을 보여 주었다. 녀석의 팔에는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검붉은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의식을 치르며 자연히 새겨진 문양들이다.”
흠.
나는 그 문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저 단순한 그림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난해한 기의 흐름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고위 마법인 듯한데, 해석은 불가했다.
불멸의 군대라는 존재가 단순한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할렌트는 그 힘을, 이 녀석을 통해 얻고자 했겠지.
이 녀석을 왕세자로 만든 건 아마 정치적인 목적까지 염두에 둔 것이겠고.
“제국에 다녀왔다고 했지?”
“그래.”
“그럼 이 상황을 제국에서도 안다는 이야기겠군.”
“그렇지. 제국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니.”
“제국은 왜 너를 돕는 거지?”
이 일은 할렌트 혼자 벌인 일이 아니었다.
제국군이 도처에 깔린 데다 녀석이 제국까지 다녀왔다고 하는 걸 보면, 제국의 주도하에 벌어지고 있는 일일 터였다.
그럼 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불멸의 부대라는 강력한 힘이 있다면 자기들이 가질 것이지, 왜 할렌트를 통해 가짜 왕세자가 그 힘을 갖게끔 하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짜 왕세자가 말했다.
“자식을 돌보는데 큰 이유가 있나.”
일단 녀석에게서는 그것에 관한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을 듯하고.
“Dr. 주르하, 그 녀석이 불멸의 군대의 일원인가?”
일단 죽지 않는 불멸의 군대라고 하면, 내 머릿속에서는 그 녀석과 똑같이 생긴 놈들로 구성된 부대가 떠올랐다.
“응? 나도 잘 모르지만 그건 아니야. 내가 알기로 주르하 님은 외숙부와 마찬가지로 황제 폐하의 직속 친위대에 속해 계신다고.”
“직속 친위대?”
“대충 엿들은 바로는 황제의 수족과 같은 분으로 알고 있는데.”
“할렌트도 같은 소속이고?”
“내가 알기로는 그래.”
그 해골바가지 녀석이 황제의 직속 친위대라니.
게다가 할렌트 또한 직속 친위대 소속이라고?
그래서 이 일을 맡긴 듯한데.
할렌트가 황제에게 받는 신임이 생각보다 두터운 듯했다.
알렌도 어이가 없다는 듯 이리엘과 눈을 맞췄다.
“그 사람이 그렇게 위세 높은 자였다니.”
“그러니까요.”
나는 잠시 입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또 다른 의문만 쌓여 가는 기분이다.
아무래도 이 녀석에게선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없을 듯하다.
일단 가짜 왕세자에게 들은 상황을, 녀석이 잘못 알고 있는 거짓을 들어내고 종합해 보자면.
가짜 왕세자는 이곳에서 10년이란 긴 시간 동안 불멸의 군대라는 미지의 힘을 얻기 위해 의식을 치르고 있었고.
그것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황제의 직속 친위대 소속의 Dr. 주르하까지 움직였다는 건, 황제 또한 이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었다.
아직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할렌트도 이 힘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인 듯 보였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해서 얻으려는 힘이 만만치 않을 거란 건, 손쉽게 알 수 있는 사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가짜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불멸의 군대의 전력은 어느 정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