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제77화 수도를 향해 (2)
대화를 마친 나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드론과 대화도 끝냈으니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었다.
곧장 수도로 가면 되겠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알렌과 이리엘을 소집했다.
일정을 논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내 방을 찾은 것은 둘이 아니라, 셋이었다.
“안녕하세요. 무탈하셔서 다행이에요.”
세실리아가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널 부른 적은 없는데.”
내 말에, 옆에 있던 이리엘이 대신 답변을 해 왔다.
“세실리아 언니도 같이 놀려고요. 오늘이 마지막 밤이잖아요. 네더만 씨가 화끈하게 불태우자던데요.”
서로 대하는 태도를 보니 한 달 동안 함께 지냈다고 부쩍 친해진 티가 났다.
그런데 뭘 불태워?
내가 말했다.
“나는 분명 일정을 계획하자고 말했을 텐데.”
내 싸늘한 눈빛을 본 알렌 녀석이 호탕하게 웃으며 가슴팍을 내밀었다.
“제네스 님도 참. 어차피 목적지는 수도 아닙니까. 저희가 세세한 일정은 이미 준비해 뒀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테이난에서의 마지막 밤을 화려하게 장식하자고요.”
“맞아요. 네더만 씨가 술도 무지막지한 녀석으로 준비해 온다고 했단 말이에요. 기대해도 좋대요. 제네스님도 술 엄청 좋아하잖아요.”
이리엘이 말을 보탰다.
그래 맞다. 나는 애주가다.
그리고 네더만도 알아주는 애주가다.
녀석이 기대해도 좋다고 말한 술은 정말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혀를 한번 차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거다. 그러니 알아서 주량껏 마셔라.”
“오예!”
알렌과 이리엘은 신나서 펄쩍펄쩍 뛰었고 세실리아도 함께 웃었다.
이들 또한 익스퍼트 초급에 들어서기 위해 지금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고 한다.
저리 좋아하는 걸 보면 진짜인 거 같기도 하고.
술자리는 식당에서 시작됐다.
푸짐한 음식과 값비싼 명주들이 식탁 위로 오르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네더만은 술자리가 시작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나만 빼고 즐기면 쓰나!”
아마 카드론과 이야기를 나누고 왔을 테지.
그가 참여하자 분위기는 금세 무르익었다.
네더만이 함께 한 이후로 말 많은 놈들이 셋이 되니 정신이 다 사납다.
나는 창가에 서서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 내 옆으로 신나게 이야기하던 네더만이 다가왔다.
혀가 반쯤 고부라진 게 취기가 올랐나 보다.
녀석뿐만 아니라 다들 코가 반쯤 비뚤어져 있었다.
저 세실리아도 풀어진 모습을 보일 정도니, 알렌과 이리엘은 어떻겠는가.
가관이다.
이곳이 테이난 후작가가 아니라, 시장 바닥에 있는 주점이라도 된 것 같다.
“휘유, 저 녀석들 젊어서 그런가. 술도 말술이구만.”
나는 네더만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술을 기울였다. 그가 물었다.
“수도에 들렀다가 움직인다고?”
“그래야지. 본래 목적이 그곳에 있으니.”
카드론에게 얻은 정보로는 우리는 곧장 소해 쪽으로 움직여야 옳다.
얻은 정보들의 방향이 그곳을 향하니.
하지만 그것은 우리 여정의 진짜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수도에 가서 뭐 하려고? 거기에 떨어질 콩고물이라도 있나?”
“할렌트를 벨 거다.”
푸웁!
잔을 기울이던 녀석은 망나니처럼 허공에 술을 뿜었다. 그는 소매로 입 주변을 황급히 훔치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흰자위가 훤히 보일 정도로 눈을 크게 뜬 채였다.
“미친! 누구를 벤다고? 그게 가능해?”
“너야 불가능하겠지.”
“……재수 없는 놈.”
그는 긴장했던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할렌트의 목을 베겠다는 미X놈이나 그걸 믿고 있는 나나. 대체 누가 미친 건지.”
“둘 다 미치지 않았다.”
“역시! 이 몸이 미쳤을 리가 없지.”
씩 웃은 녀석이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내 도움은 필요 없지?”
“물론.”
“그래도 조금은 고민해 주지 그러나.”
