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제84화 위르안 상단 (3)
수도에 도착한 지도 어느덧 3일 차.
알렌과 이리엘은 ‘하라브의 아침’이라는 여관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동안 마그네트 지부의 사람들과 은밀히 신호를 주고받은 결과, 그들은 여기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들어가자.”
긴장된 낯빛의 알렌의 말에, 둘은 여관 안으로 발을 디뎠다.
딸랑.
“어서 오세요.”
종업원인 주황 머리의 소녀에게 자리를 안내받은 그들은 구석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받았다.
알렌은 여유롭게 메뉴판을 훑었으나, 이미 주문할 메뉴는 정해져 있었다.
그것부터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에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진행되어야 했다.
이 식당 어딘가에 북부의 흰사자 소속의 독립군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알렌이 손을 들자, 주황 머리의 여종업원이 다가와 밝게 웃었다.
“네, 주문하시겠어요?”
알렌은 마른침을 삼킨 뒤 주문을 해 나갔다.
“안심스테이크 두 개 주시고 청어샐러드도 하나 부탁드립니다. 안심스테이크의 굽기는 하나는 ‘미디엄 레어’로, 겉은 최대한 바삭하면서 속은 촉촉하게 부탁하고, ……(중략)…… 청어샐러드에 들어가는 청어는 제 손바닥 정도 크기의 청어로 넣어 주시고, 샐러드에 들어갈 채소는 양배추로만 해서 듬뿍 넣어 주십시오.”
“……아, 네. 주방에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굉장히 디테일한 주문에 난감한 미소를 지은 소녀가 돌아가고, 눈을 마주친 알렌과 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주방에서 돌아온 소녀가 말했다.
“네, 주방에서 모두 가능하다고 하시네요! 그렇게 주문 넣어 드릴게요.”
이후 식사를 마친 알렌과 이리엘은 여관 밖으로 나섰다. 식사 중에도 약속했던 신호들을 보내느라 스테이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맛있냐.’
알렌은 부족함에 입맛을 다셨다.
그때 그런 그에게 누군가 불쑥 다가와 알은척을 했다.
“어? 자네 알프스 맞지? 이거 참 오랜만이군!”
“아, 오랜만입니다.”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능숙하게 인사를 받는 알렌.
둘은 자신들을 마중 온 비쩍 마른 사내를 따라 걸음을 옮겼고, 주변을 한 바퀴 빙 돌며 누군가 쫓는지를 확인한 뒤에야 목적지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하라브의 아침의 바로 옆 건물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집 안으로 들어가자 식당에서 주문을 받았던 소녀가 있었다.
“저는 유리아라고 해요! 이쪽으로 오세요! 지부장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그녀는 알렌과 이리엘을 보며 안쪽으로 안내했다.
평범해 보이는 가정집 안에 존재하는 밀실.
그 안에 지부장이 있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었다.
“반갑네. 나는 지부장, 하라브라고…….”
하라브의 시선이 이리엘에게서 멈추더니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이리엘은 그런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눈가에 눈물이 벌써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하라브, 오랜만이에요.”
“이, 이리엘 아가씨?!”
하라브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소리쳤다. 그런 그에게 달려간 이리엘은 진한 포옹을 나누며 해후했다.
하라브는 과거 이리엘의 가문에서 집사로 일했던 경력이 있다고 했다.
루시안과 이리엘을 가까이서 돌봤다고.
그런 그와 근 5년 만에 만나는 것이라 하니, 반가울 수밖에.
팔레이트 상단의 창단까지도 함께했던 그는, 마그네트 지부가 생기면서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아가씨를 보다니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크흡.”
“무슨 소리세요! 지금처럼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죠! 손주도 안 보시려구요?”
이리엘의 앙칼진 대꾸에, 하라브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꼭 봐야지요! 암요. 꼭 보고 죽을 겁니다. 아가씨를 닮은 손주라면 성깔이 얼마나 고약할…….”
이리엘의 옴팡진 시선을 느낀 하라브는 말을 하다 말고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그가 알렌에게 물었다.
“그럼 흰 사자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
갑작스레 진중해진 모습이었다.
그 변화에 당황한 알렌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네. 제네스 님은 아직 숙소에 계십니다.”
