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제92화 다섯 개의 성문 (3)
나는 앞을 막고 선 강철의 벽을 향해 쇄도해 갔다.
검을 쥔 손이 흐릿해지며 맹렬한 검기가 뻗어 나간다.
유성우처럼 쏘아지는 빛줄기에 캄캄한 밤이 갈라졌다.
녀석들은 그것을 가까이 밀착하는 것으로 방벽의 강도를 높여 막아섰다.
콰아아앙!
직선으로 뻗어진 검기가 철벽과 부딪치며 굉음이 일었다. 검날을 탄 반발력이 팔로 전해진다.
지잉-.
검이 파르르 떨며 진동하고 있었다. 베고자 했음에도 막힌 것은 간만이었다. 검기를 막아 낸 벽에서 옅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그들은 기존에 있던 자리에서 서너 걸음 밀려난 상태였고, 그 앞에 발로 긁어 낸 고랑이 남았지만 결국 나의 검을 막아 낸 것이다.
“철벽압착! 개진!”
지휘관의 호령을 따라 늘어선 벽이 살아 있는 듯 맹렬한 기세로 밀고 들어온다.
방패와 방패 사이의 틈에는 날카로운 창촉이 튀어나와 있었다. 방패로 공간을 장악하고 창으로 찌르는 식의 대형인 듯했다.
쿠구구구구.
나를 휘감아 오는 그들의 기세가 일대를 짓뭉개 온다.
움직임이 방해받을 정도로 상당한 압력.
살아 있는 것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강철벽이 먹잇감을 휘감으려는 이무기처럼 사납게 들이닥쳤다.
파밧!
나는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허공으로 뛰어올라 녀석들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내려섰다.
그러자 뒤편에 서 있던 2열이 기다렸다는 듯 밀고 들어왔다.
인원이 꽤 많았다.
열다섯 명씩 4열이니까, 총 60에 이른다.
총 네 개의 벽이 나를 포위하기 위해 일제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그 중심에 뛰어든 것이고.
콰과과과광!
사위로 뻗어간 검격이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벽을 두드리며 녀석들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들의 벽마저 가를 수는 없었다.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금까지 만난 특임대 중, 나를 상대하기에는 가장 좋은 전략이었다.
개인의 강함이 중점인 ‘초원의 들개’들은 합격술은 뛰어났지만 전력의 밀집 정도가 약했고, ‘로열나이트’들은 조직적이었으나 조별로 하나의 중심을 이루기에 각개격파가 가능했다.
하지만 ‘강철의 벽’은 마치 전체가 하나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에 방어 위주의 전술도 한몫을 더했다.
이들의 전력은 다 대 다 전투에서도 효율적이겠지만, 압도적인 개인을 압박하기에도 유용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전에 것들보다 까다로울 수밖에.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천령신공 검법편.
벽력의 장(章) 뇌정(雷霆).
칼날이 하얗게 이지러지는 순간, 푸른 뇌전이 들불처럼 사납게 일어났다.
콰자자자작!
사방으로 갈라지며 발광하는 낙뢰.
마치 벼락이 수평으로 들이치는 듯했다.
콰과과과과광!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뇌전의 검기가 공간을 찢어발겼다.
그것은 이무기의 비늘처럼 단단한 녀석들의 벽을 삽시간에 무너뜨리며 사위로 번져 갔다.
베기 번거롭기에 힘으로 짓눌러 버렸다.
구오오오오.
바닥에 중구난방으로 새겨진 깊은 고랑들이 혈관처럼 번져 있었다. 널브러진 시체들이 그 사이사이에 늘어져 핏물을 쏟아 냈다.
뇌전을 품은 검격은 찰나에 폭발하는 힘.
발광하는 푸른 불꽃을 우레와 같은 폭발음이 뒤따른 후에 맞이한 정경이 이러했다.
일대가 단번에 초토화된 것이다.
“…….”
뇌전이 휩쓸고 지나간 전열은 더 이상 벽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것은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고, 뇌전이 비껴가 살아남은 자들은 그 처참한 광경 속에 서 있었다.
그들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린다.
본인이 살아 있다는 것도,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도 모두 믿기지 않는 듯했다.
그런 이들에게 짤막하게 말했다.