“고민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나는 먼저 포르센 항구에 가 있을까 하는데.”
“마음대로.”
세자의 생존 여부는 ‘굽이치는 해협’ 입장에서도 중요한 문제.
그 또한 우리와 함께 포르센으로 함께 움직일 요량이었다.
하지만 굳이 수도까지 같이 들를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할렌트를 베는 것은 나 혼자 처리할 문제니까.
그러니 차라리 그가 미리 가서 정보를 정리해 둔다면 일이 수월하게 흘러갈 것이다.
“설거지가 하기 싫어서는 아니야.”
“다른 데로 새지 말고 일이나 똑바로 해 놔.”
“허. 나를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겐가. 내가 어디 괜찮은 술집에라도 틀어박혀 있을까 봐?”
“그래. 확신하고 있지.”
지금까지 봐 온 녀석의 품행을 봤을 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와 따로 움직이려는 이유도 먼저 가서 뺀질거리고 있겠다는 뜻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말을 보탰다.
“포르센 항구의 술집에서 여생을 끝내고 싶지 않다면 할 일을 제대로 해 놔야 할 거야.”
“혹시 몰라 묻는데, 이거 죽이겠다는 협박은 아니지?”
“그거 맞아.”
“……빌어먹을 놈. 좀 유연해질 생각은 없는가? 날 보고 좀 배워 보라고. 원한다면 가르쳐 줄 수도 있어. 사람이 그렇게 날붙이 같아서 쓰나.”
“지금 당장 죽고 싶다고?”
“그럴리가. 나는 오래 살아야 한다네. 저기 고주망태 친구들과 더 놀아야 하거든.”
히쭉 웃은 네더만은 손을 흔들며 황급히 멀어졌다.
나는 그제야 검병에서 손을 뗐다.
다음 날.
우리는 태양이 떠오르자마자 카드론과 세실리아의 배웅을 받으며 테이난성을 나섰다.
이야기는 어제 충분히 했으니 간단한 인사가 다였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네더만과도 길을 갈라섰다.
“그럼 포르센 항구에서 보자고! 나 없다고 울지들 말고!”
그는 언제나처럼 실없는 소리를 하며 멀어졌다.
간만에 셋이 된 우리는 수도를 향해 힘껏 달렸다.
* * *
“휘유, 간만에 도시구만.”
알렌은 복작이는 사람들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는 어느덧 수도를 일주일 거리에 두고 있는 도시, 페르펜에 도착해 있었다.
크게 번영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수도에 가깝다 보니 유동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다들 뭘 보는 걸까요?”
이리엘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나는 사람들마다 손에 유인물을 한 장씩 쥐고 있었다. 넉살 좋은 알렌이 지나가는 이를 붙잡으며 물었다.
“그게 뭡니까?”
“아, 총독부에서 괜찮은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는군요. 저편에 가면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저편을 가리키며 친절히 말했다.
일자리에는 관심은 없었지만, 우리가 가려는 길과 사내가 가리킨 방향은 우연히도 같았다.
잠시 후 우리는 사람들이 모여 우글거리는 광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작은 무대 위.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와 호감형의 여자가 활짝 웃으며 선전물을 나눠 주고 있다.
“자자, 소중한 일자리를 찾아가세요. 자주 있는 기회가 아닙니다. 단 몇 년만 투자하시면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요. 인장 보이시죠? 총독부에서 추진하는 일입니다. 확실히 보증된 일자리라니까요.”
“여기도 한 장 주게!”
“여기도!”
허공을 향해 뻗어진 손에 유인물을 하나씩 끼워 주는 이들.
마치 떨이를 파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 사람이 말한 게 이건가 본데요?”
이리엘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주워 들었다.
사람들이 들고 다니던 것과 같은 유인물이었다.
발자국이 찍혀 있지만, 내용은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그 종이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에? 진짜로?”
“총독부에서 이런 일도 한다고요?”
“그러니까.”
알렌이 눈을 가늘게 뜨며 턱을 문질렀다.
이리엘은 쥐고 있던 선전물을 내게 건넸다.
“이거 한번 봐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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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문구지만 상당히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나이를 제외하고는 딱히 따라붙는 조건도 없는데, 급여가 매달 5골드다.
