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제99화 움파움파족 (2)
내가 반쯤 검을 뽑자 네더만이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강하게 항변했다.
“이번에는 잘한 일이지 않은가!”
“알아.”
“근데 왜!”
“그냥. 거들먹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서.”
“…….”
나는 무심히 답하며 검을 집어넣었다.
내가 말했다.
“그래서 해석은 된 건가?”
녀석은 안도의 숨을 뱉은 뒤 말을 이었다.
“아니, 해석은 아직일세. 이 문자가 소수민족의 것이란 건 기억하고 있을 테지? 내가 얻은 정보는 그들의 거주지라, 해석을 위해서는 그들을 직접 찾아가야 하네. 정보의 진위는 확인해 놓았으니 염려할 필요 없고.”
“안 찾아가고 여태 뭐 했지?”
“열심히 일한 사람한테 뭐 했냐니? 내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은 겐가. 참으로 섭섭하구만.”
“나는 네가 술 처마시며 논 이야기밖에 들은 기억이 없는데.”
“큼큼. 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네. 그 소수민족의 이름이 움파움파족인데,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하루는 들어가야 하네. 그런데 마침 자네들이 올 때가 되었지 뭔가. 그래서 함께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그냥 더 처놀고 싶었던 거겠지.
“어쨌거나 배는.”
“자네가 이리 나올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뒀네. 내일이라도 당장 떠날 수 있을 게야.”
“그럼 내일 바로 출발한다.”
내 말에 네더만은 씩 웃으며 목을 쓸었다.
자기가 죽다 살아난 건 아는 모양이다.
“이모텔섬에 관해서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나 보지?”
“지부 쪽에서도 난관이 많다더군. 소해에 섬이 여간 많지 않나. 지명 외에는 별다른 정보도 없는 데다, 너무 공개적으로 들쑤셨다가는 그쪽 귀에 들어갈지 몰라 조심스레 움직이고 있다네.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게 다가갈 문제는 아니었다. 일단 눈앞의 것부터 하나씩 해결하고 가야 했다.
“저, 네더만 씨.”
대화가 마무리되자 알렌이 새로운 화두를 꺼냈다.
“징병된 이들에 대해서도 진척이 있었습니까?”
위르안 상단에 의해 징병되었던 데이지의 오빠, 알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의 마지막 행적이 포르센 항구로 이어지고 있었기에 우리는 사전에 네더만에게 전서구를 보냈었다.
네더만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들은 모두 미르텐 시장으로 흘러들어 갔더군. 꽤 커다란 노예 시장이지. 개중 위르안 상단과 거래하던 놈들의 꼬리를 밟아 가고 있었는데, 아마 지금쯤이면 범위가 얼추 좁혀졌을 걸세.”
“진짜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알렌의 말에 네더만은 거드름을 피웠다.
“놀고만 있다니. 내가 지부 놈들을 얼마나 쪼아 댔는데.”
“됐고.”
나는 녀석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나와 알렌을 주축으로 두 조로 나누어 움직인다. 나는 움파움파족에게 갈 거고, 그동안 알렌은 미르텐 시장으로 가서 위르안 상단과 거래하던 놈들에 대해 조사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알렌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더만과 이리엘도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들의 의견을 전했다.
“저는 알렌 형님이랑 움직일게요.”
“내가 알렌이랑 가지.”
두 녀석 다 알렌과 움직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리엘은 황당하다는 듯 네더만을 보았다.
“움파움파족에 관한 정보는 네더만 씨가 더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 네더만 씨가 따라가요.”
“저 녀석과 둘이서 움직이라니. 내가 이 나이 먹고 저 새파란 자식의 비위를 맞춰야겠나. 네가 저 괴물 같은 자식이랑 가. 내가 보기에 둘은 성격부터 잘 어울린다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성격부터라니! 누굴 개차반으로 보나. 아까 보니까 둘이 죽도 잘 맞는 거 같더만요.”
“무슨 소리! 그건 아주 잠깐의 전우애였을 뿐이야!”
둘은 서로 나와 가지 않겠다며 실랑이를 벌여 댔다.
이 자식들이.
괘씸하기로는 우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다.
그다지 위험한 일도 아니기에 둘 중 아무나 데려가도 상관없을 듯하기는 한데.
전력의 균형을 생각했을 때, 내가 이리엘을 데리고 가는 게 나았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나는, 둘의 끝나지 않는 실랑이에 종지부를 찍었다.
