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제98화 움파움파족 (1)
스프를 한 입 떠먹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깊었다. 먹자마자 음식에 정성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나는 성심껏 아침을 준비한 이리엘을 흔쾌히 칭찬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해 줘야 다음에도 잘하는 법이다.
“맛이 좋구나. 잘했다.”
“하지 마요.”
“?”
하지만 이리엘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거늘, 이 녀석은 오히려 내게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댔다.
뭔데?
내가 뱉은 짧은 말에는 칭찬 외에 다른 의미를 품고 있지 않았다.
오해할 만한 부분도 없었고.
“자꾸 칭찬해 주지 말라구요.”
일단 내 말을 곡해하지는 않은 듯한데.
하여간, 꼭 칭찬을 해 줘도 엇나가지.
그리고 자꾸라니.
“칭찬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인 거 같은데.”
“어쨌거나 하지 말라구요.”
나는 어이가 없어 알렌을 바라보았다.
‘얘 왜 저래?’라는 눈짓을 받은 알렌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다시 이리엘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언제 머리라도 다친 거냐?”
“걱정은 더더욱 하지 마요.”
……걱정이 아니라 비꼰 건데.
대체 뭐지?
송곳니를 드러내는 건 여전한데, 요새 뭔가 이상하다.
그래도 전에는 사납게 굴 만할 때 사납게 굴었는데, 요즘에는 이해되지 않는 지점에서 뜬금없이 송곳니를 드러낸다.
바로 지금처럼.
하여간 알다가도 모를 생물체다.
고개를 내저은 나는 알렌에게 물었다.
“포르센 항구까지는 얼마나 남았느냐.”
“이제 저 산만 넘으면 됩니다.”
알렌이 야트막한 산자락을 가리켰다.
저것만 넘으면 이제 바다가 보일 듯하다.
* * *
“와아-!”
이리엘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산의 정상에 오르니 시야가 훤히 트이며 항구 도시, 포르센의 알록달록한 지붕들과 흰색에 가까운 건물의 외벽이 한눈에 담겼다.
마치 동화 속 같은 분위기.
그 뒤로 널따랗게 펼쳐진 푸른 바다는 어떠한가.
햇볕을 받아 은빛 비늘이 아롱지는 물결을 보고 있노라면, 꽉 막혀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리엘은 기다랗게 펼쳐진 수평선을 보며 생각했다.
‘이 바람에 실어 모두 날려 보내자!’
그녀는 제네스를 향한 마음을 스치는 바람에 전부 담았다.
그것이 산산이 흩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때 제네스에 대한 마음을 부정하던 그녀는,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한 순간부터 그 마음을 없애는 것으로 방향을 돌린 상태였다.
그런데 그것이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싫어하던 아침 차리는 일마저 왠지 모르게 즐거워졌다.
그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눌 때도 살랑거리는 바람이 심장에 머무는 듯해 미쳐 버리겠다.
‘어쩌면 진짜 미친 걸지도.’
그녀는 순순히 인정했다.
오늘 아침에는 자신도 모르게 스프에 진심을 담아 버리지 않았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이리엘은 자연스레 옆에 서 있는 제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찬가지로 포르센의 경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에 들어 올려진 머리칼이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여 준다.
투명하게 흰 피부와 그에 대비되는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칼과 눈동자. 베일 듯 오뚝한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
특유의 건조한 표정까지.
솔직히 인물은 훤하다.
제네스가 시선을 앞에 둔 채 입을 열었다.
“뭘 보냐?”
“네?”
“뭘 그렇게 보냐고.”
화들짝 놀란 이리엘은 고개를 황급히 돌리며 말했다.
“웃겨 진짜! 제가 뭘 봤다고 그래요! 그냥 눈 돌리다가 우연히 본 거거든요. 저 수평선을 따라 고개 돌리다가요! 그러니까 왜 거기 있고 난리예요. 참 나!”
방귀 뀐 놈이 성을 낸다더니, 이리엘은 괜히 성을 냈다.
이 인간은 진짜.
옆에도 눈이 달렸나.
조금의 방심도 못 하겠다.
요새 혼잣말도 조심히 하고 있는데, 이제는 시선 관리도 신경 써야 하니.
‘에효, 내 신세야.’
옆에 선 알렌이 화제를 돌렸다.
“네더만 씨가 정보 좀 추려 놨을까요?”
아, 맞다.
그 인간 저기 있었지.
알렌의 말에 이리엘은 그제야 네더만이 저곳에 있음을 기억해냈 다.
평소에 하는 행동거지를 봤을 때 성실함을 기대할 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제네스 또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오래 살고 싶다면 그리해 놨겠지.”
* * *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부둣가.
그 앞으로 까맣게 탄 어부들이 잡은 물고기들을 옮기고 있다.
