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제79화 지켜 줄게 (2)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황한 건 오히려 알렌이었다.
“아, 아직 확실한 건 아니기는 합니다. 저희도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라서요.”
총독부가 어떤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건 기정사실이었지만, 일단 이들의 불안을 달랠 필요가 있었다.
이리엘이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그들이 머문 지가 꽤 됐나 봐요? 선전물에는 모집 일자가 며칠 뒤던데.”
그녀의 말대로 우리가 받은 종이에는 모집 기한이 3일 남아 있었다. 그 내용대로라면 아직 출발한 이들이 없어야 맞았다.
“아마 두 달 정도 됐을 걸세. 인원을 모집하는 건 이번이 세 번째고. 아들은 한 달 전쯤 두 번째 모집에 참여했지.”
“흠,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리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팔레인이 말을 이었다.
그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들은 벌써 3차에 걸쳐 인원을 모집하고 있었고, 1차에는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 신청 인원이 적었지만, 3개월 치 월급을 실제로 지급 받는 이들이 있자 2차, 3차에 지원자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들의 의중이 수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돈도 실제로 주고 직접 다녀왔다는 자들까지 나서서 이야기해 주니 믿음이 갔다고.
게다가 총독부의 이름을 떡하니 걸고 하는 일이 아닌가.
몇 년만 바짝 고생하면 적어도 지금의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참여하는 인원이 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딸아이까지 신청했네만…….”
팔레인이 말꼬리를 흐리며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알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음을 느낀 까닭이다.
“마, 만약 그들이 한 말이 거짓이라면 오빠와 저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데이지의 질문에, 알렌과 이리엘은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35세 이하의 젊은 남자와 여자.
그 쓰임은 사실 뻔했다.
그들은 노예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게 될 거다.
데이지는 무겁게 내린 침묵 속에서 쥐고 있던 포크를 힘없이 내려놓았다.
그녀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렸다.
“설마 무슨 일 있겠어. 아무리 막 나간다지만 총독부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인데.”
팔레인이 말했다.
어조는 덤덤한 척하지만, 그의 낯빛은 불안감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옆에 있는 헤리안은 그보다 더했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럼 우리 알스는 어떻게 되는 거니? 응? 우리 아들은?”
헤리안이 앞섶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호흡이 거칠어진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왜 벌써 호들갑이야.”
팔레인이 그런 그녀를 달래며 한 소리 했다. 데이지 또한 헤리안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걱정 마세요. 괜찮을 거예요.”
“제가 한번 알아볼 테니 일단 진정하세요.”
알렌이 그녀에게 물을 건네며 말했다. 팔레인의 침통한 시선이 알렌을 향했다.
“네가 어찌하려고…….”
상단의 일을 하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알렌은 나를 바라보며 허락을 구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알렌이 비장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사실 상단 일을 하고 있지 않아요.”
갑작스러운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알렌에게 모였다.
다들 멍한 얼굴로 알렌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
알렌이 사실을 고했다.
“저희는 사실 북부의 흰사자 소속의 독립군입니다.”
알렌의 말에, 그들은 동시에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일련의 대화를 모두 마치고 집 밖으로 나와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확인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알렌이 배웅하러 나온 헤리안을 가볍게 안으며 말했다. 그녀는 알렌을 마주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고마워.”
“잘 부탁한다. 내가 널 볼 면목이 없구나.”
팔레인이 알렌의 어깨를 툭툭 다독이며 말했다.
그는 이렇게 된 상황이 모두 자신이 부족한 탓이라 여기는 듯했다.
“괜한 소리 마세요. 제가 남인가요. 지금까지 받은 은혜가 있는데 기꺼이 도와드려야죠.”
팔레인과 헤리안과 인사를 나눈 알렌은 다음으로 애처롭게 서 있는 데이지에게 시선을 두었다.
“……알렌 오빠.”
두 손을 모은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알렌이 포개어 잡았다.
“나만 믿고 있어.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가히 군주와 같은 늠름한 자태에, 데이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팔레인이 말했다.
“정말 자네들끼리 가능하겠나.”
“알렌 형님이 얼마나 강한데요. 걱정 붙들어 매고 계세요.”
이리엘은 그의 걱정을 무마시키며 알렌을 띄워 주었다.
알렌 녀석.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꼴이 헌앙하기 그지없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나섰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녀석들의 위치도 알았겠다, 미룰 이유가 없었다.
독립군이란 사실을 밝힌 후, 우리는 데이지에게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는지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기억해야 할 만큼 특이한 점은 없었고, 석 달 치 월급을 미리 받으며 이름과 주소를 적었다고 하니, 녀석들을 쓸어버리고 신상을 적은 장부만 처리하면 일단 데이지 쪽은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을 듯했다.
“일단 본거지를 들쑤시면 답이 나오겠죠?”
알렌이 나를 보며 물었다.
사람을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할 때는 언제고, 집을 나서니 이제야 내가 보이나 보지?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네?”
“조금 전까지는 입도 벙긋 못 하게 하더니.”
“아-.”
내 말에 알렌은 짧게 탄성을 터트리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 많이 서운하셨어요? 제네스 님도 참. 제 마음 다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알렌이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수줍은 척 굴었다. 나는 애교를 부리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민했다.
그냥 줘 팰까?
알렌의 처단을 고민하는 사이, 이리엘은 옆에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 댔다.
“무슨 남자가 그거 가지고 삐지고 그래요.”
“뭐?”
나는 황당해서 되물었다.