“꽤 훌륭했다.”
강철벽을 허물기 위해 나도 힘 좀 써야 했다.
나는 그대로 살아남은 이들 사이를 걸었다.
의식이 반쯤 날아간 생존자들은 그런 나를 붙잡지 못했다.
저 멀리 성문이 보이고 있었다.
저것이 총독저와 내 사이에 놓인 마지막 성문이었다.
* * *
보좌관, 알스레도는 다급하게 할렌트를 채근했다.
“총독 각하!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적이 벌써 가까이 왔습니다!”
저 먼 곳에서부터 아스라이 울리던 굉음이 어느덧 코앞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할렌트는 성벽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뿌연 먼지구름을 보며 어금니를 까득 물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한 놈을 막지 못해 이 꼴이란 말이냐!”
“적의 움직임이 굉장히 빠릅니다. 보고가 닿을 때마다 하나의 성문을 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그를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알스레도가 침통하게 말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보고의 내용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그 일이 실제로 총독부에서 벌어지고 있음에도 믿기 어려울 지경.
정문부터 일 점 돌파해 오는 흰 사자의 행보는 현실성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나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보고되는 내용을 들어 보면 같은 인간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다섯 개의 방벽으로 이뤄진 총독부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인 양 무력하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가 지닌 무력이 살갗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정신을 다잡은 알스레도가 말했다.
“어서 움직이시지요. 일단 몸을 피하신 후에 후일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젠장. 가자!”
할렌트는 허리춤에 검을 차며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이대로 도망친다고 해도 결국 목이 떨어질 거 같지만, 어쩔 도리가 있나.
지금 자신이 가진 전력으로는 흰 사자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문책을 당하더라도 일단 피하는 게 맞았다.
‘빌어먹을!’
할렌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흰 사자가 이렇게 빨리 총독부를 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어느 미X놈이 단신으로 총독부를 쳐들어올 생각을 하겠는가.
그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서든 미리 몸을 빼냈을 터인데.
하지만 이제 와 후회는 늦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다급히 움직였다.
피신하기로 한 이상,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그자가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할지라도 지금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왕궁에 숨겨져 있는 비밀 통로로 이동하는 중에 할렌트는 생각에 잠겼다.
소드 마스터를 직접 본 일이 없어 그 전력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으나, 총독저에 도달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것들은 무수히 많았다.
강화 마법이 중첩된 다섯 개의 성문을 부수는 것만 해도 막대한 마력이 소모될 터였다.
거기에 앞을 막아 오는 수많은 기사와 트윈 오우거, 또 마법부에 남아 있던 마법사들.
그리고 특임대, 강철의 벽까지.
그것을 혼자서 그토록 단시간에 꿰뚫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이냔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특임대가 괜히 특임대인가.
비대칭 전력을 상대하기 위해 결성된 비대칭 전력이 바로 특임대였다.
그들의 전력이면 소드 마스터를 이기지는 못해도 물고 늘어질 정도는 되어야 했다.
흰 사자가 그들 앞에 섰을 때는 녀석의 체력과 마력이 이미 상당 부분 손실되어 있었을 테니까.
그것을 예상했기에 그들을 진즉에 내세우지 않고 마지막에 둔 것인데, 그것마저도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아무리 그가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강하다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을 따져 무엇 하겠는가.
이미 저지선은 모두 뚫렸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대로 죽는 건 그야말로 개죽음이 따로 없으니.
철컥.
이음새가 개방되는 소음과 함께 벽이 문처럼 열렸다.
이곳은 과거 왕만이 알고 있던 비밀 통로.
일단 여기까지 온 이상 녀석에게 잡힐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녀석이라도 이 비밀 통로는 발견할 수 없을 테니까.
그는 은은한 어둠 속으로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
* * *
나는 마지막 성문을 넘어 길을 걸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길목이 기다랗게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가 계시던 궁으로 가는 길.
많은 것이 달려졌고 건물의 외벽은 달라졌지만, 구조와 길목은 여전했다.
휘잉.
서늘한 밤바람이 머리칼을 쓸고 지나간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길을 천천히 음미하며 걸었다.
나의 걸음 위로 전생의 발걸음이 겹치는 듯했다.
나는 왕궁이 불타오르던 날에도 이 길을 걸었었다.
