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제89화 마그네트 지부 (5)
손톱달이 작은 정원을 굽어보았다.
은은한 빛에 드러나는 웅크린 그림자.
이리엘은 그 옆으로 다가가 풀썩 주저앉았다.
“날이 선선하니 좋은데?”
“……그러네요.”
무릎에 턱을 괴고 있던 유리아가 힘없이 답했다.
그러고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아까는 제가 좀 예의가 없었죠.”
“에? 아니야. 제국 새끼들 욕하는데 차릴 예의가 어딨어.”
이리엘은 손사래까지 치며 말했다.
감정 표현이 격하기는 했지만, 문제될 만한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개자식들을 욕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라브가 그녀를 내보낸 이유는 격해진 감정을 가라앉히라는 의미지, 그녀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었다.
유리아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부모님이 그것 때문에 돌아가셨거든요.”
“……아아, 그랬었구나.”
조금 전 하라브에게 들었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했다.
“뭐, 지금은 괜찮아요. 잊은 건 아니지만 익숙해졌거든요.”
“그 마음 알아. 나도 부모님을 제국 놈들에게 잃었거든.”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슬프게 웃었다.
서로의 감정을 누구보다 공감하는 탓이다.
제국과 합병된 지도 어느덧 10년.
프렌치아 사람들은 즐겁고 행복한 일을 나누는 것만큼, 슬픔과 고통을 나누는 것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그것들이 삶에 만연했기에.
“하, 이번에 정말 할렌트가 뒈졌으면 좋겠어요.”
유리아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하소연을 했다. 이리엘은 그런 그녀를 보며 씩 웃었다.
“그렇게 될 거야. 그 인간, 아니 제네스 님의 말은 언제나 현실이 되거든.”
“칫. 부러워요.”
“응? 뭐가?”
유리아는 이리엘을 보며 볼을 부풀렸다.
“제네스 님한테 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거요.”
“너도 며칠만 더 지나면 할 수 있을걸. 성격이 그 모양이잖니. 사람을 얼마나 갈궈 댄다고.”
“그래도 전 멋지기만 한걸요. 완전 제 스타일이에요.”
“……그래?”
“네! 엄청 시크하시잖아요. 저는 그런 남자 좋아하거든요.”
“그, 그렇구나.”
유리아는 신이 났는지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긴 것부터 믿음이 확, 가잖아요.”
이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그와의 첫 만남에서 오히려 그 얼굴 때문에 믿음이 가지 않았던 까닭이다.
가진 무력에 비해 너무 젊으니까.
“잘생긴 게 최고죠.”
아…….
이리엘은 그제야 유리아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얘 그냥 잘생긴 사람 좋아하네.’
“언니는 좋겠어요. 예뻐서.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응? 그 정도는 아닌데. 하하.”
이리엘은 민망함에 볼을 긁적였다.
자신이 예쁘기는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너도 엄청 예뻐. 귀엽고. 성인이 되면 분명 더 예뻐질 거야.”
“아녜요. 제네스 님을 꼬시려면 이 정도로는 부족해요. 휴. 제가 언니 얼굴이었으면 제네스 님, 바로 꼬셨을 거 같은데.”
“진짜? 어떻게?”
이리엘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하자, 유리아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연적을 경계하는 듯한 그 태도에, 이리엘을 허겁지겁 변명을 이어 갔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그냥 네가 너무 자신 있게 말하길래 남자를 유혹하는 비법이라도 따로 있나 해서. 정확히 그 부분이 궁금했던 거지.”
“물론 남자를 유혹하는 저만의 필살기가 있기는 있죠.”
“그게 뭔데?”
“남자 별거 없어요. 남자는 다 애교에 약하거든요.”
“애교?”
“네. 그냥 말끝마다 ‘용’ 자만 붙이면 다 넘어오게 돼 있어요.”
“…….”