“네더만, 네가 가라.”
“알렌이랑?”
되묻는 녀석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죽다 살아난 듯한 환희가 만면에 묻어 있었다.
그 꼴을 보고 배알이 꼬인 나는 곧장 마음을 바꿨다.
“아니, 나랑.”
* * *
넘실거리는 푸른 파도를 탄 배는 순항을 계속했다. 나는 뱃머리에서 저 멀리 보이는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저곳일세. 저기에 움파움파족이 살고 있다더군.”
네더만이 그런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는 점차 가까워 오는 해안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 모래사장에 앉아 럼주를 나발로 불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 것 같은데 말이야.”
“좋은 생각이군.”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른 바다를 감상하며 마시는 술이 또 기가 막히지.
“호오. 자네도 낭만 좀 즐길 줄 아나 본데?”
네더만이 나를 보며 반색했다.
나는 그것에 코웃음을 쳤다.
이게 나를 뭘로 보고.
나는 경관 좋은 산야에 묻혀 술잔을 기울이며 사는 게 목표인 사람이었다.
내가 얼마나 풍류와 낭만을 즐기는 사람인데.
“그럼 이따 한잔 어떻겠나.”
“일만 잘 마무리되면.”
“크으. 벌써 입가에 침이 고이는구만. 자네 생각보다 아재 취향이야. 나랑 잘 맞는다고.”
그렇게 녀석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배는 어느새 해안가에 정박했고, 우리는 움파움파족이 머물고 있다는 섬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포르센 항구를 떠나온 지 꼬박 하루만이었다.
“이쪽으로 가 보세.”
네더만이 지도와 지형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나는 녀석의 안내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보였다.
작은 마을이었다.
“아이고, 외지에서 오신 분들이시군요.”
입구에 들어서자 제집 마당에서 무언가를 말리고 있던 남자가 야트막한 돌담 너머로 말을 걸어 왔다. 햇볕에 그을려 시커멓게 탄 사내였다.
네더만이 그의 알은체를 반기며 말했다.
“포르센에서 여기까지 꼬박 하루를 달려왔다네. 이곳에 움파움파족이 산다고 하여 왔네만. 혹 아는가?”
“움파움파족이요? 그게 뭡니까. 저희 마을은 말린 쥐포로 유명한데요. 한번 자셔 보시겠습니까. 맛이 아주 기똥찹니다. 아니면 다른 것도 있는데.”
살가운 자인가 했더니 장삿속을 가진 이였다.
그는 자신이 내줄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하며 딴소리를 해 댔다.
내가 말했다.
“그런 건 됐고. 움파움파족에 대해 아는 바가 없나.”
“흠, 움파움파족이라.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한데…… 가물가물하네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뜸을 들이는 녀석.
뭔가 바라는 게 있는 눈치였다.
“사례는 톡톡히 하지.”
“아, 움파움파족! 이제야 기억이 났습니다! 저희 마을 이름이 움파움파이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왜 여태 모르는 척을 한 겐가.”
네더만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그는 어깨를 으쓱 거리며 말했다.
“움파움파 마을과 움파움파족은 엄밀히 다르지 않습니까.”
“…….”
네더만은 울컥한 감정을 누르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혹 이 문자를 아는가. 움파움파족만 사용하는 문자라고 하던데.”
네더만은 그에게 「불멸의 도시」를 펼쳐 보여 주었고, 그는 그것을 보고는 한차례 눈을 번뜩였다.
“저희가 따로 사용하는 문자가 있기는 한데요.”
“그런데.”
“흠…… 이건 잘 모르겠는데요.”
네더만이 당황한 기색으로 그에게 재차 확인을 요청했다.
“그, 그럴 리가. 내가 확인했을 때는 분명 이곳에서 이 문자를 쓴다고 했네.”
“그런가요? 아무래도 잘못 찾아오신 거 같은데…….”
하얗게 질린 네더만이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하루를 꼬박 달려 이곳에 왔다.
나는 내 심경을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스릉.
“자, 잠깐만! 이자가 잘못 본 게 틀림없어!”
그에게 바짝 다가간 네더만은 「불멸의 도시」의 페이지를 넘기며 닦달을 해 댔다.
“자세히 좀 봐 보게, 자세히. 내가 확인했을 때는 분명 이곳에 이 문자를 아는 이들이 있다고 했단 말일세!”
