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제83화 위르안 상단 (2)
목을 베겠다는 내 말에, 녀석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제 목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내드리겠습니다!”
녀석은 아무래도 내 말을 충성심을 시험하는 뜻으로 오해했나 보다.
사실 그렇게 오해하라고 던진 말이기는 한데.
네가 분명 그리 말했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말문을 뗐다.
“총독부를 도와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예. 돈에 눈먼 프렌치 놈들을 꾀어내어 인력이 필요한 곳에 노예로 투입하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너희 상단에서 전반적으로 주도하는 일인가?”
“네, 그렇습니다. 인원을 모집하는 거야 저희 산하로도 줄줄이 있습니다만, 모집한 인원은 저희 쪽에서 결집시킨 이후에 직접 뿌리고 있습니다. 총독부에서 직접 나선다면 오물이 튈 수 있으니, 저희가 앞에 나서는 거지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어 하나하나가 심기를 거스르지만, 어쨌거나 이놈이 이 쓰레기 같은 행위의 담당자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나는 참을 ‘인’ 자를 되새기며 말했다.
“그들의 명부는 따로 관리되고 있겠지.”
“……죄송하지만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히스테론이 간사한 눈빛을 빛냈다. 놈이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나는 놈이 원하는 떡을 던져 주었다.
“쫓아야 할 이가 있다. 그 녀석이 노예로 잠입해 있다는 정보다. 자세한 말은 하지 않겠다.”
“아, 네. 알겠습니다.”
녀석이 내시처럼 허리를 숙이며 고개를 조아렸다. 뭘 알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제 편의대로 이해할 것이다.
바스티스 가문의 자제가 나설 정도의 일에 일조한다면, 그에 대한 보상은 물론이거니와 바스티스와 연줄을 이을 수 있을 거라 여기겠지.
그러니 놈에게 내 존재는 황금 동아줄이나 다름이 없는 거다.
내가 말했다.
“노예들의 신상이 적힌 명부를 확인하고 싶은데.”
“예, 물론이죠. 범위를 좁힐 대략적인 조건만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아니, 모두 가져와라. 어디서 어떻게 모집했는지부터 어디로 보내졌는지까지, 적어 놓은 정보는 모두 다.”
“……양이 상당할 텐데요.”
“그래도.”
“아, 예.”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는 건, 그만큼이나 중대한 사안이라는 의미로 녀석에게 전해졌을 거다.
나는 그것을 확인시켜 주듯 말을 이었다.
“상당히 중대한 일이다.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것이야. 하인의 눈과 입마저 단속해라. 만약 이 일이 잘 풀린다면, 너는 막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녀석은 내게 절이라도 할 것처럼 고개를 처박았다. 벌써부터 나를 향한 충성심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할 말을 끝낸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야기는 이쯤 하지.”
“네! 자료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 *
방으로 돌아오자, 알렌과 이리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이닥쳤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알렌이 불안한 눈초리로 물어 왔다. 나는 한편에 놓인 소파에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어떻게 되기는, 잘됐지. 지금부터 5일간의 여유가 있는 건 알지?”
다른 도시에서 출발한 인원들까지 모두 집결하는 때가 5일 후라고 했다. 그러니 놈들을 쓸어버리는 시기는 자연스레 5일 뒤로 잡혔다.
“그 안에 너희들은 마그네트 지부 사람들과 접촉해서 철저히 준비해 놔.”
“옙!”
둘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중에 모두 이야기된 상태라,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유 시간도 5일이나 있으니 천천히, 빈틈없이 준비하면 된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이미 그들의 존재를 느끼고 있던 나는, 곧장 들어오라 명했다. 열린 문틈으로 히스테론이 커다란 박스를 품에 안은 털북숭이와 함께 들어왔다.
“위르안 상단의 상단주, 히스테론 인사 올리겠습니다.”
그는 나를 포함해 알렌과 이리엘에게 깍듯이 예를 표했다.
“행동이 빠릿빠릿하군.”
나는 금세 장부들을 챙겨 온 녀석을 칭찬해 주었다. 그러자 녀석의 안면에 미소가 만연해졌다. 당장에 목을 베고 싶을 만큼 배알이 꼬이는 미소였다.
히스테론은 내려놓은 박스 안에 있는 명부를 꺼내며 간단히 설명을 이어 갔다.
