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제102화 운이 좋았다 (2)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의 등장에 호르구가 뒤편에 있던 이들을 인계했다.
그 과정은 길지 않았다.
나와 이리엘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호르구 옆에 내려섰다.
“끝난 거냐.”
“우왁!”
호르구는 내 욕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일단 제가 할 일은 끝났습니다. 항상 이런 식이거든요. 밤이 늦어 출항은 내일 아침에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들의 뒤를 은밀히 쫓기만 하면 된다.
상황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헤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하고자 하는 일이 잘되시길.”
제 임무를 마친 호르구가 간사한 미소를 지으며 굽신거렸다. 나는 허리춤의 칼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그래, 가 보거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끝이 흐릿해진다.
촤악-!
발검과 동시에 이지러지는 하얀 빛 무리.
철컥.
한차례 빛을 발한 섬광이 검집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새하얀 검광을 마주한 호르구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 있었다.
그의 목 위로 붉은 선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가자.”
이리엘이 내 옆을 따랐다.
뒤편에서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은 프렌치아 사람들을 노예로 팔아먹던 인신매매단의 수장.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네더만과 함께 간 이들 또한 모두 죽게 될 거다.
나는 그들과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으니.
인간 같지 않은 자들에게까지 지킬 신의는 없다.
“이제 다 들어간 거 같은데요?”
이리엘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녀석들의 뒤를 따른 우리는 그들의 배가 정박해 있는 선착장에 도착해 있었다.
이리엘의 말마따나 적들에게서 더 이상 별다른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을 실행하란 의미.
발끝을 세운 이리엘이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레 배의 후미로 접근했다.
추적용 아티팩트 ‘내 손 안에 있다’를 부착하기 위함이었다.
납작한 원반처럼 생긴 이 아티팩트는 자력으로 강한 마력 자기장을 방출하는데, 우리는 그것과 연동된 마력 나침반으로 녀석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사방이 뻥 뚫린 바다에서는 최대 10km까지 추적이 가능하다고 하니, 지금 상황에 딱 필요한 아티팩트였다.
우리는 이것을 굽이치는 해협, 포르센 지부의 지원을 받아 구입할 수 있었다.
호르구의 말대로 배는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출항했다.
그들이 ‘내 손 안에 있다’ 아티팩트를 부착한 채로 출발하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우리가 따로 준비한 범선으로 향했다.
선실이 하나 있는 조그만 배였다.
* * *
파도가 넘실거리는 망망대해.
사방 천지에 푸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는 그 풍경의 운치를 누리며 나아갔다.
따사로운 햇볕이 수면 위로 부서지며 은빛 비늘이 흐드러지게 핀다.
출항한 지도 어느새 일주일.
생각보다 섬이 멀었다.
사방이 트인 바다에서는 가시거리가 길기에, 적들의 범선과 먼 거리를 유지한 채 그 뒤를 천천히 따르고 있었다.
솨아-.
너른 바다를 감상하고 있던 이리엘은, 옆에 앉은 제네스를 슬쩍 보았다.
현재 그녀는 제네스와 출렁이는 배의 갑판 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단둘이 세월을 낚고 있으니, 괜히 데이트하는 기분이-.
‘야! 정신 차려!’
이리엘은 황급히 머리를 털며 상념을 지웠다.
근래 이 좁은 범선 안에서 단둘이 있자니, 마치 신혼 같은 분위기-.
‘정신 안 차리지!’
이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생각에 소리 없는 호통을 쳤다.
이러다 정신병이라도 걸릴 것 같지만, 그녀는 인정머리 없는 간수처럼 스스로를 엄격히 관리하고 있었다.
손끝에 입질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어?!”
그녀는 낚싯대를 힘껏 낚아챘다.
손아귀에 묵직한 무게감이 전해졌다.
“오늘 저녁은 든든히 먹겠는데요.”
벌써 며칠째 잡은 물고기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이제는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만으로 물고기의 크기가 가늠될 정도.
“읏차!”
이리엘이 낚싯대를 당기자 꽤 커다란 물고기가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가 바닷속으로 잠겼다.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낚싯줄을 당겼다.
