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제106화 가짜 왕세자 (4)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가짜 왕세자를 싸늘히 보았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답해야 할 거다.”
“무엄하구나! 내 분명 왕세자라 신분을 밝혔거늘. 네가 그러고도 프렌치아의 국민이란 말이냐!”
녀석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었는지 얼굴까지 붉히며 성을 내었다.
“네가 가짜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이 몸이 가짜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이는 것이-.”
빠각!
“끄아악!”
녀석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쪼그려 앉아 제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생각하고 말해라.”
“가, 감히 이 몸에 손을 대다니! 반역도가 따로 없구나!”
녀석은 고통을 참느라 눈에 핏발까지 세우고도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나는 다시 한번 가차 없이 꿀밤을 갈겼다.
빠각!
“꾸에에엑!”
때렸던 데를 또 때리자 녀석은 바닥을 나뒹굴며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전생의 내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날 때리는 기분이랄까.
그렇다고 손속에 사정을 둘 생각은 없지만.
“네놈이 가짜인 걸 알고 있다고 했다.”
“…….”
머리통을 부여잡은 녀석은 이번에는 눈만 부라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빛을 보니 맞고 싶지 않아 그런 것이지, 가짜라는 걸 인정한 태도는 아니었다.
“네가 수술을 통해 얼굴을 바꾼 걸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연기할 필요 없다.”
“대체 누가 연기를 한다는 것이야! 네가 무언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이 몸은 프렌치아 왕가의 유일한 적통, 제네스 쿤 프렌치아이니라. 지금까지의 무례는 친히 용서해 줄 테니, 고개를 숙여 깊이 사죄토록 하라.”
나는 벌떡 일어나 위엄 있는 척 콧대를 세우는 녀석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저러는 거 같은데.
이 새끼 정체가 뭐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
아니면…….
나는 질문의 방향을 바꿔 보았다.
“금제라도 걸려 있는 건가? 그렇다면 고개를 끄덕여라.”
“금제는 무슨. 누가 감히 이 몸에게 금제를 건다는 말이냐.”
금제에 관해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걸 보면 그 때문에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닌 거 같고.
나는 상황이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꼈다.
가짜 할렌트와는 무언가 달랐다.
나는 녀석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 시선에 움찔하는 녀석.
보기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질문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보았다.
“네가 진짜 왕세자라고?”
“그렇다. 네가 프렌치아의 국민이라면 당장 예를 표하라.”
“나는 과거 웨일런궁에 있었다. 왕세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질문들을 많이 갖고 있지. 대답할 수 있겠나.”
“그곳에서 일했다면 내 얼굴을 잘 알 텐데도 의심하는 것이냐.”
“그럼 하나 묻지.”
“자, 잠깐.”
녀석이 황급히 손을 뻗으며 나의 말을 막았다.
“그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당연히 그럴 테지.
멋쩍은 표정의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열다섯 살 때까지의 기억이 없다. 그때의 기억은 모두 잃어버렸거든.”
이런 식으로 나온다라…….
확실해 대략적으로 상황을 외운 것보다는 아예 기억을 잃었다는 게 나을 테지.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린 나는, 내가 나답지 않게 혀가 길었음을 인정했다.
녀석이 전생의 내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온정을 베푼 듯하다.
진실을 말하게 하는 간단한 방법이 따로 있음에도 그걸 여태 미뤘다.
“이 꽉 물어라. 생각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게야.”
나는 가차 없이 분근착골을 시작했다.
우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나자빠진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쳐 댔다.
“끄, 끄아아악!”
고문이 이어지자, 이리엘은 그 처량한 모습을 보지 못하겠는지 내 소매를 붙잡아 왔다.
“잠깐만요! 잠깐, 멈춰 봐요!”
“이 녀석은 가짜래도.”
내 말에 그녀는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진짜일지도 모르잖아요!”
“아니, 가짜다.”
“빨리 멈춰요! 일단 멈추라구요!”
이리엘이 내 소매를 흔들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나를 쏘아보는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쳇.
나는 어쩔 수 없이 분근착골을 멈추어 주었다.
“끄으으…….”
몸을 태아처럼 웅크리며 신음을 흘리는 녀석.
이리엘이 그런 그에게 재빨리 다가가 상세를 살폈다. 나는 낑낑거리는 그를 보며 혀를 찼다.
“고작 그 정도 가지고 엄살은.”