“보시면 명부의 분류는 지역별로 나뉘어 있고, 시기는 겉면에 적혀 있습니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갔는지 이름과 함께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정보를 찾는 데 어렵지는 않으실 겁니다.”
나는 명부 한 권을 건네받아 대충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의 말대로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수고했다. 이만 나가 보거라.”
“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평안한 밤 되십시오.”
철컥.
문이 닫히자 알렌과 이리엘은 바로 몸을 일으켜 박스 안에 담긴 명부들을 살폈다.
이리엘은 첫 장을 넘기기 무섭게 미간을 구겼다.
명부에 적힌 사람들의 수와 권수만 보아도 지금까지 이들이 징병한 프렌치아 사람들이 수천 명은 될 듯했다. 그렇게 많은 프렌치아 사람들이 놈들의 꾐에 속아 전장으로, 노역장으로 끌려간 것이다.
“……여기 적혀 있네요.”
알렌이 한 책자를 펼친 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그의 절친했던 벗이자 데이지의 오빠인 알스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겠지.
“알스가 끌려간 노역장이 포르센 항구와 가까운 곳인가 본데요?”
알렌이 명부 한편을 손으로 짚은 채 내게 시선을 던졌다.
휘둥그레 떠진 눈빛이 간절함을 담고 있다.
포르센 항구가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까닭.
기막힌 우연이었다.
녀석이 나를 애처롭게 불렀다.
“……제네스 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과 축 처진 입꼬리.
나는 그 꼴이 보기 싫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녀석을 구할 여유는 있을 거다. 그러니 그 꼴사나운 표정 좀 어떻게 해라. 다 큰 놈이 세 살배기 애처럼 굴기는.”
알렌은 내 뾰족한 어조에도 감격에 차 내게 다가왔다.
“역시 우리 제네스 님! 제네스 님은 저한테 진정한 영웅인 거 아시죠. 사랑합-.”
빡!
“끄악!”
나는 제 발로 걸어오는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요새 사랑에 빠져서 그런가, 사랑한다는 말이 아주 입에 뱄다.
“끄응……. 좋아서 그런 건데 제 맘도 모르시고.”
머리를 부여잡은 녀석이 입술을 빼쭉 내밀며 눈을 흘겼다.
아쭈.
이 자식이, 데이지가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자기가 진짜 귀여운 줄 아나.
어디서 저딴 새초롬한 표정을.
“입 안 넣어?”
“흡.”
주먹을 다시금 들자, 녀석은 재빨리 제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 * *
여관 ‘하라브의 아침’의 주인인 하라브는 일과를 마치자마자, 여관 바로 옆 건물인 자신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고고, 허리야. 이제 나도 뒈질 때가 됐나 보구만.”
허리를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작은 그림자가 튀어나와 그를 반겼다.
“할아부지!”
“어이쿠, 깜짝이야!”
하라브는 갑작스레 나타난 유리아에 심장을 부여잡았다. 앞을 막아 온 그녀는 주황색 머리칼을 가진 귀여운 소녀였다.
하라브가 눈을 희번덕 떴다.
“이것아, 나를 죽일 작정이냐?”
“이것 보세요!”
유리아는 하라브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쥔 하얀색 천을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뭔데?”
“힐첸 대로 두 번째 가로수에 매여 있었어요!”
“뭐?!”
하라브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신호는 본부에서 온 이들이 자신들과 접촉하기 위해 사용하는 약속인 까닭이다.
아무래도 본부에서 사람들이 온 모양인데.
“그,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그것의 의미는 명백했다.
유리아 또한 그 의미를 알고 있기에 이리 상기된 얼굴로 요란법석을 떨고 있는 것이고.
“네! 맞아요! 흰 사자가 온 거라고요!”
드디어 그가 수도에 당도한 것이다.
주황빛으로 아롱진 밀실.
그곳에는 흰 천을 발견한 유리아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의 인원이 모여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은 이는 ‘북부의 흰사자’의 간부이자 ‘마그네트 지부’의 지부장인 하라브였다.
“그분이 드디어 온 거라니까요!”
유리아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호들갑을 떨어 댔다.
난리 법석을 떠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방 안에 있는 이들은 모두 상기된 얼굴로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한마디씩 내뱉었다.