“제네스 님?”
“아, 네. 그분의 이름입니다.”
“아-.”
모여 있던 지부원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트렸다.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 다들 눈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왜 함께 오지 않고?”
하라브의 말에 알렌과 이리엘은 어색하게 눈을 맞췄다.
“그게 저희가 따로 벌인 일이 있어서요.”
알렌은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에 관해 설명해 갔다.
* * *
두 녀석이 지부 사람들을 만나러 나간 사이, 나는 간만에 히스테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네가 장부를 꼼꼼히 적어 놓은 덕에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어. 덕분에 고마운 점이 많아.”
나는 상 위로 다리를 걸쳐 올린 채 사과를 베어 물었다.
히스테론은 그런 내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족제비 같은 웃음을 흘려 댔다.
“제가 도움이 됐다니, 그것만으로도 일생일대의 영광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더 고맙군. 보니까 이제 하나둘 도착하고 있는 것 같던데.”
“예.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2일이 지나면 집결이 끝날 것 같습니다.”
“자네가 수고가 많군.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국을 위해 힘쓰는 이들이 있었다니.”
“알아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는 사과를 다시금 베어 물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이 일과 관계된 이들을 모두 모아 놓고 연회를 베풀고자 하는데.”
“연회요?”
“그때, 바스티스의 이름으로 자네의 노고를 치하할까 해서.”
내 말에 녀석의 눈이 휘둥그레 떠진다.
“그때 우리 가문이 위르안 상단을 지원하겠다는 뜻도 밝히면 그림이 좋지 않겠나.”
“앞으로 평생을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벌떡 일어나 큰절을 하는 녀석.
“그런데 말이야. 내가 연회에 관해서 참 까다로운 사람이라서 말이지.”
“필요한 부분을 말씀해 주신다면 어떻게 해서든 흡족해하실 만한 연회를, 책임지고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비장한 표정의 녀석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이 자식.
내가 발바닥을 핥으라고 한다면 당장에라도 그렇게 할 기세다.
아주 욕심에 눈이 멀었군.
요 며칠 사이 녀석은 나를 완전히 크레온 바스티스라고 믿고 있었다.
누가봐도 귀족적인 내 성정 덕분이겠지.
나는 녀석에게 내가 원하는 연회의 조건들을 빠짐없이 말했다.
히스테론은 그곳이 제 무덤이 될 줄도 모르고 내 말을 꼼꼼히 받아적었다.
* * *
“빨리 안 움직이냐! 이 느려 터진 새끼들아! 연회를 망칠 작정이야!”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사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나운 얼굴로 하인들을 진두지휘하는 남자.
그는 다름 아닌 오늘을 자신의 두 번째 생일이라 명명한 히스테론이었다.
“이 멍청한 새끼야, 테이블의 위치가 비뚤어졌잖아! 좀 더 오른쪽으로 옮겨!”
그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눈에 불을 켜고 사람들을 감시했다.
눈이 네 개라도 모자를 정도다.
“오늘이 어떤 날인 줄 알고 이 머저리 같은 프렌치 새끼들이!”
그는 오늘 조금의 흠도 보이지 않고 크레온 바스티스를 만족시켜야 했다.
하나둘 세팅되는 연회장을 보며 고함을 내지르던 히스테론은 별안간 미친놈처럼 웃어 젖혔다.
“음하하하!”
도저히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까닭.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바스티스가 어떤 가문인가.
제국에서 한 손에 꼽히는 명문가아닌가.
그런 가문과 연을 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손바닥을 비벼 대는데, 자신에게 그런 행운이 넝쿨째 굴러들어 올 줄이야.
앞으로 펼쳐질 황금빛 미래 속에서 그는 이미 제국의 중앙에 가 있었다.
크레온 바스티스의 바짓가랑이만 잘 붙잡고 늘어져도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자신의 수완이면 앞으로 승승장구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는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 위대한 첫걸음이 바로 오늘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연회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야단법석하게 준비가 끝나가자, 손님들이 하나둘 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크레온의 요청대로 상단에 관련된 수뇌부들을 긁어모았다.
프렌치들을 먼 길 동안 호송해 온 이들까지 전부.
