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제74화 지나가야겠다 (4)
로열나이트.
그 이름만으로도 전장을 떨게 만드는 기사단.
비대칭 전력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총독부 최강의 전력.
일반 병사들에게 그들의 존재란 하늘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로열나이트의 수장, 이즈멜이 한 사내의 등에 검을 겨눈다.
“잠시 미뤘던 사형을 집행하겠다.”
묵직한 목소리에 일대가 숨을 죽였다.
주변의 공기가 가라앉는 듯했다.
“네놈은 결코 이곳을 살아서 지나치지 못할 것이야.”
이즈멜은 형벌을 선고하는 재판관처럼 사내의 운명을 판결했다.
그 선언을 따라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매화나무에서 떨어진 붉은 꽃잎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그제야 등을 보이고 있던 사내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흰사자 가면이 차오르는 달처럼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내가 만만히 보였나 보군.”
흰사자의 손끝에서 서슬 퍼런 백색의 칼날이 뽑혀 나온다. 가면 뒤에서 형형히 타오르는 안광이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단단히 막혀 있는 포위벽을 보고도 그는 기세를 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 오만한 말을 꺼내었다.
“너희를 지나가야겠다.”
그의 앞으로 로열나이트와 까마귀 기사단 그리고 고도의 훈련을 거친 정예병들이 첩첩이 깔려 있음에도 그랬다.
그 무지함에 몇몇은 본인의 귀를 의심했고, 몇몇은 고개를 내저었으며, 또 몇몇은 비웃음을 흘렸다.
이곳에 서 있는 누구도 그 말을 무겁게 여기지 않았다.
지난 3일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도망치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그의 무력은 소문을 통해 익히 들었으나, 체력이 한계에 이르렀을 지금은 궁지에 몰린 늙어 빠진 사자와 다름없었다.
그는 절대 이곳을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개전!”
이즈멜의 호령과 함께 전장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그들이 전면에 나섰다.
로열나이트들이 나선 이상, 다른 이들은 그저 구경꾼에 불과했다.
슈슈슈슈슉!
흐릿한 그림자만을 남기며 빠르게 쇄도하는 로열나이트.
그런 이들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흰사자.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모두 생각했다.
그때였다.
검은 그림자 사이로 시리도록 푸른 섬광이 피어난 것은.
주먹을 쥔 손아귀 사이로 빛줄기가 새어 나오듯, 그를 덮쳐 가던 로열나이트의 전열 사이로 새파란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콰르르릉!
천지를 뒤흔드는 울음소리와 함께.
그것을 기점으로 대지가 갈라지고 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전투가 이어졌다.
그 전장에서 일어난 충격파가 주변을 삽시간에 휩쓸며 폐허로 만들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은 후폭풍이 미치지 않는 영역까지 걸음을 물려야 했다.
“…….”
다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앞의 전장에 집중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흰사자의 움직임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까닭.
그렇게 집중했음에도, 그들은 로열나이트들의 사이로 흐릿하게 움직이는 신형과 푸르게 발광하는 궤적과 그 뒤를 따르는 굉음만을 좇을 뿐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여기 있는 누구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장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음은 명백히 보였다.
총독부 최강의 전력이라 일컬어지는 로열나이트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촤악―!
그들의 수장, 이즈멜마저 번쩍이는 섬광에 삼켜져 반으로 갈라졌다.
로열나이트가 전멸한 것이다.
그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유히 걸어 나오는 흰사자.
그가 걷는 걸음만큼 포위벽이 뒤로 물러난다.
그는 별다른 기세를 뿜어내지 않고도, 홀로 기백에 이르는 병사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 * *
콰과과과광!
사위를 헤집는 사나운 검격에 폭음이 뒤따랐다.
나는 적들의 포위망을 일점 돌파하고 있었다.
포위망은 겹겹이 쌓여 있었다.
한 겹을 걷어 내면 새로운 것들이 내 앞을 막아 왔다.
나는 그저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었다.
사방에서 들이치는 칼날이 한 번의 손짓으로 지워진다.
물레방아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검격에는 일말의 자비도 담겨 있지 않았다.
“끄아악!”
“뒈져라!”
적들의 비명과 고함이 폭발음과 죽음으로 삼켜졌다.
숲에서는 천재지변이 일어난 듯 거대한 굉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콰과과과광!
다시 한번 성난 칼날이 사위를 휩쓸었다.
붉은 핏물이 번쩍이는 섬광의 궤도를 따라 해일처럼 치솟아 올랐다.
전장에서 일어난 굉음이 천지를 둥둥 울리고 있었다.
나는 그 울림이 하늘까지 전해지길 바랐다.
먼 길을 떠난 그가 들을 수 있도록.
그러다 보니 나는 어느새 너른 평원을 앞에 두고 있었다.
숲이 끝났다고 적의 추격이 끝난 것은 아닐 것이나, 더는 내 걸음을 잡을 수 없을 거다.
상황이 종료된 것이다.
“할렌트 바레인.”
나는 그 이름을 조용히 곱씹었다.
그를 향한 적의가 차고 넘쳐 바깥으로 흘러내린다.
나는 저 멀리로 시선을 두었다.
수도, 마그네트.
그곳에 그가 있을 터였다.
“조만간 보자.”
기대해도 좋을 거다.
그다지 유쾌한 만남은 아닐 테지만.
* * *
흰사자가 포위망을 뚫었다는 소식은 3일이 지나서야 할렌트 바레인에게 전해졌다.
“…….”
그는 전서조를 통해 날아온 보고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안에는 로열나이트의 전멸 소식과 전반적인 피해 또한 함께 적혀 있었다.
