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제88화 마그네트 지부 (4)
테나스타 광장 중심에 높이 솟은 시계탑.
내가 처형당했던 자리 위에 새로이 세워진 것이었다.
“저리 가 보자.”
나는 이리엘을 끌었다.
시계탑이 가까워지는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나였지만, 죽는 순간의 선명한 기억은 내게 그때의 순간을 다시금 기억하게 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정경과 꾀죄죄한 몰골로 나를 바라보던 국민들이 선연히 떠오른다.
동시에 그날의 비감과 원통함이 어제 일처럼 생생해진다.
당시 나는 제국군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이끌려 짐승처럼 이 거리를 걸었었다.
나는 지금 그 거리를 다시금 걷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생의 내가 죽었던 자리에 섰다.
“이곳이다.”
“아-.”
이리엘이 짧게 탄성을 뱉었다.
내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 터였다.
테나스타 광장에서 왕세자가 처형당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으니.
그녀는 슬픈 눈으로 시계탑을 올려보았다.
“……여기였구나.”
“그가 죽기 전 보았던 풍경을 보고 싶으냐?”
“네?”
이리엘이 나를 보며 반문했다.
“나는 보고 싶다.”
나는 이리엘을 공주님처럼 안아 들었다.
“뭐, 뭐예요!”
당황한 이리엘이 눈을 빠질 것처럼 휘둥그레 뜨며 얼굴을 붉혔다.
“잠시.”
무릎을 굽히며 발끝에 힘을 실은 나는, 그대로 지면을 박찼다.
파밧!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고, 나의 신형은 그것을 가르며 수직으로 치솟았다. 이리엘의 짧은 비명은 사나운 바람에 집어삼켜졌다.
나는 시계탑의 벽면을 박차며 상층부에 아치형으로 뚫려 있는 종루 안에 내려섰다.
동, 서, 남, 북. 사면이 뚫려 있는 이곳 중앙에는 커다란 종이 매여 있었다.
나는 이리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높기는 한데. 여기가 그나마 비슷할 거다.”
광장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도, 도시의 풍경도.
그리고 쭉 뻗은 대로 끝에 있는 왕성도.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때와 달리 깔끔히 수복된 도시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서 휘날리고 있는 제국의 국기를 바라보았다.
본래는 남색 바탕의 포효하는 레오니랜서가 그려진 프렌치아의 국기가 있던 자리다.
“…….”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않고 그 정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도 무수한 생각들이 교차하는 듯했다.
무겁게 내린 침묵을 깬 건 이리엘이었다.
“저기 있겠죠? 할렌트 바레인.”
그녀는 이제 총독부가 된 왕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겠지.”
실제로 그가 총독저에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였다.
그는 총독부의 정점이니까.
“새삼스럽지만, 가능하겠어요?”
“물론.”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이리엘이 힘없이 웃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독립을 향한 첫걸음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제 조만간 마주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때.
녀석의 목은 땅바닥을 구르게 될 거다.
뒤편에서 마력의 파동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우웅.
화들짝 놀란 이리엘은 몸을 움찔하며 내게 바싹 붙어 왔다.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당목(撞木)에 새겨진 마법진이 푸른빛을 발광하고 있었다.
스윽.
당목이 마치 누군가가 잡아당긴 듯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종의 겉면을 때리며 커다란 울림을 만들어 냈다.
댕-!
예상됐던 종소리에 나는 기막을 둘러 소리를 줄였다. 커다란 소리의 파동이 상공에서부터 번져 가고 있었다.
댕-!
당목은 느릿한 박자로 계속해서 종을 쳐 댔다.
무슨 의미지?
적어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상해요.”
이리엘의 말에, 나는 그녀를 따라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각자의 길을 가고 있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춘 채 일제히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에 나와 있는 이들뿐만이 아니라, 건물 안에 있던 이들도 창을 열거나 발코니로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왼쪽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공경의 뜻을 품은 경례였다.
그들은 모두 총독부를 향해 서 있었다.
정확히는 총독부 상공에서 펄럭이고 있는 제국의 국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광장 근처에 있는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종소리는 저편에서도 들려오고 있었다.
마그네트 동, 서, 남, 북에 세워진 시계탑에서 동시에 종이 울리고 있는 거다.
즉, 수도에 있는 모두가 제국의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는 의미.
댕-!
종이 울리는 내내 마그네트의 시간은 마치 멈춰 버린 듯했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종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못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상황은 무려 1분가량 계속됐고, 사람들은 종소리가 완전히 멈추고 난 뒤에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되살아나는 광장의 소음.
꼭, 시간이 멈췄다가 다시 흐르는 듯했다.
* * *
“아니, 나만 빼고 두 사람만 어디를 다녀온 겁니까!”
지부로 돌아오자마자, 알렌이 불같이 성을 내며 우리를 반겼다.
“광장에 다녀왔다.”
“저만 빼놓고 다녀오시다뇨!”
“알렌 형님이 안 일어났잖아요.”