“예를 들면 안녕하세용, 이거 드실래용? 다음에 봐용, 뭐 이런 식으로요. 아직 제네스 님한테는 심장이 떨려서 못 쓰고 있지만, 효과는 직빵이라고요.”
……남자들이 이런 거에 넘어온다고?
전혀 신뢰가 가지는 않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해서 넘어온 사람이 있어?”
“그럼요! 제가 또래 사이에서는 인기가 얼마나 많다고요!”
그녀의 또래라면 고작 열여섯 살 정도 되는 핏덩이들.
반면, 제네스의 나이는 정확히 몰라도 20대 후반쯤.
이런 방법이 통할 리가.
아니, 그것을 떠나 열여섯 살한테도 통할까?
“정말 확실해요!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꼭 써 보세요. 알겠죠?”
“아아, 응. 고마워.”
이리엘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애한테 뭘 배우려고 한 건지…….’
그래도 다시 이전의 활기를 되찾은 유리아를 보니, 위로해 주려 했던 목적은 달성한 듯하다.
* * *
저녁 식사를 함께한 지도 어느덧 4일이 지났다.
그날 오후, 하라브가 기다리던 소식을 가지고 왔다.
“현재, 할렌트는 총독저에 머물고 있다고 하네. 은밀히 알아보느라 꽤 걸렸네만,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 확인한 정보이니 확실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독의 위치는 기밀이라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 빠르게 일 처리가 됐다.
“그리고 여기. 저번에 자네가 따로 부탁했던 걸세.”
그는 내게 기다란 철제봉을 건네주었다. 한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두껍고, 세우면 내 가슴팍까지 올 정도로 길었다.
“시간을 맞추느라 혼났네. 워낙 크기가 커 가지고.”
“수고하셨습니다.”
“뭘, 이 정도 갖고 수고는. 진짜 어려운 일은 모두 자네가 할 텐데. 그럼 언제 움직일 것인가.”
“오늘 밤에 움직일 생각입니다.”
“오늘 말인가?”
하라브는 숨을 삼키며 나를 바라보았다.
“시간을 끌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그렇기는 하네만.”
그는 흐리멍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지만, 내게 마음의 준비나 별도의 계획을 구상할 시간은 따로 필요치 않았다.
총독부 정문으로 들어가, 할렌트의 목을 베고 나온다.
그것이 내 계획의 전부였으니까.
“전에 말했듯, 총독저에 닿기 위해서는 다섯 개의 성문을 통과해야 하네.”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모를 리 없었다.
왕성의 입구부터, 현 총독저이자 과거 아버지가 거처하던 ‘레아노트궁’에 닿기 위해서는 다섯 개의 거대한 성문을 넘어야 한다.
성벽을 은밀히 넘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무리 나라도 여기서만큼은 불가능하다.
총독부에는 대인용 보안마법이 아닌 경계와 수성 위주의 보안마법이 설치되어 있을 터.
겹겹이 쌓인 보안 마법을 은밀히 넘을 수는 없다.
그러니 어차피 발각될 거 쥐새끼처럼 구느니, 정면 돌파를 하는 게 낫다.
물론 나이기에 가능한 선택지였다.
“혹시 더 필요한 것은 없는가?”
“예.”
나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문을 나섰다.
밤이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적들의 본거지를 뚫어야 하는 만큼, 성가신 싸움이 될 거다.
위협적이지는 않아도, 번거롭기는 할 터.
그 전까지 운공이나 하고 있어야지.
그렇게 방에 도착하여 좌선하고 눈을 감으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들어와.”
소심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유리아였다.
“혹시 제가 방해된 건가요?”
“그래.”
“앗, 죄, 죄송합니다.”
“됐고, 무슨 일이냐.”
“아 그게, 제네스 님께서 언제 출발하실지 몰라서 혹시 못 드릴까 봐 지금 왔어요…….”
쭈뼛거리며 뒤에 숨겨 두었던 손을 꺼내는 유리아.
