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제86화 마그네트 지부 (2)
마그네트 지부원들의 눈동자 위로 느낌표가 일제히 떠올랐다.
“초, 총독의 목을 베겠다고?”
하라브가 심장을 부여잡으며 말을 더듬었다.
“거봐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포그렛이 벌떡 일어나며 흥분하자, 양옆에 있던 이온과 피츠마가 그의 어깨를 누르며 진정을 시켰다.
하라브는 멍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는 총독부 관저에 머물고 있을진대…….”
총독이 총독저에 있는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하라브가 묻고 있는 건 거기까지 가는 게 가능하냐는 거였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를 죽일 묘책이라도 있는 것인가. 총독저로 가기 위해서는 무려 다섯 개의 성문을 넘어야 하네.”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총독부는 과거 왕궁이었던 ‘스펙스트럼’을 본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평생을 살았던 내가 그것을 모를 리가.
“왕궁의 내부는 전과 많이 달라졌습니까?”
“달라지기는 했으나, 전체적인 구조는 비슷하네.”
“지부에서는 할렌트가 현재 총독저에 머물고 있는지만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일단 알겠네. 시일은 좀 걸릴 걸세.”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으니, 꼬리를 밟히지 않도록 하십시오.”
나야 할렌트의 목을 베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자칫 꼬리를 밟히면 이들은 모두 죽는다.
나는 그것을 조심하라는 의미였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내 말을 이해한 하라브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심적으로 피곤했는지 잠깐 사이에 10년은 더 늙은 몰골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지부원들의 눈빛이 수건으로 벅벅 닦은 은식기처럼 빛나고 있었으나,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 줄 생각은 없었다.
나에 대한 호기심은 알렌 녀석이 알아서 해소해 줄 테지.
“그러시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편히 말하고.”
나는 묵례 후 방을 나섰다.
* * *
쿵.
문이 닫히자 이리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달랬다.
“자세한 건 저희랑 이야기하시죠. 저 사람 성격이 원래 저렇게 생겨 먹었거든요.”
그들은 답도 않고 그저 멍하니 제네스가 떠난 문만 바라보았다. 다들 꿈결에 젖은 듯 멍한 표정이다. 그 적막을 깬 건 유리아의 나지막한 감탄이었다.
“X나 멋있어…….”
“응?”
이리엘이 놀란 눈으로 유리아를 보았다.
주황빛 머리칼을 가진 귀여운 소녀.
그 소녀의 볼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건가?’
어딘가 몽롱한 눈빛이 데이지를 바라보던 알렌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만 그런 눈을 가진 게 아니다.
옆으로 나란히 앉은 지부원들의 눈빛도 모두 그랬다.
“정말이지 살아 있는 레오니랜서같지 않아?”
이온의 말에 피츠마, 포그렛이 공감하며 한마디씩을 보탰다.
“저렇게 카리스마 있는 남자는 처음이야. 내가 사내를 보고 이렇게 심장이 뛸 줄이야.”
“나도, 나도. 어떻게 저렇게 귀족적일 수가 있지? 온몸에서 위엄이 흘러넘치더군.”
다들 난리가 난리가 아니었다.
그 모습에 당황한 건 오히려 이리엘과 알렌이었다.
제네스가 이들에게 보여 준 모습이라고는 검처럼 뾰족하고 서늘한 모습뿐이었는데, 이들은 마치 전설의 용사라도 영접한 듯 그에게 푹 빠져 있었다.
“다들 그가 보인 행보에 이미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랍니다.”
하라브의 말에, 이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마음이 이해는 간다.
북부의 흰사자 소속의 소드 마스터라니.
자신도 지금에 이르러 제네스를 만났다면 저런 눈빛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수도에 오면서 그가 남긴 족적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꿈같은 일이니까.
이리엘이 말했다.
“말씀 편하게 하셔요. 이제 아가씨도 아닌걸요.”
“무슨 말씀입니까. 아가씨는 영원히 아가씨죠. 그리고 저는 이게 편합니다. 그런데 괜찮은 겁니까? 아무리 흰 사자라도 홀로 총독을 암살하는 건 무리일 듯한데…….”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염려하는 하라브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자신도 그게 가능하리라 믿기지 않으니까.
지금까지 여정을 함께 했음에도 그렇다.
하지만 이제는 그럼에도 믿는다.
이리엘이 씩 웃으며 말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옆에 잠자코 있던 알렌도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말을 보탰다.
“걱정이 많으실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제네스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처음에는 누구나 같은 반응이죠. 저 또한 그랬었으니까요. 하지만 곧 현실이 될 겁니다.”
알렌과 이리엘의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본 하라브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온 이들이 믿으라니, 일단 믿어 보는 수밖에.
“저분을 잘 알고 계십니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온이 물어 왔다.
알렌은 그 말에,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굳게 다문 것이 자부심을 한가득 담고 있는 얼굴이었다.
“오오.”
지부원들이 부럽다는 듯 눈빛을 보내자 알렌은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듯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서 저만큼 제네스 님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제네스 님을 북부의 흰사자로 모시고 온 사람이 바로 저니까요.”
“오오오!”
지부원들은 일제히 동공을 키우며 알렌을 바라보았다. 알렌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기대를 품으며 찰나에 일변했다.
“제네스 님의 이야기가 궁금하십니까?”
“물론일세!”
“제네스 님의 이야기가 듣고 싶으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다들 안달이 난 채로 알렌을 바라보았다. 알렌은 여유로운 미소로 콧대를 세웠다.