내가 삐졌다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리엘은 고소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게 다 제네스 님 평소 대화법이 괴팍하니 그런 것 아니에요. 평소에 잘했어 봐요. 저희가 그랬겠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입 꾹 다물고 가만히 있지 않았냐. 그렇다고 사람을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하고 말이야. 그게 사람을 달 때는 삼키고 쓸 때는 뱉겠다는 심보가 아니고 무엇이냐.”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해요. 그러게 여관에서 밥 먹으라고 했잖아요. 자기가 굳이 가겠다고 부득불 우겼으면서.”
아오. 요걸 그냥.
이리엘의 얄미운 말투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대체 이 녀석을 어떡하지?
이리엘을 어떻게 골려 줘야 분이 풀릴지 고민하는 사이, 알렌 녀석이 팔에 엉겨 붙었다.
“아, 제네스 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마음 푸세요. 예?”
“참 나. 맨입으로 마음을 풀라는 소리가 나와? 날강도가 따로 없구나.”
“아, 제가 이번에 크게 한턱 쏘겠습니다. 그러니 마음 풀어 주세요. 예?”
하, 어이가 없어서.
이게 누구를 거지로 아나.
“고작 한턱 가지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겠다고?”
“그럼 두 턱 쏘면 될까요?”
그래.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지.
나는 넓은 아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위하는 녀석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이번에는 어물쩍 넘어가줘야지.
내가 말했다.
“한 번 한 번이 거해야 할 것이다.”
“아, 물론입죠!”
알렌이 내시처럼 굽신거렸다.
나는 그 모습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분위기를 맞춰 줬으니 제대로 뜯어먹어 줘야지 않겠나.
하지만 아직 모든 사안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한번 맞춰 준 거 가지고 더럽게 생색내네.”
나는 홀로 꿍얼거리는 이리엘을 바라보았다.
“저요? 저 왜요?”
나는 대답도 않고 그저 바라보았다.
너는 어쩔 것이냐는 의미가 그 시선에 담겨 있었다. 그것을 읽은 이리엘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내게 항변해 왔다.
“아, 진짜. 저는 저번에 카드놀이로 다 잃어서 남은 사비도 별로 없어요. 그때 돈도 많이 따 놓고 왜 그러세요. 그리고 저도 알렌 형님 때문에 같이 간 거잖아요. 전 죄가 없다고요.”
“그렇다는데?”
나는 알렌을 바라보았다.
“아, 이리엘. 잠깐만.”
알렌은 그녀를 붙들고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는 조용히 다독였다. 잠시 후, 이리엘을 어떻게 꿰어냈는지 그는 그녀를 내게로 보냈다.
입술을 삐쭉 내밀고 다가온 이리엘이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거하게 두 턱 쏘면 되죠?”
“아니. 넌 세 턱이다.”
“네? 왜요!”
“괘씸하니까.”
이리엘은 나를 보며 부르르 떨었다.
알렌은 그런 그녀를 향해 검지를 들어 보이며 한 번만 봐 달라는 식으로 울상을 지었다.
이리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세 턱.”
“진즉 그렇게 나올 것이지.”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똥 씹은 것처럼 구겨지는 이리엘의 얼굴을 보니, 그제야 속을 턱 막고 있던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듯하다.
“참 나. 그거 한번 맞춰 줬다고 무슨 생색을 저렇게 내는지. 지가 평소에 우리한테 하는 짓은 생각 안 하나 보지? 속이 아주 밴댕이가 따로 없다니까.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 가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비를…… 꿍얼꿍얼…….”
뒤에서 들려오는 쫑알거리는 소리에 심기가 불편해진 나는, 다시금 알렌을 바라보며 턱짓했다.
알렌은 재빨리 이리엘에게 다가가 그녀를 달랬다.
이리엘은 바닥의 돌을 한 번 걷어차고 나서야 얌전히 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간 성질머리하고는 쯔쯧.
그렇게 벼룩의 간까지 빼 먹고 나니, 우리는 어느새 커다란 저택 앞에 서 있었다.
* * *
은은한 빛이 어둠을 밀었다.
식탁에는 먹다 만 안주가, 바닥에는 빈 술병이 뒹굴고 있었다.
소파에 축 기대어 앉아 궐련을 뻐끔뻐끔 태우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세 명의 사내.
주황빛 조명 아래 비친 얼굴들이 하나같이 벌겋다. 눈이 몽롱하게 풀린 게 취기가 오른 듯했다.
개중 한 녀석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크하하. 아까 프렌치 놈들의 얼굴을 보았는가?”
“크큭. 보았지. 좋아 죽던데?”
“자기들이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그런 꼴이라니.”
“돈 몇 푼에 몸을 파는 천한 것들 아닌가.”
“하긴, 그놈들이 무얼 알겠는가. 그저 가축처럼 부리면 그만이지.”
그들은 낮에 보았던 이들의 희망 어린 표정을 떠올리며 한껏 조소했다.
“하여간 프렌치 것들의 무식함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흐흐, 반반해 보이는 것들도 꽤 되던데.”
“함부로 건들지 말라고. 자칫 흠이라도 생기면 네 목이 달아나.”
더러운 이야기 사이로 얼음장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스며든 것은 그때였다.
“아주 지X염병들을 떠는구나.”
난데없이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낄낄거리던 이들은 일제히 표정을 굳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긴장된 시선이 어둠에 잠긴 방 한편으로 향한다.
“그럼 너희들은 본인들의 앞날이 어찌 될지 잘 알고 있어서 그리 웃고들 계신 건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또다른 목소리. 어투는 농담조로 들렸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지독히도 싸늘했다.
소리를 좇던 이들의 목울대가 긴장감에 깊게 꿀렁였다.
“……누구시오.”
저벅저벅.
대답 대신 들려오는 발소리.
은은한 빛무리 안으로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