이리엘은 독이 잔뜩 오른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가짜라고 어떻게 확신하는데요! 진짜 기억을 잃었을 수도 있잖아요!”
“몇 번을 말해. 내가 보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왕세자는 테나스타 광장에서 죽었어.”
“처형당한 왕세자가 가짜일 수도 있잖아요!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 수 있다면! 그때 처형당한 사람이 가짜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리엘이 악을 쓰며 소리치자 나는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이 맞으니까.
나는 전생의 내가 그때 죽었기에 이 녀석이 가짜라고 장담할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럴 수 없었다.
이리엘의 말대로 적에게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처형당한 왕세자가 가짜일 수도 있는 거니까.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15년 전의 기억을 우연히도 까맣게 잊었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할렌트가 일부러 지웠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생김새도 똑같이 만들어 내는 사람인데!”
이번에도 이리엘의 말이 맞을지 몰랐다.
녀석이 실제로 과거의 제 삶을 잊었다면 난감해진다.
분위기가 단순한 연기로 보이지 않았다.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가짜 할렌트 때와는 확실히 상황이 달랐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머뭇거리자 이리엘이 호기롭게 말했다.
“이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가 잊은 기억을 되살려 보면 돼요.”
그녀는 루비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왜, 갑작스런 충격으로 잃었던 기억을 되찾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우웅.
목걸이에서 옅은 진동이 일자, 이리엘의 머리칼과 눈동자가 오래간만에 청색으로 물들어 갔다.
푸른 바다의 색이었다.
“혹시나 했었는데. 이 아가씨가 그 이리엘이 맞았구만.”
네더만이었다.
그는 이제야 이리엘이 왕세자의 약혼녀였던 이리엘 세리어스란 걸 확신한 모양이다.
오랜만에 본연의 색을 찾은 이리엘은, 아직도 분근착골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왕세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하, 저예요. 이리엘. 저 기억 안 나세요?”
“끄응. 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것이냐! 나는 열다섯 살 때까지의 기억은 모두 잃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왕세자는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본인을 부축하려는 이리엘의 손을 뿌리치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이리엘이 그런 그에게 간절히 말했다.
“저 좀 봐 보세요. 우리 어린 시절에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잖아요.”
“기억나지 않는대도! 이런 고문을 백날 해도, 날 찢어 죽인다고 해도 잃은 기억이 어찌 되살아난단 말이냐!”
“잘 생각해 봐요! 나 평생 지켜 준다면서요. 평생 나만 아껴 주겠다면서요!”
흠.
……내가 그랬었나?
그랬거나 말거나 이미 지나간 전생의 말이니 신경 쓸 것은 없었다.
가짜 왕세자는 이리엘의 간곡한 호소에 그제야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리엘을 본 녀석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린다.
“……당신이 누군데?”
“이리엘이요. 저하의 약혼녀이기도 했고요.”
“다, 당신이 내 약혼녀?”
눈을 크게 뜬 가짜 왕세자가 이리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일순, 녀석의 동공이 몽롱하게 풀어지며 안면에 은은한 홍조가 깃든다.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몰골인데.
뭐하는 새끼지?
“저 기억나세요?”
갑자기 달라진 표정에 이리엘이 반색하며 묻자, 그가 멋쩍은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왠지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죽일까?
“약혼녀의 미모에 놀라 기억을 되찾는 왕세자라. 프렌치아의 미래가 굉장히 밝구먼그래.”
네더만의 말에 가짜 왕세자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어졌다. 이리엘이 눈총을 주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녀석의 말장난이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다.
가짜 왕세자가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뗐다.
“큼큼. 어쨌거나 이 몸은 거짓을 말하지 않느니라. 아무리 고문을 한다고 해도 진실은 바뀌지 않아.”
네더만이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럼 프렌치아의 왕세자라는 사람이 여기서 여태 무얼 하고 있던 겐가.”
“그건 다 사정이 있었느니라. 내 모두 설명해 주도록 하지. 그럼 너희들도 나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가짜 왕세자는 상당히 자신 있는 태도였다.
지금까지 녀석을 쭉 지켜본 결과 조금 모자라 보이기는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건 어느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말했다.
“총독이 이곳에 와 있나.”
“그래. 얼마 전에 왔다.”
“Dr. 주르하란 자는 알고 있나?”
“Dr. 주르하?”
“해골바가지처럼 생긴 놈이지.”
“아. 알고 있다.”
