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제91화 다섯 개의 성문 (2)
나는 어느새 세 번째 성문 앞에 서 있었다.
이곳에는 기존의 성문과 달리 양옆으로 거대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체고가 4M쯤 되어 보이는 오우거 조각상.
크고 단단한 근육으로 이뤄진 파괴적인 육체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허공을 응시하던 오우거의 눈동자에서 휘황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온 건 그때였다.
동시에 무언가 거칠게 갈리며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그그그극.
조각상의 관절 마디마디에서 뿌연 분진과 함께 잿빛의 돌가루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예상하고 있던 움직임이었다.
조각상치고 그 안에 담긴 마력이 상당했기에.
쿠구구구궁.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굳은 관절을 푸는 녀석들.
그럴 때마다 갈라진 조각의 겉면이 떨어져 내리며 그 안에 담겨 있던 본체가 마치 허물을 벗듯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고동색의 질긴 가죽이 생기를 찾기 시작한다.
저것은 조각상이 아니라 오우거를 가드로 사용하기 위해 봉인해 둔 최상위 보안 마법이었다.
쿵!
묵직한 발걸음이 바닥에 내리자 땅이 옅게 진동했다.
“쿠아아앙!”
완전히 깨어난 녀석들의 포효에 일대의 기류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일어선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막강한 살기.
웬만한 이들은 근방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 힘이 풀려 버렸을 것이다.
“크르르르.”
전투 태세를 마친 녀석들이 스치기만 해도 즉사할 것 같은 커다란 몽둥이를 쥔 채, 나를 노려보았다.
전신을 두른 갑옷 같은 근육이 사납게 꿈틀거렸고, 시뻘건 눈동자에서는 마주한 것만으로도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거대한 조각상이 잠깐의 순간, 실체의 오우거가 되어 내 앞에 있었다.
나를 적으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이 정도면 한 마리당 익스퍼트 상급 정도의 무력을 가진 듯한데, 질긴 가죽과 무지막지한 근력을 생각하면 어떤 면에서는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부와앙!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손짓에, 기둥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몽둥이가 떨어져 내린다.
콰아아앙!
묵직한 굉음과 함께 지반이 감자처럼 으깨지며 땅이 뒤집혔고 토사가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
저런 것을 정면으로 맞았다가는 시체 쪼가리도 남기지 못하고 짓이겨질 터였다.
부와앙!
하나의 몽둥이를 피해 내기 무섭게 또 하나가 날아들었다.
육중한 덩치에 비해 그 움직임이 유연하고 쾌속하다. 신체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콰과과과!
내가 있던 자리를 수평으로 쓸고 지나가는 몽둥이.
나는 그것을 피해 녀석의 머리통 높이까지 솟구쳐 있었다.
놈의 시선이 그런 나를 따라 들려졌지만, 이미 늦었다.
시원하게 뻗어진 발길질이 녀석의 안면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콰아앙!
바위가 부서지는 듯한 충격음과 함께 녀석의 거체가 뒤집히며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커다란 몸뚱이가 그 궤도 앞에 놓인 구조물들을 사정없이 짓뭉개버린다.
부와앙!
지면에 내리기 무섭게 날아오는 또 하나의 몽둥이.
나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그것을 피했다.
콰앙!
애먼 땅을 부순 몽둥이는, 재빨리 회수되어 다시금 내 위로 떨어져 내렸다.
짙은 그늘이 발밑에 드리운다.
같은 상황이 창졸간에 수차례 반복됐다.
마치 두더지를 잡듯 몽둥이를 내려치는 녀석.
쾅! 쾅! 쾅! 쾅!
망치질하듯 떨어지는 공격에 흙더미가 곳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나는 그것들을 여유롭게 피해 낸 뒤, 녀석의 가슴팍을 향해 발을 굴렀다.
안개처럼 흩어진 신형이 놈의 정면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나는 놈의 흉부에 활짝 편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척.
단단하고 거친 녀석의 표피가 손에 감겼다.