“그럼 제네스 님과의 첫 만남부터 이야기해 드리죠. 꽤 긴 이야기가 될 겁니다.”
이리엘은 그런 알렌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또 시작이군.’
씨 뿌리는 사람 따로 있고 거두는 사람 따로 있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다.
그래도 오늘 데이지와의 이별로 기분이 침체됐을 텐데, 이런 기회라도 있어 잘됐다 싶다.
저게 인생의 낙인 사람이니.
알렌이 제네스를 잘 알 듯, 이제 이리엘 또한 알렌을 잘 알았다.
알렌은 역시나 이리엘의 예상과 한 치도 다름없는 말을 꺼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목 좀 축였으면 좋겠는데요.”
술 달라는 소리였다.
하여간.
이리엘은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모두 아는 이야기.
자신이 낄 자리는 아니었다. 눈짓으로 하라브에게 인사한 그녀는 밀실에서 나와 위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간 방에는, 제네스가 당장에 불태워 버리고 싶은 책을 읽고 있었다.
심화편이라던데.
겉표지만 봐도 한숨이 인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녀는 화를 꾹 참으며 입을 열었다.
“누군 줄 알고 들어오래요.”
“넌 줄 알았다.”
“진짜요? 어떻게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다 안다.”
쿵쾅쿵쾅 걷지도 않았는데 그걸 안다니.
귀가 엄청 밝나 보다.
하긴 알렌이 문을 벌컥 열 때마다 귀신같이 꿀밤을 때리는 제네스였다.
그런데 잠깐만.
저 정도로 청각이 좋으면……?
제 발 저린 이리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설마 지금까지 내가 했던 혼잣말도 모두 들은 건 아니겠지?’
근래 방에 있을 때마다 제네스에 관한 마음에 대해 중얼거렸던 기억이 머리를 스쳐 가슴이 철렁했다.
“호, 혹시 제 혼잣말도 듣고 그런 거 아니죠?”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보이나.”
제네스의 무심한 대답에 이리엘은 땅이 꺼져라, 안도의 숨을 토해 냈다. 가슴팍까지 부여잡는 그녀를 보며 제네스가 말했다.
“내 욕이라도 했나 보지.”
“아, 뭐. 네. 그렇죠. 하하.”
“면전에서도 하면서 새삼스럽기는. 무슨 일이냐.”
“아, 그게, 알렌 형님 잘 아시잖아요. 밤새도록 제네스 님 이야기 신나게 할 거. 저는 다 아는 이야기니 들을 필요도 없고, 그래서 잠이나 자려고 올라왔어요.”
이리엘의 답변에, 제네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여기 내 방인데.”
“네?”
이리엘이 어벙하게 되묻자, 제네스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보았다.
“잠이나 자려는 녀석이 왜 내 방에 왔냐고.”
일순 뜻을 이해한 이리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분화 직전의 화산처럼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그녀는 그 열기를 조금이나마 식히기 위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죠! 잠을 잘 건데, 그 전에 뭣 좀 말하려고 들른 거라고요!”
“귀 아프다.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큰 소리는.”
“별게 아니라뇨! 남의 혼삿길 망쳐 놓으려고 작정했어요? 제가 자려고 막! 외간 남자 방에 막! 예?!”
당황하니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그녀였다.
제네스는 잔뜩 달아오른 그녀와 달리 평온한 태도로 말했다.
“그래서 왜 왔는데.”
아오, 저걸 그냥 확!
이리엘은 그 태평한 모습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지만, 부탁할 것이 있어 억지로 참았다.
한번 호흡을 내쉬며 인내심을 가다듬은 이리엘이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내일 수도 좀 돌아보려고 하거든요. 테나스타 광장도 가 보고, 또 지금은 총독부지만 왕성이 있던 자리도 보고 싶단 말이죠. 그런데 혼자 다니기는 좀 무섭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적진인데. 자칫 사건 사고에 휘말릴 수도 있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이리엘이 뜸을 들이며 말을 아꼈다.
제네스는 그런 그녀를 그저 빤히 바라보았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안 해.”
“내일 같이 좀 가 달라고요. 제네스 님도 오랜만에 수도 구경하고 그럼 좋잖아요. 웨일런궁에서 일했었으니까, 그때의 추억도 좀 살려 보고.”
수도, 마그네트는 거대한 도시였다.
지금까지 5일간 위르안 상단에 머물렀던 일행이지만, 외곽 지역이기도 했고 마그네트 지부와 접촉하느라 수도의 중심부로 갈 시간은 없었다.
“싫으면 말구요.”
이리엘은 괜히 뒷말을 붙이며 제네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정말요?!”
예상외의 긍정적인 답변에 이리엘은 눈을 크게 뜨며 반색했다. 사실 열이면 아홉, 제네스가 거절할 거라 예상한 탓이다.
“진짜죠? 내일 다른 말 하기 없기예요!”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다. 그럴 일 없다.”
“네! 알겠어요! 그럼 내일 봬요! 안녕히 주무세요!”
말을 다다다 쏟아 낸 이리엘은, 문을 세차게 닫고 자신의 방으로 후다닥 뛰어가, 곧장 침대에 몸을 던져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남아일언 중천금이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꼭 데이트 신청을 한 거 같잖아…….’
제네스에게 오해하지 말라고 해 놓고선 본인이 오해하고 자빠진 이리엘이었다.
한편, 제네스는 이리엘이 세차게 닫고 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정말이지 정신 사납게도 사라졌다.
‘하여간, 쯔쯧.’
이리엘의 마음도 모르고, 언제나처럼 고개를 내젓는 제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