“아, 깨웠었어?”
“그, 그럼요.”
이리엘이 석연찮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도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그냥 나왔죠, 뭐.”
“아, 그래?”
딱 봐도 애초에 깨우지 않았던 거 같은데, 단순한 알렌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넘어갔다. 이리엘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어제 이야기는 잘했어요?”
“아, 물론이지. 제네스 님의 활약상을 지부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전해 주었다고. 다들 아주 제네스 님께 푹 빠져 있다니까.”
“역시! 저는 프렌치아에 형님을 뛰어넘는 이야기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움하하! 아직 그 정도는 아닌데.”
알렌은 이리엘의 칭찬에 박장대소를 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리엘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던 녀석은, 불현듯 무언가 기억났는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참. 제네스 님. 지부장님이 이따 저녁 식사 다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물어볼 것도, 부탁할 것도 있던 참이다.
.
.
.
해가 떨어지고 시작된 저녁 식사.
식탁 위로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하라브의 아침’의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포그렛의 솜씨일세. 요리 하나는 기막히게 잘하니 입맛에 맞을 게야. 아마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걸. 물론 그 하나는 나일 테니 자네들은 걱정 없이 들게.”
하라브의 칭찬에, 포그렛이 환히 웃으며 말을 보탰다.
“하하. 제네스 님을 위해 특별히 공을 더 들였습니다. 물론, 알렌 씨와 이리엘 씨를 위해서도요.”
과연 하라브의 말대로 그의 요리 솜씨는 훌륭했다.
그가 진심을 다해 요리했듯, 우리 또한 음식을 향해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음식은 언제나 진심으로 대해야 하는 법이다.
분위기가 대충 무르익자, 하라브가 말문을 떼었다.
“오늘 광장에 나갔었다고 들었네.”
“네. 뭡니까, 그거.”
안 그래도 나도 묻고 싶은 게 있던 참이다.
오늘 낮에 봤던 그 광경.
딱 봐도 하루 이틀 해 온 일이 아니었다.
하라브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매주 있는 행사지.”
“매주요?”
이리엘이 목소리를 높이며 되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매주 금요일 1시가 되면 종이 울리지요. 항상 정해진 시간에 울리기에 그 시간은 화장실 가는 것조차 용납이 안 됩니다. 집 안에 있는 이들도, 급한 용무가 있는 이들도 모두 예외 없이 국기를 향해 경례해야 하죠.”
“개쓰레기 같은 새끼들.”
갑작스레 들려온 욕설의 주인공은 유리아였다.
항상 살갑게 웃던 소녀는 살기 어린 눈빛을 띠며 포크로 샐러드를 푹푹 찔러 댔다.
지금까지와 달리 상당히 격양된 표정.
하라브는 그런 그녀를 향해 엄중히 말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거라.”
“제가 잘못 말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서.”
“…….”
볼을 부풀린 채 벌떡 일어난 유리아는,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제 불만을 표현하며 식탁을 나섰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이리엘을 떠올렸다.
여자애들은 원래 저런가?
성질을 부리는 게 아주 똑같다.
하라브는 그녀가 나간 자리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경례를 처음 시행할 때 국민들의 반발은 심했네. 일상을 부수고 나라를 빼앗아 간 제국에게 경례하고 싶은 자가 누가 있겠는가. 덕분에 단속도 그만큼 철저했지.”
예상되는 부분이었다.
나라는 합병되었다지만, 제국의 병사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을 부수고 가족을 죽인 이들이었다. 그들의 나라에 경례한다는 건 국민들에게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을 거다.
그런 이들의 반발을 총독부에서는 철저히 힘으로 눌렀을 테고.
“유리아는 그때 부모를 잃었네. 당시 여섯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여전히 그때를 기억하고 있지. 매주 그 기억이 상기될 테니 잊으려야 어찌 잊을 수가 있었겠나.”
일주일에 한 번, 1분가량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리아에게는 1초도 싫을 만큼 끔찍한 시간으로 다가왔을 터.
그때마다 부모를 잃었던 순간이 계속해서 상기됐을 테지.
그리고 이 도시에 유리아와 같은 이들은 한둘이 아닐 거였다.
“확실히 수도는 다르네요.”
알렌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까지 어떤 도시도 이 정도로 제국에 충성을 강요한 경우는 없었다.
수도에는 총독부의 본부가 있는 이상, 이런 통제가 더욱 심할 수밖에.
독립군들에 의한 암살 시도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도시이니만큼, 확실한 통제가 필요했을 거다.
때문에, 치안을 담당하는 헌병대가 따로 운용되는 것이고.
하라브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알렌의 말에 동조했다.
“맞는 말일세. 그래서 수도에서는 특히 행동을 조심해야 하네. 모든 곳에 제국의 눈과 귀가 있으니.”
조금은 즐거웠던 식사 분위기가 한순간에 축 가라앉았다.
그럴 만도 했다.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내가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달라고 하셨죠.”
“물론일세. 왜?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도 생겼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부탁드릴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