“그럼에도 놓쳤다?”
할렌트의 눈빛이 싸늘히 식었다.
그를 잡기 위해 감수한 손실이 만만치 않았다.
병력 손실은 물론이거니와 스티스시가 입은 재산 피해까지.
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그를 놓쳤다.
특히나 로열나이트의 전멸은 개중에서도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전에 당한 초원의 들개까지 생각하면…….
으득.
종이를 구겨 쥔 할렌트가 이를 갈았다.
‘흰사자의 전력이 대체 어느 정도인 거지?’
그의 강함이 가늠되지 않는다.
이번 작전은 녀석의 무력을 최대치로 예상하고 계획한 작전이었다.
그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걸 예상했기에, 처음부터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고 시간을 끌어 그를 지치게 했다.
로드르의 몸에 저주 마법을 새겨 놓은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정확한 위치를 추적이기 위함이기도 했고, 그와 함께라면 흰사자의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을 테니.
바로 직전의 보고까지만 해도, 상황은 자신의 예상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이겨 냈다.
‘내가 예측한 전력을 뛰어넘는다는 의미.’
대체 그런 전력이 지금까지 어디 있다가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왔단 말인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할렌트는 머리를 차갑게 식히며 아직 답을 내릴 수 없는 물음들을 의식 아래로 가라앉혔다.
당장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로드르 헤이어서의 죽음을 공표하고, 흰사자는 큰 부상을 입고 도주했다고 알리거라.”
“충!”
거수경례한 부하가 나가고, 할렌트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깔끔히 정돈된 턱수염을 쓸었다.
상황이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 버렸다.
로드르를 공개 처형하는 것으로 녀석이 일으킨 불길을 잠재우려 했지만, 오히려 그것에 적당한 바람을 불어넣은 셈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녀석 또한 원하는 바는 이루지 못했으니 완전한 패배는 아니었다.
로드르를 눈앞에서 잃었을 그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터.
녀석의 검은 이제 자신을 향하겠지.
할렌트는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가, 이내 싸늘히 표정을 굳히며 너른 창을 응시했다.
그와의 만남이 벌써 고대가 된다.
“네놈이 일으킨 불길이니, 네놈의 죽음으로 그 불길을 잠재우면 되겠지.”
그로부터 다시 4일이 지났다.
로드르의 죽음과 흰사자의 부상에 대한 소식은 프렌치아 곳곳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결국, 영감은 죽었군…….’
리포드는 로드르의 형형한 눈빛을 되새기며 씁쓸한 감정을 억눌렀다.
성문을 넘었기에 혹시나 했건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흰사자가 살아 있다는 건 프렌치아 입장에서 다행인 소식이었다.
“괜찮겠죠?”
레이나가 물어 왔다.
부상을 입고 도주한 흰사자에 대한 염려였다. 옆에 있던 사르페가 입을 열었다.
“추격은 뿌리친 것 같으니, 괜찮을 거야.”
녀석의 말대로다.
어느 정도의 부상인지는 모르지만, 심각한 부상이었거나 추격 중이었다면 이런 정보를 공표하지 않았을 터.
놓친 게 분명했다.
부상의 정도야 모르지만, 어떻게든 살아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나저나 정말 믿기지 않습니다. 그 포위망을 뚫었다니.”
사르페는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까지 스티스시는 완전히 봉쇄되어 누구도 오갈 수 없던 상황이었다.
흰사자를 잡을 포위망을 구축하기 위해 성문 전체를 닫은 까닭.
혹여 추가적인 도움이나, 흰사자가 시민들에 섞여 들 혼란을 막기 위해서였겠지.
어쨌거나 이번 작전은 하나의 도시를 폐쇄할 만큼 총독부에서도 공을 들인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녀석은 그것을 뚫고 도주했다.
“아티팩트를 괜히 썼어. 도와주지 않았어도 도망쳤을 놈인데 말이야.”
리포드가 툴툴거리자, 레이나가 픽 웃으며 말했다.
“이미 사용한 거 아까워하면 더 없어 보여요.”
“빌어먹을.”
리포드는 의자에 신경질적으로 털썩 주저앉아 궐련을 집어 들었다.
“어쨌거나 할렌트도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프렌치아가 오래만에 크게 들썩이겠어.”
로드르는 죽었지만, 흰사자를 놓쳤으니 사실상 그의 패배나 마찬가지.
할렌트의 자존심에도 금이 갔을 터. 이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리포드는 궐련에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뿜어냈다.
“앞으로 꽤나 흥미진진해지겠군.”
지난 10년간, 프렌치아의 격동은 점차 식어 가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갈수록 총독부의 통제에 적응하고 있었고, 독립은 막연해져만 갔다.
하지만 흰사자의 등장으로 오랜만에 전과 같은 뜨거운 열망이 프렌치아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리포드가 다시 한번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그만큼 위험하겠지만 말이야.”
홀로 프렌치아를 휘젓고 있는 흰사자.
과연 그가 일으킨 불길이 얼마나 거세게 프렌치아를 집어삼킬지 기대가 되는 바였다.
“우리도 그때를 위해 제대로 된 준비를 해 둘 필요가 있겠어. 이대로 녀석의 마차를 얻어 타고 갈 수 없잖아.”
그는 눈빛을 빛내며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 의미가 있지 않겠어?”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들 또한 원하는 바.
흰사자를 응원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따르는 건 눈앞에 있는 리포드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들러리나 서려고 지금까지 개고생한 건 아니니까. 그딴 짓은 죽어도 못하지. 내가 10년간 고생한 게 얼마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