나는 맞닿은 손바닥을 통해 소용돌이치는 내력을 놈의 몸뚱이 안으로 단숨에 밀어 넣었다.
상대의 내부를 단숨에 파쇄해 버리는, 가히 극의에 이른 침투경이었다.
퍼어어어엉!
천지가 뒤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투명한 충격파가 오우거의 등 뒤에서 터져 나갔다. 그 여파로 뒤편의 구조물들까지 모조리 쓸려 버린다.
오우거는 그 한 방에 입가에서 검은 피를 쏟아 내며 맥없이 쓰러졌다.
쿵! 쿵!
뒤편에서는 조금 전 날려 보냈던 녀석이 성난 콧김을 뿜어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뒤를 보지도 않고 자세를 낮추자 몽둥이가 머리 위를 휩쓸고 지나간다.
그것에 일어난 바람이 머리칼과 옷깃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나는 낮은 자세에서 뒤로 도는 동시에 녀석의 품속으로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척.
활짝 편 손바닥이 오우거의 복부에 닿았다.
퍼어어어엉!
동시에 다시 한번 북이 찢어지는 굉음이 일었다.
오우거는 그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것들의 사체는 겉으로 봤을 때 멀쩡해 보였지만, 내장 기관은 폭풍이라도 휘몰아친 것처럼 갈가리 찢겨 있을 터였다.
목을 베어도 죽을 녀석들을 이리 번거롭게 죽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오우거의 질긴 가죽은 물리적인 방어력도 뛰어나지만, 오러와 마법에 대한 저항력 또한 뛰어났다.
방패로 써먹기에는 안성맞춤인 셈이다.
* * *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곧 온다!”
“전열 흩트리지 말고!”
고함을 지르며 분주하게 자리를 잡는 인원들.
전쟁을 겪은 마법사가 몇 없다 보니 전열을 구축하기가 쉽지 않았다.
“됐다! 이대로 대기한다!”
성문과 거리를 둔 마법사들은 성문을 넘어올 흰 사자를 기다리며 도열해 있었다.
적을 감싸 안는 아치 형태의 전열을 구축한 이들은, 마법을 집중 투하하기 위한 준비를 지금 막 끝낸 상태였다.
캐스팅을 마친 마법사들이 긴장한 낯빛으로 성문만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성문 바로 너머에서 굉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세 번째 성문의 가드인 트윈 오우거와 흰 사자가 전투 중인 듯했다.
“꿀꺽.”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선명히 들릴 정도로 고요한 적막이 이어졌다.
그만큼 이들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총독부 내에서 이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 줄은, 조금 전 흰 사자의 침입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리기 전까지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퍼어어어엉!
공기가 터져 나가는 듯한 굉음이 성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어느덧 잦아드는 소음.
관자놀이에 맺힌 식은땀이 턱 끝까지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우레와 같은 폭발음과 함께 성문이 터져 나간 것은.
콰아아아앙!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돌풍이 성문의 잔해와 분진을 싣고 불어닥쳤다.
한차례 거세게 휘몰아치는 모래폭풍.
잠시 눈을 가렸던 팔을 치워 내니, 성문 쪽에서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분진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그림자.
“지금이다! 방출하라!”
지휘관의 고함과 동시에 마법사들의 손끝에서 일제히 공격 마법이 사출되기 시작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각양각색의 마법들.
거센 불길이 공기를 태워 삼키고, 냉기를 품은 얼음 가시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타오르며 갈라진 뇌전과 날카롭게 선 바람의 칼날들이 사위를 헤집는다.
다양한 원소의 공격 마법이 한 점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후폭풍은 그야말로 장대했다.
콰과과과과광!
재해와 다름없는 강맹한 폭발이 일대를 휩쓸었다. 주변의 지형이 완전히 뒤바뀔 정도의 막강한 폭발.
쉬이이이이.
마법이 뒤섞이며 발생한 증기와 먼지에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소강상태.
짧은 순간에 마력을 쏟아 낸 마법사들의 거친 호흡만이 장내를 울리고 있었다.