바닷가의 짠 내와 생선의 비린내로 절여진 그 부둣가의 골목 안쪽으로는 바다 사나이들의 거친 남성성을 만족시켜 주는 아주 괜찮은 술집이 존재한다.
이름하여, ‘낭만의 바다이야기’.
딸랑.
깨끗한 종소리와 함께 종업원이 재빨리 다가왔다.
내가 말했다.
“곧 죽을 녀석을 찾고 있는데.”
“예?”
“아니다. 찾았군.”
나는 저편에서 들려오는 녀석의 목소리를 손쉽게 찾아냈다.
이곳은 술집이면서 도박장.
식당 안쪽으로 이어진 복도에는 작은 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거침없이 걸음을 옮긴 나는 하나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 너머로 네더만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오고 있었다.
“거, 내가 진정한 꾼을 하나 알고 있다니까. 그 자식만 오면 너희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 줄 테니, 간수 잘 하고 있으라고.”
“푸하하. 매번 그 꾼 타령인가. 그 녀석 오기 전에 자네 주머니가 거덜 날 거 같은데.”
여럿이 네더만을 비웃어 댔다.
그 웃음소리 사이로 녀석이 구시렁거렸다.
“이 괴물 같은 놈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이러다 돈 다 잃겠네. 빌어먹…….”
철컥.
문을 여니 대화가 끊기며 자연스레 시선이 몰렸다. 네더만은 나를 보자마자 환히 반색했다.
“드디어 왔구만!”
나는 녀석을 싸늘히 보았다.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건 내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둬서겠지?”
“오랜만에 만나서 일 이야기부터 하는 겐가. 그 부분은 차차 얘기하고, 일단 이리 와서 앉아 보게.”
녀석은 벌떡 일어나 자리를 비켰다. 원형의 테이블에 죽 둘러앉은 세 명의 사내가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궐련을 뻑뻑 피워 대고 있었다.
개중 하나가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쫄리면 뒈지시든가.”
하, 참.
어이가 없어서.
나는 네더만을 바라보았다.
“뭔데?”
“내가 저 빌어먹을 새끼들한테 요 며칠 잃은 돈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라고. 실력들이 장난 아니야.”
“쯧. 한심한 녀석.”
“죄다 이 바닥에서 이름 좀 날리는 놈들이라니까. 한 번만 도와주게. 나 이러다 거미줄로 입에 풀칠하게 생겼다니까.”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녀석의 자리에 앉았다.
고양이가 어떻게 생선 가게를 지나가겠는가.
딱히 이 자식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서 거들먹거리는 녀석들이 꼴 보기 싫었을 뿐.
네더만은 자리에 앉은 내 어깨를 연실 주물러 댔다.
녀석들은 그런 나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뭐야, 진짜 하려고?”
“설마 네가 말하던 꾼이 이 새파랗게 어린놈은 아니지?”
나를 보며 비웃는 녀석들.
하여간 이런 새끼들은 된통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내가 말했다.
“뭐 해, 패 안 돌리고.”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 낭만의 바다이야기에 들어갔던 나는,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질 때쯤에서야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주머니가 두둑해진 채로.
어깨가 한껏 올라간 네더만도 함께였다.
“정말이지 대단하구만.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다니까.”
“이 몸은 어딜 가도 굶어 죽을 걱정이 없는 사람이다.”
“대체 비법이 뭔가. 내게도 좀 전수해 주게나.”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비법이 따로 있나. 다 천부적인 감이고 재능인 것을. 그만큼 했는데도 돈을 못 따면 도박판은 떠나는 게 맞아. 손이라도 잘라 주랴?”
“그게 무슨 무서운 말인가. 자네 덕분에 초원의 들개 놈들의 얼굴이 번뜩 떠올랐다네. 그 자식들, 요새 밤마다 나와서 내 팔을 달라고 하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무섭기는. 네가 그러니까 허구한 날 돈을 잃는 거다.”
“공감하는 바네. 내가 좀 새가슴이기는 해. 그런데 저거 이리엘 맞지?”
네더만이 저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이리엘을 가리켰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숙소였다.
이리엘은 인사를 하기도 전에 눈가에 불부터 켰다.
“아니, 아까 갔던 사람이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여, 이리엘 잘 있었나. 이거 오랜만이군.”
네더만이 능글맞게 손을 흔들자, 이리엘은 눈을 위아래로 흘기며 쏘아붙였다.
“별로 반갑지 않거든요! 괜히 친한 척하지 말아 줄래요.”
“오랜만에 봤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나. 그새 누구한테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한 게야?”
“누가 누구한테 차였다는 거예요!”
“반응 보니 맞구만. 대체 어떤 놈이-.”
“오랜만입니다, 네더만 씨.”
한창 떠드는 사이, 알렌 녀석도 숙소 밖으로 기어 나왔다. 네더만은 그런 알렌과 진하게 포옹하며 알은체를 했다.