중요한 인물들만 추리고 추렸음에도 모두 모이니 80명이 넘어가는 대인원이었다.
“와, 이게 다 뭐야.”
덕분에 초대된 쥐새끼와 가자미는 상상 이상으로 호화스러운 연회장에 입을 쩍 벌렸다.
손님들이 모두 모이자, 히스테론은 단상 위에 올라 외쳤다.
“다들 주목해 주십시오!”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된다.
크레온을 데리고 온 세 녀석과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이 연회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저 필참하라는 이야기만 전달받았을 뿐.
히스테론은 가쁜 숨을 애써 삼키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위르안 상단을 위해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짝짝짝짝!
다들 커다란 박수와 환호로 그 말을 반겼다.
히스테론은 장내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제와 말씀드리지만, 사실 저희를 위해 이 연회를 주최해 주신 분이 따로 계십니다.”
모두가 그 말에 집중했다.
“그분은 다름 아닌! 제국 최강의 명문이자 대륙 최고의 혈통을 자랑하는 바스티스 가문의 자제! 크레온 바스티스 님입니다!”
히스테론의 말에 장내는 일순 시장통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이 변방에 바스티스 가문의 자제가 오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그동안은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그분이 오실 것이니, 모두 조금의 경거망동 없이 그분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히스테론의 말에 다들 환호를 질렀다.
위르안 상단의 앞길이 환하게 밝아왔으니 신이 나지 않을 수 있나.
듣고 있어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이후로도 긴 연설을 이어 간 히스테론이 단상에서 내려오자, 사람들은 그 주변으로 구름처럼 몰려와 고개를 조아렸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음하하.”
투자 좀 했다고 자신의 앞에서 어깨를 펴던 자들도 정수리를 보이며 고개를 숙여 온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힘인 것이다.
마치 한순간에 신분이 몇 계단이나 훌쩍 상승한 기분이었다.
얼마 전까지 비슷한 급이라 여겨졌던 이들도 이제 발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듯하다.
가히 하늘을 나는 기분.
“모두 정숙해 주십시오! 크레온 바스티스 님 드십니다!”
크레온을 모시러 갔던 털북숭이의 목소리였다.
그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소란스럽던 장내에 일순 숨 막히는 적막이 내렸다.
다들 호흡마저 조심히 하고 있었다.
끼이이익.
거대한 문이 쪼개지듯 열리며 등장하는 사내.
히스테론은 그런 그를 강림한 신처럼 바라보았다.
이때 웅장한 음악이 터져 주면 좋으련만, 크레온 바스티스는 그것도 필요 없다고 했다.
음식과 술을 서빙하는 하인들도 더럽다고 두지 말라 하니, 이렇게 모두 세팅된 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히스테론은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땅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위르안 상단의 히스테론이 바스티스 가문의 빛나는 별, 크레온 바스티스 님을 뵙습니다!”
“크레온 바스티스 님을 뵙습니다!”
모두가 그를 뒤따라 고개를 숙였다.
소리가 홀 벽면에 닿으며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그 이후의 흐르는 적막은 분위기를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
‘이래서 음악이 필요한 법인데.’
히스테론이 그 묵직한 침묵에 아쉬워하는 찰나.
쿵!
문이 닫혔다.
크레온이 손수 뒤로 돌더니 거대한 문의 빗장까지 걸어 잠갔다.
그리고 다시 좌중을 돌아보는 크레온.
그 위압적인 시선에 절로 고개가 조아려진다.
가히 귀족적인 자태.
바스티스의 힘이란 이리도 대단했다.
가만히 서 있는 그가 태산처럼 크게 다가왔다.
그가 빗장까지 걸어 잠갔음에도 연회장에 있는 이들은 이때까지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크레온 바스티스, 아니 제네스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네스의 손이 느릿하게 허리춤으로 가 검병을 움켜쥔다.
“나는 지금부터 너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상을 내리고자 한다.”
스르렁.
섬뜩한 마찰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백색의 검신.
“내 손수 내릴 것이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눈빛을 던지는 이들.
그 사이로 얼음장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내렸다.
“죽음으로 달게 받도록.”
여전히 고요한 장내.
그의 손끝에서 검광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