책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사내는 이내 고개까지 젖히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사실 저희 부족의 문자가 맞습니다. 잘 찾아오셨습니다.”
“……조금 전에는 잘못 찾아온 거 같다며.”
벙찐 네더만의 물음에 그가 활짝 웃었다.
“농담이었습니다만.”
“야, 이 자식아!”
녀석의 멱살을 덥썩 잡은 네더만이 그를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농담할 게 따로 있지! 하마터면 내 목이 날아갈 뻔했다고!”
녀석의 머리통이 우악스러운 손길을 따라 대롱대롱 흔들렸다.
“크헉헉. 죄, 죄송합니다!”
종이 인형처럼 펄럭이던 녀석이 퍼렇게 질린 얼굴로 사죄하자, 네더만은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히며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는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며 정중히 사죄를 해 왔다.
“큼큼. 제가 실례했군요. 섬에서만 살다 보니 외지인들을 만나면 장난이 치고 싶거든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대신 촌장님께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요새 젊은이들은 이 문자를 따로 배우지는 않아서 모르거든요. 마을 어르신 몇몇 분만 해석이 가능하실 겁니다.”
다행히 헛걸음은 하지 않을 듯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그는 촌장에게 길을 안내하며 자신의 이름을 저키라 밝혔다. 그러면서 움파움파족에 관한 설명도 이어 갔다.
유일한 창조신을 믿는 움파움파족은 세상에 관한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아 버린 대가로 망각의 축복을 얻은 부족이라고 했다.
현재 움파움파 마을에 거주하는 이들은 그 신성한 핏줄의 대물림이 약해지고 있으나, 소해의 어딘가에는 온전한 혈통의 움파움파족이 살고 있다는 등의 묻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그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촌장의 집 앞이었다.
“손님을 모시고 왔다고 말씀 좀 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갔던 그가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들어오시지요. 상황은 제가 다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덕분에 상황이 편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니 소파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노인을 볼 수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었다.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반겼다.
“이분들은 누구신가.”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분들입니다.”
“자네가 방금 전에 왔었다고?”
촌장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키는 우리를 보며 간단히 사정을 설명했다.
“촌장님이 건망증이 심하셔서요.”
“…….”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건망증이 심해서 방금 왔던 것을 기억 못 한다니.
이게 건망증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인가?
하지만 저키는 아무렇지 않게 우리에 관해 설명해 갔다.
촌장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온화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움파움파족을 찾아와 주어서 고맙네. 이쪽으로 와 편히들 앉게.”
우리는 가볍게 묵례하고 자리에 앉았다.
“내가 건망증이 심하니 좀 이해해 주게.”
“나이가 들면 다 그렇지요. 요새 저도 자주 깜박깜박합니다.”
네더만의 말에 촌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이가 들면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나는 그래서가 아니고, 모두 망각의 축복 때문이라네. 움파움파족의 혈통이 강한 이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지.”
오면서 저키에게 들은 기억이 나기는 했다.
그다지 믿기지는 않지만.
“그래, 이곳에는 어떻게들 오셨다고?”
“…….”
또다시 원점이었다.
저키가 나서서 우리가 온 이유에 대해 다시 설명해 주었다.
이것들이 장난하는가 싶기도 했지만, 촌장의 태도가 연기 같지는 않아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저키의 이야기가 끝나자 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의 문자로 기록된 책이라니. 한번 줘 보겠나.”
네더만은 그에게 「불멸의 도시」를 건넸고, 촌장은 책을 펼쳐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이것은!”
그는 얼마나 놀랐는지 회춘이라도 한 것처럼 생동감 있는 표정으로 책장을 휘리릭 넘겼다.
대략적인 내용을 훑어본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 책을 대체 어디서 얻은 겐가?”
“우연히 얻었습니다. 해석이 가능하시겠습니까?”
네더만의 물음에 그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해석할 필요도 없네.”
촌장이 책을 닫고는 눈빛을 빛냈다.
“모두 아는 얘기거든. 우리 부족의 신화와도 연관된 이야기라서 말일세.”
“아, 그럼 책에 적힌 내용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일세. 말해 줄 수 있고말고.”
촌장은 표정을 굳히며 침음에 잠겼다.
진지한 태도를 보니 꽤 심각한 이야기인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뜸 들이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용이 뭐였더라?”
그는 다시 책을 펼치더니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생동감 있는 표정으로 페이지를 넘겨 갔다.
“아, 그래. 맞아.”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그 이야기가 맞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