“하하, 잘 지냈나. 자네 그새 머리가 많이 자랐군. 참으로 아쉬워. 대머리가 더 보기 좋았는데 말이야.”
“끔찍한 소리 마시고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도 안 와서 저희도 가 보려던 참이었다구요.”
“아, 그랬나. 우리가 중요한 일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늦어지고 말았지 뭔가.”
“그렇습니까? 뭐 유의미한 정보라도 얻은 거예요?”
“정보는 무슨. 이 돈주머니를 보게. 내가 그거 모을 시간이 어딨었겠나. 돈 따느라 정신없었지.”
하긴 돈을 따다 보면 시간이 정신없이 흐르기는 한다.
나도 돈 따느라 녀석을 데리러 갔던 이유를 잠시 깜박했었다.
그런데 그 돈, 내가 조금 전에 딴 거잖아.
내가 말했다.
“네가 여기에 와서 해야 할 일이 많았을 텐데.”
“물론이지. 내가 그걸 까먹고 있었겠는가.”
“그거 다행이군.”
“돈도 땄으니, 이제부터 하나하나 처리해 가야지.”
녀석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긴말 없이 검에 손을 가져갔다.
스릉.
“거, 급하기는! 농담도 못 하나.”
네더만은 반쯤 뽑힌 백색 검신을 보고는 질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해 줄 테니, 그 흉한 것은 집어넣으라고.”
우리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녀석이 이곳에 도착한 건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이라고 했다.
“나는 일단 이곳에 오자마자 낭만의 바다이야기부터 찾아갔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거기가 술맛도 죽이거든. 갓 잡은 물고기를 안주로 먹으면 더욱 기가 막히지. 바닷가에서 잡히는 물고기는 내륙에서 잡히는 민물고기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예? 지부에 안 들르고요?”
이리엘의 물음에 네더만은 친절히 입을 열었다.
“지부에 가 봤자 뭐 하나. 자네들이 올 때까지 시간도 많이 남았겠다, 오랜만에 포르센에 왔으니 내가 왔음을 알리는 게 도리 아니겠나.”
술 처먹고 놀았다는 말이었다.
스릉.
“잠깐. 아직 말이 안 끝났다네. 자네 못 본 사이에 성질만 급해졌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본론만 해라.”
“참, 재미없는 친구야. 이야기의 기본도-.”
스릉.
“알겠네, 알겠어. 하여간 그 성정은 여전하군. 본론부터 말하자면 술을 즐기면서 일주일 동안 바다의 풍광을 즐긴 나는, 그때야 지부를 찾았지. 그제야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기억해 낸 건 절대 아닐세.”
그는 내 손을 바라보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
“확인해 보니 지부에서도 유의미한 정보를 얻지 못했더군. 예상대로였지. 나는 며칠 더 있다 올 걸 후회하며 그들에게 으름장을 놨네. 얼마 안 있으면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같은 놈이 칼을 차고 올 테니, 정보를 수집하는 데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라고 말이야. 다들 사색에 질려 고개를 끄덕이더군.”
“네 목숨은 안 걸었나 보지?”
“당연히 걸었지. 그랬기에 나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고자 다시 낭만의 바다이야기를 찾았네.”
스릉.
“물론 도박만 하지 않았어! 제발 그 검 좀 어떻게 안 되겠나? 사람이 말을 할 수가 있어야지. 발렌시아 대륙의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아는 거라고.”
“본론만 말해라.”
“알겠네. 이제 다 왔어. 내 기발한 생각에 깜짝 놀라지들 말라고. 내가 괜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겠나. 나는 거기 있는 녀석들을 상대로 「불멸의 도시」에 적힌 문자들을 뿌리며 상금을 걸었지.”
네더만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해석이 가능하거나, 해석이 가능한 자의 위치를 알려 주는 자에게는 50골드를 주겠다고 말이야.”
나름 괜찮은 전략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도박에 미친 놈들이 오는 곳이야. 돈에 환장한 놈들이지. 예상대로 아주 성황이었네. 지원자가 엄청 났지. 어부들에게도 소문이 났어. 다들 자신이 해석할 수 있다며 난리가 아니었지.”
네더만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개중 태반이 사기꾼에 주정뱅이였지만 말이야. 하지만 내가 누군가. 진흙더미 속에서도 진주를 찾아내는 사람 아닌가.”
거들먹거린 녀석이 자신감에 찬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 몸이, 「불멸의 도시」를 해석할 수 있는 자를 찾아냈단 말일세.”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의기양양해하는 녀석.
큰일을 하나 해냈으니 뭐 하나 꿀릴 것 없다는 태도였다.
처먹고 논 줄만 알았더니 그래도 일을 하기는 했나 보군.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검병을 움켜쥐었다.
스릉.
그것을 본 네더만은 발작하듯 몸을 튕기며 다급히 소리쳤다.
“아,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