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제93화 커다랗게 울리는 (1)
달빛이 드는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기도하고 있는 알렌과 이리엘, 그리고 지부원들.
지금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신이란 신은 모두 끄집어내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진심 어린 기도를 마친 유리아가 눈을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무슨 신이 있었죠?”
“끙.”
하라브는 앓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좁혔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머릿속을 이 잡듯 뒤져 봐도 더 이상 끄집어낼 신이 없었다.
꽤 오랫동안 이어지는 침묵에 유리아는 하라브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돌아가신 거 아니죠?”
“아직 멀쩡하다 이것아!”
울컥한 하라브가 큰 소리를 내었다. 정정한 그 모습에 유리아가 헤헤거리고 웃었다. 이번에는 이리엘이 되살아난(?) 하라브에게 질문을 해 왔다.
“근데 이렇게 아무 신한테 기도해도 돼요? 여러 신한테 기도한다고 오히려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
“신들은 모두 자비로우시니 괜찮을 겁니다.”
하라브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태연한 척 굴었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벌써 2시간째 이어진 기도였으니…….
그는 헛기침하곤, 말을 이었다.
“큼큼, 이제 기도는 그만하는 게 좋겠습니다. 자, 너희들도 이제 다들 방으로 돌아가거라. 해가 뜰 때쯤 다시 일어나면 될 게다. 이렇게 앉아 있다가는 밤이 지나기 전에 허리가 아파 죽을 것 같으니.”
그는 끙, 하는 신음과 함께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젠장. 무릎도 아파 죽겠군.”
몸을 일으키니 무릎도 쑤셔 온다. 그는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천천히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리아가 그 옆을 부축하며 따랐고, 다른 이들 또한 모두 그 뒤를 따랐다.
이제는 신이 더 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알렌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이리엘은 그런 그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조용히 속삭였다.
“형님은 안 가요?”
“엉?”
알렌이 후릅, 침을 마시며 몸을 떨었다.
눈이 벌건 게 졸고 있던 게 분명하다.
“이제 그만 들어가요.”
“아, 그래야지. 기도 끝났어?”
“네. 대체 언제부터 잠들었던 거예요.”
“아니야! 나 안 잤어!”
알렌이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충혈된 눈으로 그리 말하니 참으로 믿음직스럽다.
“그럼 누구한테 기도하고 있었는데요?”
“나? 제네스 님한테.”
“…….”
이리엘은 황당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제네스의 무사 귀환을 제네스에게 기도하다니.
이래도 되는 건가?
“사실 기도라고 하기에는 뭐하고, 그냥 하고 싶은 말 좀 했어.”
“아아. 혹시 무슨 말 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별 얘기 안 했어. 이번에 돌아오면 다시는 의심하지 않을 테니 무사히 돌아오시라고, 뭐 그런.”
“아아.”
이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했다.
그는 기도하는 내내 잔 게 분명하다.
“밤이라 그런지 좀 쌀쌀하네? 어서 들어가자.”
후다닥 움직이는 알렌을 뒤따르던 이리엘은, 문득 뒤로 돌아 먼 허공을 응시했다.
저 너머에 총독부가 있었다.
그는 정말 혼자서 총독부를 뚫어 낼 수 있을까?
괜스레 의문이 들었다.
혹, 본인의 능력을 과신해서 잘못된 판단을 한 건 아닐까 하고.
제네스가 한 말은 언제나 현실이 되어 왔지만, 그렇기에 더 불안하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된 판단을 할 때가 있고, 실수를 할 때가 있다.
지금까지 그의 말이 모두 현실이 되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항상 그러리라는 법은 없었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그 또한 인간.
언젠가 과오를 범할 날이 올지 몰랐다.
적진 깊숙이 있는 그에게 한순간의 실수는 죽음과도 같다.
그래서 불안하다.
이번이 혹시 그때가 아닐까 하고.
전시가 아니기에 총독부의 경계 태세가 상대적으로 엄중하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총독부는 총독부.
과거 왕궁이었던 그 넓은 부지에 수많은 병력이 상주하고 있고, 강화 마법이 중첩된 성문은 기존의 성문보다 수배는 단단할 터였다.
총독부 심처에 있을 할렌트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런 문을 무려 다섯 개나 넘어야 한다.
그러니 더 불안할 수밖에.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발이나 동동 구르며 제네스가 언제나처럼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 * *
어떠한 조형물도 없이 단조롭게 이어지는 벽면.
천장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은은한 빛을 내는 수정구가 전부인 공간.
나는 길게 뻗은 비밀 통로를 달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다를 바 없는 경관 덕분에 제자리를 달리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지만, 나는 이 길의 끝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여기는 그대로네.’
많은 것이 달라진 왕성과 달리, 비밀 통로는 전생에 내가 알던 그대로였다.
그래서일까?
당시 이 길을 달리던 순간이 선명히 떠오른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명을 따라 억지로 발을 떼었었지.
그 복도를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금 달리고 있다.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저편에 사각의 공간 전체를 채운 푸른빛의 장막이 눈에 담겼다.