결국, 배 위로 올라 힘차게 펄떡이는 물고기.
“괜찮네.”
제네스는 이리엘의 상체만큼 커다란 물고기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정도면 내일 아침까지는 푸짐하게 먹을 듯하다.
“그럼 저는 요리하러 갈게요.”
낚싯바늘을 빼며 활짝 웃는 이리엘.
싱싱한 식재료에 흥이 난 듯했다. 그런 그녀를 제네스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리에 재미라도 들린 것인가.’
언젠가부터 이리엘은 시키지 않아도 정성 어린 음식을 만들어 오고 있었다.
이제는 잔소리할 게 없을 정도.
그녀가 내왔던 첫 요리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흥~ 흥~.”
게다가 요즘은 간혹 콧노래까지 부른다.
제네스는 그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고약한 성질을 부리지도 않고, 발톱도 드러내지 않으니 왠지 모르게 불안하기까지 하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이리엘은 조금 전까지의 염려가 무색할 정도로 물고기를 사납게 팼다.
퍽! 퍽!
기절시킬 요량인 것은 알고 있으나, 손끝에 실린 감정은 분명 분노.
‘역시 그대로군.’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왜인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한편, 물고기를 사납게 기절시킨 이리엘은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제발 정신 차리자.’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
저 인간에게 요리해 줄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분노로 점철되어 있던 과거의 감정을 끄집어내야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오락가락하는 스스로를 보고 있노라면 이미 중증 수준이지만,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한 관리가 필요했다.
이 이상 마음이 커졌다가는 정말 위험할지도 몰랐다.
‘반드시 마음을 접어야 한다고!’
제네스와 자신 사이에 출생의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문의 원한이 얽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제네스를 자신의 연인으로 용납할 수 없었다.
물론 제네스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젠장.
좋아한다고 고백해도 안 받아 줄 확률이 높지.
빌어먹을.
뼈아픈 진실에 눈물이 찔끔 나오지만,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고백도 안 해 보고 바보같이 포기하려는 건 아니었다.
자신에게는 꿈꾸는 결혼 생활이 있었다.
낭만적인 데다 사랑까지 충만한.
하지만 제네스와 결혼하게 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낭만은 개뿔.
사랑? 웃기고 자빠졌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잔소리가 얼마나 심할까.
자신은 집안일만 하다가 허리가 휘고 말 거다.
거기에 애까지 낳으면?
인생은 끝났다고 봐야지.
욕심으로는 애를 셋까지 낳을 계획이었는데, 제네스와 함께라면 한 명 키우기도 버거울 거다.
……흠.
그래도 혼자면 외로울 거 같은데.
‘내가 좀 힘들더라도 둘은 있어야지.’
그래, 둘만 낳자.
적당한 결론에 도달한 이리엘은 불현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새 자신이 제네스 옆에서 애 둘을 안고 있는 까닭.
그래도 생긴 건 예쁠 것 같-.
“으악! 그만!”
또 생각이 의도와 다른 곳으로 새어 버린 이리엘은 그 분노를 이미 기절한 물고기에 풀었다.
퍽! 퍽! 퍽! 퍽!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제네스는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물고기가 안타까울 지경이군.”
이리엘이 그렇게 자신의 마음과 고군분투하는 사이.
네더만과 알렌은 진짜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이딴 게 음식이라니. 양심이라고는 하나 없는 종자들 같으니라고.”
네더만은 수저로 멀건 수프를 휘저으며 입을 빼쭉거렸다. 영양가는 물론이거니와 맛도 더럽게 없는 수프였다. 일주일째 이것만 처먹고 있으니 이제 냄새만 맡아도 이골이 날 지경.
그는 진심으로 이 수프의 정체가 궁금했다.
“대체 뭘 넣고 끓여야 이따위로 맛이 없는 걸까?”
“그러니까 말입니다. 비결이 뭔지 멱살을 잡고 묻고 싶을 지경이에요.”
알렌 또한 그 의견에 동조하며 으르렁거렸다.
요 일주일 사이, 거지처럼 분장했던 그들은 진짜 상거지가 되어 있었다.