보통 4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를 3골드로 계산하니, 5골드면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현 프렌치아의 상황으로는 3골드도 벌기 어려운 판국인데 이 정도 금액을 주다니.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게 걸리겠지만, 시민 대부분이 지금 받는 품삯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였다.
“이거 왠지 냄-.”
“저기…….”
알렌의 혼잣말을 자르며 들어온 낯선 목소리에 우리의 시선이 집중됐다.
녹색 머리칼을 틀어 올린 여자가 알렌을 수줍게 바라보고 있었다.
알렌 녀석도 당황했는지 허둥대며 물었다.
“저요?”
“실례합니다만, 혹시 남부 아츠리스 지방에 있는 베르텐 마을에서 거주한 적 있으신가요?”
“네?”
알렌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묻자, 얼굴을 붉힌 여자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알던 사람이랑 헷갈렸나 봐요. 죄송합니다.”
“자, 잠깐만요.”
알렌이 다급히 도망치려는 여인을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베르텐이 제 고향이기는 합니다만……. 누구신지?”
알렌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린 그녀는 알렌의 어깨를 치며 알은체를 해 왔다.
“역시 알렌 오빠 맞죠? 오빠! 저예요! 데이지!”
“뭣! 데이지? 네가 그 울보 데이지라고?!”
“네! 제가 그 데이지예요!”
반가움에 활짝 웃는 그녀를 보며 알렌 또한 눈을 왕방울처럼 크게 떴다.
“아니, 네가 왜 여기에?”
“저희 가족 모두 여기 살아요. 전쟁 통에 이쪽으로 올라온 지 한참 됐어요. 진짜 이게 얼마 만이에요!”
“내가 17살 때 보고 못 봤으니까…… 13년 만인가?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잘 계시고?”
“그럼요! 다 잘 계세요.”
“알스는?”
“오빠는 지금 여기 없어요.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데이지의 말에 알렌은 진심으로 땅을 치며 아쉬워했다. 대화를 들어 보니 어릴 때 각별하게 지냈나 보다.
“오늘 저녁에 뭐 하세요?”
“딱히 뭐 없는데.”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 식사 대접해 드릴게요!”
“진짜?”
알렌이 나와 이리엘을 보며 눈치를 보았다. 혼자 가기는 그렇고, 입이 세 개면 준비하는 이도 부담이 될 법해서 그런 듯했다.
그 마음을 눈치챈 데이지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동료분들이랑 같이 오세요! 13년 만인데 한 끼 식사를 대접해 드릴 여유는 있다구요!”
다시 나를 바라보는 알렌.
녀석의 눈빛에는 꼭 가고 싶다는 호소가 별처럼 박혀 있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그제야 머리를 긁적이며 헤벌쭉 웃었다.
“그럼 그럴까?”
집의 위치를 친절히 설명해 준 그녀가 떠나자, 이리엘은 먹잇감을 사냥하는 맹수처럼 알렌에게 달려들었다.
“알렌 형님 뭐예요! 어떻게 아는 분인데요? 전에 친하게 지냈어요? 엄청 예쁘시던데!”
“알스라고 나랑 가장 친했던 녀석의 여동생이야. 너무 예뻐져서 전혀 못 알아봤네.”
“13년이면 소녀가 숙녀가 되기 충분한 시간이죠!”
“그러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여기서 이렇게 고향 사람을 다 만나다니…….”
“그게 다예요?”
이리엘이 입꼬리를 씰룩이며 알렌의 옆구리를 찔러 대자, 알렌은 붉어진 얼굴로 그런 것이 아니라며 데이지와 자신은 그저 친한 오빠, 동생 사이일 뿐이라고 학을 뗐다.
그 꼴을 가만히 보니,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다.
“그냥 오랜만에 봐서 반가워 그런 거라니까.”
“뭐, 일단 믿어는 드릴게요.”
나는 아옹다옹하는 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쯤하고 숙소나 찾아보거라. 짐을 정리해야 저녁을 먹으러 갈 게 아니냐.”
“아, 넵!”
우렁차게 답한 알렌이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보며 쿡쿡거리던 이리엘이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거 진짜일까요?”
내 손에는 여전히 선전물이 쥐어져 있었다.
“그럴 리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끝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나는 내력으로 그것을 단숨에 불살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