“…….”
점차 뿌연 안개가 걷히며 드러나는 현황.
피해가 덜한 외곽의 지형만 보더라도 그 중심에 있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살아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뿌옇게 내려앉은 구름 속에서 거뭇한 그림자가 날아온 건 그때였다.
철퍼덕.
밖으로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진 것은 완전히 짓이겨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였다.
하지만 그 거대한 크기만으로도 마법사들은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불안한 직감.
솨아아아.
그것을 증명하듯 먼지를 가르며 쏘아지는 신형이 있었다.
“노, 놈이 살아 있다! 막았!”
다급하게 고함을 질러 보았지만, 이미 흰 사자는 마법사들이 어떤 대응을 하기도 전에 그들의 전열 앞에 도달해 있었다.
이내 그 뒤를 따르는 기다란 푸른 궤적.
피슈슈슛!
핏물이 동시다발적으로 너른 반경에서 솟구쳤다.
반원을 그리는 궤적 위에 놓여 있던 마법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으아아-!”
그 후로 이어지는 혼란.
마법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도망쳤고, 그들의 등을 청색의 섬광이 꿰뚫었다.
일대를 찰나에 휩쓸어 버리는 검격.
뒤편에 물러서 있던 기사들이 달려와 지원을 해 왔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시금, 학살의 시간이 이어졌다.
* * *
콰과과과광!
사방으로 내달리는 검기.
나는 지금까지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오우거의 시체를 방패막이로 쓴 덕분에 놈들의 마법을 손쉽게 방어해 낼 수 있었다.
그들이 이 너머에 있을 것을 예상한 탓이다.
세 번째 성문 너머에 마법부가 존재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적의 작전은 예상대로였다.
마법은 대규모 전장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대인전에는 쥐약이나 다름없다.
캐스팅 시간도 길거니와, 기사의 빠른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까닭.
하지만 공격 범위와 파괴력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오우거의 신체만으로는 그들의 마법을 온전히 막아 낼 수 없었기에, 나는 막대한 내력을 둘러 오우거의 몸에 호신강기까지 둘러야 했다.
그 때문에 내력 손실은 컸지만, 덕분에 마법사들의 목을 손쉽게 베어 낼 수 있었다.
“후.”
잠시 걸음을 멈춘 나는, 숨을 길게 뱉으며 호흡을 정리했다.
내 앞에 어느새 네 번째 성문이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것을 부쉈다.
콰아아아앙!
강제로 개방된 성문 안으로 발을 디디자 또 하나의 성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벽이라 해도 무방한 것들이 놓여 있었다.
그들에게서 전해지는 압박감이 그랬다.
막강한 투기가 공간 전체를 단절시킨다.
마치 눈앞에 거대한 벽을 둔 기분.
이들이 바로 총독부의 방패이자 또 하나의 성문이라 불리는 특임대, ‘강철의 벽’.
그 중심에 선 자가 입을 열었다.
“이 이상은 넘어갈 수 없다.”
각진 턱과 땅땅하게 뭉친 단단한 기도에서 강인함이 전해져 왔다.
나는 내 앞에 늘어선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중갑으로 무장한 채, 한 손에는 커다란 방패와 한 손에는 작살 같은 단창을 쥔 기사들.
“강철벽, 개진!”
사내의 말에 기사들은 방패를 앞에 세우며 기다란 강철의 벽을 만들어 내었다.
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는 좀 흥미롭군.”
지금까지 지나쳐 온 성벽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벽이었지만, 내게는 이제껏 마주했던 성벽보다 훨씬 높고 단단하게 다가왔다.
쉽게 벨 수 있는 강도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마음은 없었다.
녀석들 너머에는 마지막 성문이 있었고, 그 뒤가 바로 총독저니까.
할렌트가 이제 목전에 있음이다.
나는 검병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날 잠깐이라도 저지하고 싶다면.”
칼날처럼 일어난 기세가 묵직한 대기를 가른다.
“전력을 다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