당시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던 소리들이 귓가로 들려왔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뒤섞인 고함과 비명.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폭발음과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
왕궁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전장의 소리로 가득했다.
나는 그 소리를 떠올리며 침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궁인들과 기사들의 표정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이 길의 끝에서 만났던 아버지의 얼굴도.
-두려워하지 말거라.
아버지는 프렌치아의 패망 앞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고 계셨다.
-너는 왕세자이니라.
그는 끝까지 나라의 왕으로 죽고자 했다.
-그러니, 죽음 앞에서도 그 위엄을 잃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우리는 이 나라의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죽음은 프렌치아 왕가를 상징하는 죽음이 될 것이야.
아버지는 씁쓸하게 웃으며 안타까움이 담긴 눈빛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이 프렌치아의 마지막이라면. 기왕 멋들어지게 보내 주자꾸나.
그때는 몰랐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아버지의 그 말이 더욱 깊게 가슴을 울린다.
지금껏 수많은 죽음을 봐 온 나는,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의 죽음은 아직 이르다.
나는 앞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서서히 눈을 떴다.
-이곳은 나의 마지막이지, 너의 마지막이 아니야.
눈앞에는 아버지와 기사들이 있던 왕궁 대신 낯선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살아남거라. 살아남는다면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자연스레 알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기억하거라.
그럼에도 여전히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들려왔다.
-앞으로 네가 하게 될 선택은 모두 옳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든 네 뜻을 따르면 되느니라.
아버지의 말에는 나라에 대한 걱정과 자식에 대한 염려가 함께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말뜻을, 그 깊은 사랑을 우습게도 이제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내 주변으로 검을 쥔 병사들이 빼곡했다.
그들은 내게 거리를 두고 검을 겨눌 뿐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겁에 질린 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총독저 앞에 선 나는 힘껏 소리쳤다.
“할렌트 바레인-!!”
막대한 내력을 품은 음파가 투명하게 번졌다.
파스슥.
그 파동에 닿은 건물 외벽에 옅은 균열이 일며, 돌출되거나 약한 부분들이 부서져 내렸다.
주변에 서 있던 병사들은 모두 귀를 막으며 주저앉았다.
사자후의 요령으로 뱉은 소리였다.
그에게 닿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총독저는 고요했다.
“할렌트는 어딨지?”
나의 물음에 대령의 계급을 단 이가 떨리는 검을 겨누며 호통했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검을 그었다.
피슛!
녀석의 목이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그 순간 병사들은 검을 쥔 손을 늘어뜨렸다.
압도적인 격차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검을 쥐고 있을 뿐 싸울 의지를 가진 이가 없었다.
나는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앞을 막고 있던 이들은 좌우로 갈라지며 알아서 길을 비켰다.
감각을 키워 훑은 내부는 조용했다.
할렌트는 도망간 게 틀림없었다.
대체 어디까지 나락으로 떨어진 거냐.
허망했다.
할렌트 바레인.
한때 나의 외숙부였던 그자는, 프렌치아에서 손꼽히던 기사였다.
바레인 가문을 이어받기 전에는 레오니랜서 소속의 기사를 지냈을 정도로 무력이 출중했고, 내가 어렸을 적 이미 익스퍼트 최상급에 올라 있었다.
나는 기사의 마음가짐과 기초 검술을 그에게 배웠다.
때문에 그가 기사로서 가진 신념을 알았고 그가 내린 가르침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해서 나는 적어도 그가 도망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도망쳤다.
내가 알고 있던 그가 맞는가 싶을 정도.
나는 할렌트가 이용했을 비밀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가 뒤쫓을 걸 알았을 테니 그 길을 이용했을 게 빤했다.
구조는 조금 달라졌지만, 비밀 통로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생의 나 또한 그곳을 통해 왕궁을 벗어났으니까.
철컥.
이음새가 개방되는 소리와 함께, 벽이 문이 되어 열렸다.
기다랗게 뻗어진 복도.
천장에 간헐적으로 틀어박혀 있는 수정구에서 은은한 빛 무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조금 전 누군가 이곳을 이용했다는 걸 손쉽게 알 수 있었다.
아마 이 길의 끝에 총독, 할렌트 바레인이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