그 작은 손에는 조그만 팔찌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뭔데.”
내 물음에 그녀는 내게 쪼르르 달려와서 팔찌를 건네주었다. 색색의 실을 꼬아 만든 실 팔찌였다.
“이게 행운의 팔찌인데요, 드리려고 한번 만들어 봤어요.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기도하면서 만들었거든요. 그러니 분명 제네스 님께 행운을 가져다줄 거예요.”
나는 별말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유리아가 두 손을 모으며 눈을 반짝였다.
“채워 드릴까요?”
나는 답을 하는 대신 문 쪽으로 턱짓을 했다.
“아, 네. 그럼 쉬세요.”
유리아는 아쉽다는 듯 방을 나섰다.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알록달록한 팔찌였지만 손목에 찼다.
요새 눈 밑이 퀭하더니만.
이것을 만들기 위해 들어간 정성을 모르지 않았다.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차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시 눈을 감기 무섭게 복도 위로 경박한 걸음이 담겼다.
타다다닥.
걸음 소리를 들어보니 알렌이 분명하고, 이 정도의 다급함이 담겼다면.
벌컥!
“제네스 님!”
빡!
“끄악!”
나는 녀석이 문을 열자마자 가차 없이 꿀밤을 갈겼다.
이놈은 대체 얼마나 더 맞아야 노크하는 법을 배우려나.
이쯤 되면 그냥 머리로 때우려는가 싶다.
“뭔데 호들갑이냐.”
“끄응, 오늘 저녁에 총독부에 가신다면서요.”
“그런데.”
“네? 아, 그게 맞나 해서요.”
“그래. 오늘 밤에 갈 거다.”
“바로 괜찮으시겠어요? 하라브 씨가 오늘 정보를 드렸다던데.”
“오늘이고 내일이고 뭐가 달라지겠냐.”
“역시, 제네스 님! 제가 믿고 있습니다. 무탈하게 다녀오셔서 어떻게 할렌트를 베었는지 꼭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셔야 합니다!”
“고작 그 말을 하러 그리 뛰어온 거냐?”
“하하. 그냥 괜히 지금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녀석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믿는 척 굴고 있지만, 또 나를 향한 믿음에 마귀가 낀 게 분명하다.
“오늘 밤에 간다구요?”
알렌의 뒤편에서 이리엘이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준비는 따로 할 거 없어요?”
“내가 언제 그런 거 하든?”
“……뭐, 그렇기는 하네요. 다치지 말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이제 둘 다 나가.”
“안 심심하시겠어요?”
알렌의 물음에, 나는 눈을 치켜떴다.
“심심하겠냐?”
“히히. 농담이었습니다.”
실실거리는 녀석을 보니 심사가 절로 꼬인다.
하여간.
꼭 매를 벌지.
빡!
“끄악!”
* * *
어둠이 짙게 깔린 캄캄한 밤.
밖으로 나오니 작은 마당에 알렌과 이리엘부터 지부원들까지 모두 모여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꼴을 보니 이러고 있은 지도 꽤 된 거 같은데.
“뭐 하냐?”
“아, 이제 가시게요?”
알렌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그런 그를 따라 다들 몸을 일으켰다. 유리아가 내 앞으로 후다닥 달려와 말했다.
“저희는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제네스 님이 오실 때까지 기도하기로 했어요!”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옆에서 한마디씩 거드는 녀석들.
“그럼 조심히 다녀오게.”
하라브까지 나서서 배웅을 했다.
나는 별말 없이 하라브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대문을 나섰다.
기다란 철제봉을 등에 사선으로 맨 채였다.
걷는 길, 품에서 꺼낸 흰 사자 가면을 얼굴 위에 얹었다.
준비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어둠에 잠긴 도시를 향해 발을 굴렀다.
쏜살같이 흘러가는 주변의 풍경들.
서늘한 밤바람이 전신을 세차게 흔들어 온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어느새 총독부의 거대한 정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