“드디어 그분이 오시다니!”
“대체 어떤 분이려나. 정말 궁금해 미치겠군!”
“난 벌써 심장이 벌렁거려 뒈질 거 같은데?”
하라브는 그런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도 심장이 벌렁거려 금방이라도 저승의 문턱을 넘을 것 같은데 이들은 어떻겠는가.
이렇게 요란을 떠는 게 당연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흰 사자 아닌가.
흰 사자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그야말로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북부의 흰사자’ 소속의 소드 마스터.
총독부의 핵심 전력인 특임대 ‘초원의 들개’와 ‘로열나이트’를 홀로 부숴 버린 사내.
그뿐이랴.
스티스시에서 로드르 헤이어서를 홀로 구해 내는 장면을 무수한 이들이 보았다.
그의 명성은 그의 존재보다 한참 전에 수도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 그를 만날 생각에 설레고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라브는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었지만,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는 이 열기를 가라앉힐 필요성을 느꼈다.
“이것들아, 호들갑 좀 떨지 마라. 내가 너희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 죽겠다. 누가 보면 독립이라도 한 줄 알겠어.”
“흰 사자가 있으니 독립도 멀지 않았죠!”
유리아가 지지 않고 소리쳤다.
눈이 얼마나 반짝거리는지 은하수를 박아 넣은 것 같다.
저리도 좋을꼬.
하라브는 괜히 툴툴거리며 입을 열었다.
“괜한 소리 말고, 신호는 확실히 남겨 두었지?”
“넵! 물론이죠!”
“절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 적의 함정일 수 있어. 경거망동하다가는 명이 짧아질 수 있음이야. 나야 이제 삶에 미련이 없다지만, 너희들은 아닐 게 아니냐. 살아서 독립을 보고 싶다면 조심히 움직여야 한다.”
신호를 보내온 이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의 확인 절차가 필요했다.
지금처럼 약속된 신호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조금씩 드러내면서 조심스레 접근해야 한다.
이곳은 프렌치아 총독부의 본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들뜬 마음을 다스릴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게 잘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데 무슨 일로 수도에 온 걸까요?”
비쩍 마른 이온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작은 키의 포그렛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답변해 갔다.
“그거야 빤하지 않나.”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에게 집중됐다.
그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뜸을 들이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할렌트의 목을 베려는 것이지.”
“그게 말이야 인마!”
하라브가 성을 내며 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를 집어 던졌다.
촤라락, 흩날리는 종이 더미 사이로 포그렛이 소리쳤다.
“왁! 갑자기 왜 그러세요! 노망이라도 나신 겁니까!”
“왜 그러기는! 네 허파에 헛바람이 잔뜩 들어갔으니 그렇지! 네놈이 아주 흰 사자를 저승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구나! 할렌트 바레인이 옆 동네 촌장이야? 엉!”
하라브의 호령에 포그렛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그럼 뭐, 초원의 들개나 로열나이트는 옆 동네 양아치라서 죽였나!”
“이 자식이 그래도!”
“자자, 다들 진정합시다.”
눈이 부리부리한 피츠마가 성이 난 하라브를 달래며 개판 직전의 분위기를 힘겹게 추슬렀다.
“지부장님도 잠시 진정하시고요. 어차피 그를 곧 만나게 될 게 아닙니까. 여기 온 이유야 만나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죠. 포그렛 너도 인마, 그런 말은 흰 사자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맞아요! 부상을 입으셨다는 소문도 있는데! 그런 말을 하면 얼마나 부담되시겠어요!”
“나도 면전에서 그런 말은 안 하지.”
유리아까지 나서자 포그렛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그사이 호흡을 고르며 화를 삭인 하라브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말이야. 다들 너무 들뜨지 말고 이럴 때일수록 신중히 행동해. 알겠어?”
이들의 회의는 이후로도 늦게까지 이어졌다.
그럼에도 지부원들은 평소와 달리 지칠 줄을 몰랐다.
자신들의 열망을 뜨겁게 지피는 존재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어찌 들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그네트 지부원들 외에도 북부의 흰사자 소속의 독립군들에게 흰 사자는, 독립을 물고 온 레오니랜서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추앙하지 않을 수 있나.
그들의 의식 속에서 제네스는 이미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