이들과 함께 온 자들 또한 마찬가지.
게다가 좁은 선실은 역한 오물의 냄새가 가득했다.
그들은 배가 출항한 후로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모든 생리 현상을 해결하고 있었다.
“개같은 놈들.”
알렌이 날 선 눈빛을 바깥으로 돌렸다.
당장의 불편함을 떠나, 이곳에 징병되어 온 이들 모두 이런 열악한 환경을 겪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볼이 절로 푸르르 떨렸다.
그들이 이 선실에서 얼마나 불안에 떨었을까.
그 상황이 한눈에 보였다.
“음?”
그때, 멀건 수프를 들쑤시던 네더만이 귀를 쫑긋하며 고개를 들었다. 알렌도 눈을 번뜩이며 네더만을 바라보았다.
선실 바깥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이제 도착했나 본데?”
네더만의 말에 선실 분위기가 일순 환해졌다.
다들 이 좁고 답답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까닭.
“확실히 그런 거 같아요!”
알렌이 반색하며 벌떡 일어났다.
배를 정박하기 위한 움직임이 분명했다.
“그럼 이제 슬슬 나가 보자고.”
네더만은 입꼬리를 올리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이 지옥 같은 소굴에서 벗어날 시간이었다. 그가 힘을 주자 팔목을 포박하고 있던 밧줄은 맥없이 끊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알렌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포박을 풀었다.
“빌어먹을. 드디어 나가는구나.”
네더만은 마치 출소하는 죄수처럼 감격에 젖은 채로 선실의 문을 열었다.
좁게 늘어선 복도가 눈앞에 드러났다.
하지만 복도의 공기마저도 상쾌하다.
네더만은 그 상쾌한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하아. 천국 별거 없구나.”
“하아. 그러니까요.”
알렌도 그 옆에서 습한 공기를 마음껏 코로 빨아들였다. 역한 냄새 없이 숨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극락이 따로 없었다.
이들은 좁은 복도를 거닐어 선상에 올랐다.
시야가 훤히 트이며 푸른 바다가 펼쳐질 거란 예상과 달리, 눈앞은 짙은 운무로 인해 주변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안개가 엄청 짙네요.”
“그러니까.”
얼마나 안개가 짙은지 옆에 선 알렌도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짙은 운무가 걷히며 주변의 풍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기대하던 상쾌한 경관은 아니었다.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 있어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거뭇한 바다 저편에서는 하나의 섬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이거 오랜만에 나왔는데 풍경이 왜 이렇게 우중충해.”
입을 삐쭉거리며 투덜거린 네더만은, 선상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에게 다가갔다.
“저기가 목적지인가?”
“몰라서 묻냐.”
하던 일을 마무리하며 자연스레 대꾸한 이는 뭔가 싸한 기분에 질문한 이를 바라보았다.
거지꼴을 한 사내가 코앞에 있었다.
“왁!”
화들짝 놀라며 검부터 뽑아 드는 녀석.
스릉!
“너 이 새끼 뭐야? 어떻게 나왔어!”
당황한 그에게 네더만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화장실이 급해서 말이야.”
* * *
나는 뱃머리에 나와 짙은 운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날이 화창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한 치 앞도 분간되지 않는다.
“여기 맞겠죠?”
아까부터 나침반이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미약한 반응을 쫓아 이곳에 도달한 것이고. 그들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연결이 끊어진 듯했다.
이 운무가 마력 자기장을 방해하는 것이겠지.
일반적인 자연현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더 수상한 바다일 수밖에.
잠시 후 우리는 짙은 운무를 빠져나왔다.
“어! 이제 반응해요!”
이리엘이 나침반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쫓던 배가 이제 코앞이었다.
“저기가 목적지인가 봐요.”
이리엘이 저편의 섬을 가리켰다.
“그러네.”
나는 그 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섬이지만, 왠지 저 섬의 이름을 알 것 같다.
짙은 운무를 본 순간부터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징병한 이들을 은밀히 옮긴다 했을 때부터 왠지 수상하다 여기기는 했는데.
운이 좋았다.
아무래도 이곳이, 우리가 찾던 이모텔섬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