이 길의 끝이었다.
솨아-.
청량한 바람이 온몸을 훑는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일변했다.
나는 수풀로 뒤덮인 숲속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찌르르하고 우는 풀벌레 소리와 바람에 사각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귓가를 채운다.
눈앞에 드러난 풍경을 보니, 전생의 기억이 의지와 상관없이 눈앞을 스쳤다.
나는 이 숲에서 아이데할과 헤어졌다.
적들의 추격이 시작됐음을 알아차린 까닭이다.
그때는 제국군이 내 위치를 어떻게 알았나 싶었지만, 최측근인 할렌트가 변절했기에 가능했던 것이겠지.
일순, 아이데할의 목소리가 아른거린다.
-저하, 어떻게든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무겁기는요. 국새는 제가 잠시 맡아 두겠습니다.
-처우를 제게 맡기신다면 저는, 저하가 아닌 자에게는 결코 국새를 넘기지 않을 겁니다. 소인이 그것의 주인을 어찌 판단하겠습니까.
-저는 그저 품고만 있겠습니다. 그러니 꼭 옥체 보존하셔서 제게 오셔야 합니다.
나를 간절히 바라보던 그 눈빛이 떠올랐다.
그를 잊고 지낸 시간이 미안할 정도로 선명하게.
나는 가만히 그와의 기억을 바라보다가, 앞에 펼쳐진 녹음으로 시선을 옮겼다.
높게 자란 풀숲을 헤치고 간 흔적이 있었다.
내가 비밀 통로를 알고 있을 거라 몰랐을 테니, 추격은 아예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
녀석을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제 그가 진짜 코앞에 있었다.
파밧!
지면을 박차자, 서늘한 밤바람과 함께 풀숲이 뒤로 밀려갔다.
그리고 얼마 후.
타다다닥.
풀숲을 가로지르는 걸음 소리가 귓가에 잡혔다.
내 소리가 아니었다.
저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
드디어 녀석들의 뒤를 잡은 것이다.
걸음 소리를 들어 보니, 할렌트 외에도 인원이 셋이나 더 있었다.
녀석들의 진로를 파악한 나는, 옆으로 틀어 속도를 더욱 높였다.
녀석들을 빙 돌아 앞을 막기 위해서였다.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일그러지는 녀석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나아가는 걸음을 따라 스쳐 지나는 녹음.
나는 금세 녀석들을 앞질렀고, 방향을 틀어 그들을 마주해 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수록 적들의 기척이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드디어.
파앗!
풀잎이 흩어지며, 그들의 얼굴이 보였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귀신이라도 본 듯 헛숨을 들이켜는 호위 기사.
그 위로 백색 섬광이 떨어져 내렸다.
푸확!
가장 선두에 있던 자가 피를 뿜으며 풀숲을 나뒹굴었다.
녀석들은 다급히 걸음을 멈춘 채 앞을 막아선 나를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할렌트의 낯빛은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흔들리는 동공.
낭패한 침음성이 그의 입가에서 흩어졌다.
내가 보고 싶었던 그 표정이다.
나는 검을 내리그었던 자세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외숙부.
나는 자연스레 따라오는 뒷말을 삼켰다.
머리가 희끗해지고 주름이 늘었지만, 내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나를 아느냐?”
나는 그 물음은 무시한 채 그의 앞을 막아선 자들에게 말했다.
“한꺼번에 오거라.”
그토록 고대하던 만남.
일단 거추장스러운 것들부터 치워야겠지.
“이익, 건방진!”
“뒈져라!”
호위 기사로 보이는 두 녀석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나는 검을 쥔 손끝에 힘을 실어 그들을 마주했다.
촤악-!
하얗게 이지러진 섬광이 쇄도해 오던 이들의 몸뚱이를 단숨에 갈랐다.
장내는 찰나에 정리됐다.
어둠에 잠긴 숲에는 이제 나와 할렌트.
단둘만이 남아 있었다.
맥없이 쓰러지는 호위 기사들을 본 그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 원하는 게 무엇이냐?”
나는 죽음 앞에서 추하게 발버둥 치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이런 천박한 말들이 튀어나올 줄이야.
타락한 모습에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다.
“잘 생각해 보거라. 날 죽인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내가 죽어도 어차피 새로운 총독이 부임할 거라고. 차라리 내가 총독인 게 프렌치아 입장에서는 더 낫다는 말이다. 그러니 원하는 바를 말해 보거라. 내가 들어주마.”
혹시나 했는데, 녀석을 잠자코 지켜보니 확실히 알겠다.
“꽤나 열심히 달려왔거늘.”
나는 입가에 묻어 있는 헛웃음을 지우며 녀석을 싸늘히 바라보았다.
“너. 누구냐.”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이냐? 나는 총독, 할렌트 바레인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 들어줄 수 있음이야.”
나는 그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신기하게도 내가 알던 할렌트와 생김새가 똑같다. 심지어 목소리까지도.
하지만 녀석은 가짜다.
