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제82화 위르안 상단 (1)
드디어 수도였다.
나는 창가 너머로 웅장하게 솟아 있는 성벽을 바라보았다.
깎아지른 절벽처럼 드높은 성벽이, 새하얀 파도처럼 기다랗게 펼쳐져 있다.
수도, 마그네트의 외성.
그것은 내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여전한가.
나는 세월이 비껴간, 그 웅대한 성벽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일렁임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보다.
늙으면 감상적으로 변한다더니.
여태 프렌치아의 국토를 걸어 이곳에 당도했지만, 내게 이곳, 마그네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달랐다.
지금까지 내가 지나온 도시들은 전생에도 문자와 그림으로만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지명만 익숙할 뿐,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것들.
왕세자였던 나는 생애 대부분을 왕성에서 보냈기에 그랬다.
때문에 지금까지 지나온 길은 내게, 프렌치아이면서 프렌치아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선연히 드러난 저 외성은.
그 너머에 있을 대도시, ‘마그네트’는.
또 그 중심에 세워져 있던 왕궁, ‘스펙스트럼’은.
내가 알고 있고 내가 기억하는 ‘프렌치아’, 그 자체였다.
이 안에, 내 전생의 모든 기억이 담겨 있었다.
이 안에, 내 짧았던 생애와 내가 사랑했던 것들과 내가 꿈꿔 왔던 왕국이 전부 담겨 있었다.
나는 순간, 머릿속으로만 기억하던 전생을 온전히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나의 생을 지나, 46년 만에 찾았음에도.
여전히 웅장하고 거대한 성벽을 바라보면서.
“…….”
감상에 젖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알렌과 이리엘도 나란히 마그네트의 외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엘이 낮게 속삭였다.
“이곳에 다시 돌아올 줄이야…….”
그녀 또한 이곳에 많은 추억이 묻어 있을 터였다.
그녀가 살았던 공작가는 아니었지만 루시안을 따라서, 그녀의 아버지 트레터 세리어스 공작을 따라서 많이 놀러 왔었으니.
그녀뿐만이겠는가.
“……여기가 수도구나.”
생전 처음 수도에 온 알렌 또한 성벽을 보며 감격에 젖어 있었다.
이곳은 프렌치아의 심장과 다름없는 곳이기에.
* * *
거인이 드나들어도 될 만큼 거대한 성문을 통과하여 마그네트에 진입하는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우리 일행은 총독부와 연관된 위르안 상단의 일행이었고, 털북숭이는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과 나름 안면이 있는 듯했다.
위병들은 그에게 내 신분을 듣더니 곧장 길을 터 주었다.
그렇게 성문을 넘은 우리는, 마그네트의 시내를 눈에 담았다.
좁은 창으로 보이는 정경들만으로도 지금까지 지나쳐 온 도시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함이 느껴졌다.
전체적인 그림은 내 기억 속 그대로였다.
드높이 솟은 건물들이 숲속의 나무처럼 밀도 있게 자리해 있었고, 그 사이를 널따란 대로가 기다랗게 가로지르고 있었으며, 그 위를 마차와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쟁에 폐허가 되었던 도시는 완전히 수복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곳은 더 이상 내가 알던 마그네트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프렌치아가 아니었다.
긴 세월을 그 모습 그대로 버텨 온 성벽과 달리, 성의 내부는 많은 것들이 달려져 있었다.
그 변화의 간극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국적이다.
“여기가 수도구나.”
“엄청나.”
“와, 이렇게 클 줄이야.”
“정말 놀라워요!”
수레에 타고 있던 이들은 몸을 반쯤 일으켜 주변을 구경했다. 길 가는 이들 몇몇이 그들을 바라보았으나 각자 갈 길이 바빴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신이 난 그들과 달리, 이리엘은 입술을 꾹 문 채 말했다.
“……꼭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아요.”
그녀 또한 마그네트에 10년 만에 온 것일 터.
내 기억과 같은 마그네트를 기억하고 있겠지.
“……그러게 말이야. 제국에 가 본 적은 없지만, 꼭 제국에 온 것 같네.”