“그도 이곳에 있나.”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는 얼마 전에 떠난 걸로 알고 있는데.”
네더만이 왕세자를 보며 픽 웃었다.
“어째 저하의 입이 나보다 가벼운 거 같은데?”
“무엄하구나. 입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너희들 또한 나의 백성들이 아니냐. 그것도 나라의 독립을 위하는. 그런 너희들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느니라.”
네더만이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 또한 가짜 왕세자의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광산에는 왜 온 거지?”
“상황을 살피러 왔다. 광부들의 건강도 좀 살필 겸.”
“살핀 거치고 광부들의 상태가 좋지 않던데.”
“불가항력이다. 내가 손쓸 수 없는 영역이지.”
“그것 때문에 왔다며.”
“……그렇지만, 그것 외에도 확인할 게 산더미다. 비 올 때를 대비한 배수로 정비도 그렇고, 건물 외벽의 보수 문제나 채석할 때 사용하는 공구들의 관리 상태도 중요하지. 거기에 식자재도 부족함이 없는지 봐야 한다고.”
가짜 왕세자는 꽤 중요한 일처럼 말했지만, 그런 일로 이곳까지 행차했을 리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있을 터.
그것을 추궁하려는 찰나, 네더만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괜히 여기까지 와서 사사건건 간섭했던 걸 보니 우리 저하께서 많이 심심하셨나 보구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심심해서 여기까지 왔겠어요!”
이리엘이 장난치는 네더만에게 눈을 흘기며 쏘아붙이자, 그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왜? 그럴 수도 있지. 혼자 이런 섬에 오랜 시간 틀어박혀 있다 보면 그게 유일한 낙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 할렌트 녀석이 저하를 자유롭게 풀어 뒀겠나.”
“심심해서라니! 내가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 말했지 않느냐! 모두 내 확인이 꼭 필요한 일이라고. 나는 하나도 심심하지 않다!”
진심이 담긴 가짜 왕세자의 항변에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적이 이어지자 네더만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정곡을 찔렀나 보군. 그냥 아니라고 해 둡시다.”
“진짜 아니래도!”
“그만.”
나는 녀석의 말을 잘랐다.
녀석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분근착골의 효과가 이리도 좋다.
어쨌거나 녀석이 이곳에 온 건 심심해서가 맞는 듯하고.
나는 네더만과 이리엘에게 말했다.
“일단 가짜 녀석을 데리고 불멸의 도시로 간다.”
“가짜 아니라니깐!”
“여러 의문은 할렌트를 만나면 풀 수 있겠지.”
“내 말은 못 믿는 것이냐!”
나는 말끝마다 토를 다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내 눈을 황급히 피한 녀석이 먼 허공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저런 한심한 놈이 내 행세를 하고 있다니…….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알렌에게 가자.”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지금쯤이면 대강적인 상황을 모두 전했을 터.
여기서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여러 의문들은 불멸의 도시로 가면서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걸을 수 있겠어요?”
이리엘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더니, 가짜 왕세자 녀석이 얼굴을 붉히며 헤벌쭉거리고 있었다.
나는 네더만을 보았다.
“네가 도와라.”
“쳇. 아주 상전이 따로 없다니까.”
네더만은 툴툴거리면서도 이리엘에게 가서 왕세자를 빼앗아 왔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어른한테 네가 뭐야, 네가.”
내 서늘한 시선을 느낀 네더만이 옆에 있는 세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 말고 이 자식, 아니 저하한테 말한 건데?”
“내, 내가 뭘 어쨌다고!”
왕세자가 괜히 질겁하여 학을 뗀다.
나는 그 한심한 모습에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잠시 후.
우리는 불멸의 도시로 떠나기 위해 목책 앞에 서 있었다.
그늘진 표정의 광부들이 그런 우리를 배웅하기 나와 있었다.
일련의 계획을 모두 설명해 주었으나, 불안할 수밖에.
알렌이 알스와 진한 포옹을 나누며 말했다.
“금방 다녀올게. 몸 잘 챙기고 있어.”
“부탁한다. 몸조심하고.”
내게는 광산에서 가장 오래 일했다는 체리스가 다가왔다. 그는 부둥켜안고 있는 알렌과 알스를 슥 보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말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예.”
그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이곳에 있다면 추가적인 위협은 없을 거다.
“곧 일상을 살게 될 거다.”
그는 환히 웃으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광부들을 두고 불멸의 도시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