전생의 인연이기에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으나 나는 그것을 손쉽게 알았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0년도 전에 익스퍼트 최상급에 올랐다.
그런데 앞에 서 있는 놈은 잘 쳐 줘야 중급의 경지.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이자가 외숙부 노릇을 하며 지금까지 총독부를 이끌었거나.
아니면 진짜가 따로 있거나.
내 마음은 후자로 기울었다.
“진짜 할렌트는 어딨지?”
“지, 진짜라니?”
녀석이 짐짓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검의 경지를 떠나, 내가 아는 그는 저리 경박하고 가벼운 자가 아니었다.
진짜 할렌트였다면, 죽음이 앞에 있다 할지라도 저리 천박하게 굴지 않았을 거다.
“다 알고 있으니 말하라.”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이냐.”
나는 더 이상의 질문을 멈췄다.
말하지 않겠다는데 방도가 있나.
말하고 싶게끔 만들어 주는 수밖에.
“끄아아아악!”
적막이 깔린 숲에, 가짜 할렌트의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분근착골은 근육이 비틀어지며 뼈가 갈리는 고통을 주는 악랄한 수법.
녀석은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버티지 못하겠는지 내가 원하는 말을 비명처럼 뱉어 냈다.
“끄아아악. 소, 소해(小海)! 소해에 계시다!”
녀석의 말에, 나는 분근착골을 멈췄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몸을 움츠렸다.
소해? 소해라면…….
“나도 그것밖에 몰라! 끄윽.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고. 진심이다.”
녀석은 몸을 힘겹게 가누며 신음을 흘렸다. 그의 말을 온전히 믿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 질문을 바꿨다.
“그럼 네놈은 누구냐? 어떻게 할렌트와 똑같이 생긴 것이지?”
“그, 그건.”
녀석이 머뭇거리자 나는 다시 손을 들었다.
그는 질겁하며 말을 이었다.
“수술을 받았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나는 그냥, 가끔 총독 노릇을 하면 평생을 호화롭게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하여 그것에 응했을 뿐이라고.”
그는 마치 나 이외에 누군가가 본인의 말을 엿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되록되록 굴렸다. 거짓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꼭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내 기감에 기척은 잡히지 않았다.
그냥 불안한 듯했다.
“널 수술해 준 자의 얼굴을 알고 있나?”
“아니, 보지 못했다.”
“목소리는?”
“……그냥 듣기 싫었다. 쇠가 긁히는 듯한 목소리였지.”
수술을 했다길래 찔러 보았더니 역시 Dr. 주르하와도 연관된 듯하다.
그나저나 얼굴을 저 정도로 똑같이 만들 수 있다니.
죽었던 왕세자가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는지에 관한 의문이 풀린 듯하다.
그 또한 Dr. 주르하에게 수술을 받은 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말이 되니까.
“넌 언제부터 총독부에 있었지?”
“이번에 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자세한 건 나도 말할 수 없어. 여기까지가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입을 붕어처럼 벙긋거리더니 두 팔로 ‘X’ 자를 그리며 자신의 머리통을 가리킨다.
그러고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뭔가를 묘사하는데.
잘 모르겠다.
뭐하는 새끼지?
“네 머리통이 왜?”
“음음음!”
“더 이상 말을 못 하겠다고?”
“음음!”
“벌써 미친 거냐?”
내 말에 원하는 답이 없었는지 녀석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두드렸다.
내가 말했다.
“조금 전 네가 경험했던 게 분근착골이란 거다. 그새 그 고통을 까먹었나 보군.”
“아니, X발! 내 머리에 금제가 걸려 있다고!”
내가 다가가려고 하자, 사색에 질린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그래서 이 난리를 떨었던 거군.
“그럼 진즉 그렇게 말하지.”
내 말에, 녀석의 얼굴이 사색에 질려 갔다.
동시에 울룩불룩 꿀렁이기 시작하는 머리통.
마치 살아 있는 무언가가 녀석의 두개골을 뚫고 나오려는 듯 보였다.
그는 그것을 감지하고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매만졌다.
“아냐! 실수야! 난 말할 생각이 없었다고!”
그런 녀석의 눈, 귀, 입에서 빛줄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하더니,
“끄아아악!”
비명과 함께 펑 하고 터져 버렸다.
나는 그제야 녀석이 몸으로 설명했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머리통이 터진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던 거로군.
근데 그걸 그렇게밖에 못 하나?
어쨌거나 소해라면 제국의 동부와 프렌치아의 서부 사이에 놓인 작은 바다.
아무래도 진짜 할렌트는, 세자가 있는 이모텔섬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Dr. 주르하 또한 그 섬에 있을 수도.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바다로 모이고 있었다.
녀석을 당장에 베지 못한 것은 아쉬우나 어차피 가야 했던 길.
시간이 조금 밀린 것뿐이었다.
나는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가짜이기는 해도 일단 총독저에 있는 할렌트를 베었으니 소기의 목적은 이룬 셈.
이제 다시 총독부로 돌아가야 했다.
그곳에 아직 볼일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