알렌이 힘 빠진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거의 마그네트를 기억하지 못하는 알렌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실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도시들 중에서도 제국화가 유독 심했다.
이제 이곳은 더 이상 프렌치아의 수도라 부를 수 없었다.
제국의 문화로 물들어 있는 제국의 도시와 다름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그네트 중심에 선 총독부는 온전히 제국의 기관이었고, 고위 관직을 맡은 이들도, 성을 경계하는 군대도 모두 제국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가장 많은 제국민들이 이민 온 도시.
프렌치아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존재치 않았다.
나는 그것을 보며 프렌치아가 패망했음을 새삼스레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저기가 위르안 상단의 본부입니다.”
털북숭이가 말했다.
마음이 싱숭생숭한 사이, 우리는 위르안 상단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내 눈은 장식으로 보이나 보지.”
“그, 그것이 아니오라.”
“닥쳐라. 너의 변명을 오늘따라 유독 듣고 싶지 않구나.”
털북숭이를 치우고 본 위르안 상단은,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수도에서도 꽤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록 성벽에 가까운 외곽 지역이기는 하나, 이 정도 규모면 대상단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하긴, 총독부에서 이런 일을 웬만한 곳에 맡기지는 않았을 테지.
털북숭이가 내 눈치를 살살 보며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이제부터는 아랫것들이 대신 안내해 드릴 겁니다. 저는 공자님께서 상단주인 히스테론 님과 빠르게 만나 뵐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를 필두로 한 쥐새끼, 가자미까지 세 녀석이 부리나케 내게서 도망쳤다.
우리는 그 후로 하인들의 안내를 따라 상단의 안쪽으로 이동했고, 수레에 타 있던 이들은 우리와 다른 길로 불려 갔다.
알렌은 그런 이들 사이에 있는 데이지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앞으로 평생 못 만날 줄 알겠네.
데이지 또한 그런 알렌을 멀어지면서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생각보다 의연했다.
오히려 이 자식이 난리지.
“왜, 아주 따라가지 그러냐?”
“그래도 됩니까?”
눈동자를 빛낸 녀석은 그 뒤로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물론, 농담입니다.”
농담인 척은.
내가 허락한다면 당장에라도 뛰어갈 놈이다.
요 며칠 사이에 아주 푹 빠졌다, 푹 빠졌어.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옆에서 이리엘이 알렌을 토닥이며 달래 주었다.
알렌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엘의 말대로 그녀에게 별다른 해코지는 없을 거다. 지내는 동안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미리 조치한 까닭이다.
마음에 드는 이가 있어 노예로 부릴까 하니, 건들지 말라고.
이렇게 말해야 저들을 지킬 수 있다는 현실이 씁쓸하지만 일단 그것이 최선이었다.
* * *
“무어라?!”
위르안 상단의 주인, 히스테론은 갑작스러운 희소식에 앉아 있던 상태로 한차례 펄쩍 튀었다.
“바스티스 가문의 사람이 왔다고?”
바스티스 가문이 어떤 곳인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명가 아닌가.
방계라고는 하지만 그 위대한 가문의 핏줄이 이 변방까지 오다니.
이것은 자신의 인생을 몇 단계 끌어올려 줄 굉장한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히스테론은 흥분한 감정을 감추지 않고 소리치듯 물었다.
“신분은 확실한 것이냐!”
“그, 그게 따로 확인은 안 했습니다.”
“뭐라?”
털북숭이의 말에, 히스테론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이 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하나.’
들뜬 마음이 찰나에 짜게 식는다.
그는 으르렁거리며 털북숭이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신분도 확인하지 않고 데려왔단 말이냐?”
“제, 제가 어찌 바스티스 가문의 공자님 신분을 확인하겠습니까. 이미 한바탕 두들겨 맞은 상태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래서 믿은 건 아니고요. 생긴 것이 이국적이기는 하나 때깔부터 귀족적인 데다, 풍기는 기도 또한 위압적이어서 히스테론 님도 보시면 바로 납득하실 겁니다.”
털북숭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게다가 저희를 대하는 태도나 성격을 보면 신분을 확인할 것도 없이 확실합니다. 저는 살면서 그토록 까탈스럽고 재수 없는 새끼- 아니, 공자님은 처음 봤습니다. 바스티스 가문의 공자님이 아니고서야 그런 막무가내인 인성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제가 괜히 자신하겠습니까. 한번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성격이 어떻길래?”
히스테론이 물음에, 털북숭이는 기다렸다는 듯 지금까지의 사연을 풀어냈다.
말하다 보니 서러워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히스테론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명가의 자제가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인성이었다.
방계라지만, 바스티스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얼마나 제멋대로 살아왔겠는가.
그러니 그런 인간 말종의 성격을 가지게 됐을 테지.
오히려 명가일수록 직계보다는 방계 새끼들이 더 악랄한 법이었다.
“네가 고생 많았다.”
히스테론이 자신의 노고를 인정해 주자, 털북숭이는 그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
히스테론이 말했다.
“그런데 왜 총독부로 가지 않고 이리로 왔다더냐?”
“가문의 일로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히스테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총독부 고위 관직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의 귀에 본인들의 행차를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헌데, 그런 그들이 위르안 상단으로 왔다.
그 의미는 간단했다.
자신의 은밀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바스티스 가문과 연을 이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너는 지금 가서 당장 그분과 자리를 마련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히스테론은 고개를 꾸벅이고 나가는 털북숭이를 보며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왠지, 냄새가 난단 말이지.”
그는 손바닥을 파리처럼 비비며 경종을 울리고 있는 자신의 육감을 들여다보았다.
상인으로서의 예민한 감이 요란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꼭,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
아무래도 자신의 앞날이 환하게 트일 징조가 분명했다.
자신의 촉은 지금껏 거의 틀린 적이 없기에, 히스테론은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위르안 상단의-.”
“인사는 됐다.”
나는 허리를 접으며 깍듯하게 구는 녀석을 손짓으로 치우고는 소파에 풀썩 앉았다.
현재 내 심기는 새끼를 꼰 볏짚처럼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이국적으로 변한 마그네트의 모습도 봤겠다.
이들이 더욱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얻어 내야 할 것이 있어 참는다.
아주 잠시.
“혹 불편한 점이 있으신지요?”
“됐다. 말해 봤자 내 뜻에 맞추지 못할 테니. 천박한 곳에 왔으니 내가 참아야지.”
“……귀하신 분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 주시다니 영광이옵니다.”
“인사치레는 됐으니, 앉아라.”
“아, 예.”
그는 내 앞에 조심스레 앉았다.
대상단을 이끄는 주인 답게 표정 관리를 제법 잘 하고 있었다.
하지만 놈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가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내 신분을 확실히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니, 그렇겠지.
하지만 녀석도 일단은 나를 믿을 수밖에 없다.
녀석의 정보력이 아무리 뛰어나다한들, 바스티스 가문의 모든 방계를 줄줄이 꿰고 있을 리 없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일단 내 비위를 맞추면서 은밀히 진행하려 하겠지.
하나, 녀석에게 그리 긴 시간은 허락되지 않을 거다.
그리고, 현재 그에게 닿고 있을 내 존재감은 진짜 바스티스 가문의 자식 놈이 와도 뿜어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내게서 일어난 기세가 집무실 전체를 은은히 짓누르고 있는 까닭.
이런 상황에 내 신분을 직접 확인하겠다고 내 심기를 건드리는 건, 녀석의 입장에서는 굴러들어 온 복을 발로 차 버리는 일과 같다.
그러니 일단 내가 바스티스 가문의 사람이라고 믿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나는 녀석에게 이리저리 잴 시간도 주지 않고 말했다.
“참고로 말하지. 나는 단도직입적인 걸 좋아해. 짧고 간결한 거 말이다.”
내 말을 알아들은 녀석이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성심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 어떤 것이든 성심을 다해 돕겠다라…….”
나는 그의 뒷말을 반복하며 녀석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내가 네놈의 목을 베겠다고 해도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