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제71화 지나가야겠다 (1)
“어처구니가 없군. 이게 소드 마스터의 힘인가?”
로열나이트의 단장, 이즈멜은 발끝에서 성문까지 이어지는 한 줄기 검흔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만들어 냈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는 흔적.
“……정말 엄청나군요.”
옆에 선 부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에 동의했다.
적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검을 쥐었음에도 이것이 검으로 가능한 일이란 걸,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소드 마스터는 세기의 천재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닌가 보다.
“이제 대륙의 소드 마스터는 5명이 되겠군.”
이즈멜은 묵직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아주 잠시 동안만.”
그의 무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들이 만든 덫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피골로 만들어진 같은 인간.
그의 힘은 무한하지 않다.
“출전 준비를 하고, 현 상황에 대한 전서구를 날려라.”
“충!”
부단장이 떠나간 후에도 이즈멜은 한참 동안 서서 그 잔해를 바라보았다.
‘과연 총독 각하. 모두 그분의 예상대로다.’
그의 전력은 막강했지만, 그가 이 포위망을 뚫은 것은 사실 자신들이 의도한 바였다.
할렌트는 흰사자의 전력을 대륙을 뒤흔드는 현시대 최강의 검사들과 동일 선상에 두고 작전을 세웠다.
그랬기에 일부로 초원에 풀어 준 것이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면, 막대한 피해가 있었을 터.’
할렌트는 그와 굳이 정면으로 맞서지 말라 했다.
적을 궁지에 몰지 말라는 의미.
이런 무력을 가진 그와 전력을 다해 충돌했더라면 아군의 피해는 지금의 수배에 이르렀을 터였다.
애초에 자신들의 작전은 그를 평원에 풀어 놓고 밤낮없이 괴롭히며 지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맹수를 사로잡기 전에 그 힘을 최대한 빼 놓겠다는 계획인 셈이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할지라도 몇 날 며칠을 잠도 못 자고 시달리면 무너질 수밖에 없을 테니.
모두 로드르가 그의 발목을 잡고 있기에 가능한 일.
그렇게 지친 녀석을 상대로라면 보다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테지.
녀석은 모르겠지만, 이미 녀석의 목에는 목줄이 채워져 있었다.
어디로 도망가든 그는 자신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안의 낯이 궁금하구나.”
이 정도의 무력을 가진 자의 나이와 지금까지 어디에 있다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자신들 또한 국민들 못지않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즈멜은 그런 그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곧 내 앞에 무릎 꿇게 될 테니.”
검의 정점인 소드 마스터를 자신의 손으로 잡는다니.
기사로서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 *
바람을 가른 화살이 과녁 정중앙에 꽂힌다.
한 점을 중심으로 빽빽이 꽂혀 있는 화살들.
그 화살의 주인, 이리엘은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낯선 인기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활터로 누군가 들어서고 있었다.
“아, 오셨어요.”
이리엘은 바구니를 들고 온 세실리아를 묵례로 맞이했다. 세실리아가 바구니를 들어 보이며 빙긋 웃었다.
“이것 좀 먹고 해요.”
“오, 뭐예요?”
“샌드위치를 만들어 봤어요.”
이리엘은 반짝이는 눈망울로 바구니 안쪽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엄청 맛있겠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알렌 형님과 네더만 씨는요?”
“대련 끝나고 먹는대요.”
“아아.”
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따로 검술 대련 중에 있었다. 요새 그 때문에 알렌의 입에서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자신의 입에서도…….
그녀는 그다음 차례였다.
제길.
세실리아는 샌드위치를 이리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네더만 아저씨가 저렇게 열심히 훈련시켜 주는 거 처음 봤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기사들 좀 봐 달라고 하셔도 매번 귀찮다고 손을 내젓던 분이거든요.”
“아아, 제네스 님 때문에 그래요. 돌아올 때까지 저희 익스퍼트에 올려놓으라고 했거든요. 그러지 못하면 저 사람 죽어요. 그러니 열심히죠.”
이리엘은 쌤통이라는 식으로 쿡쿡 웃었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인다는 말, 농담이 아니었어요?”
“누가요? 그 인간이요? 그 사람 농담 안 해요. 그러니 일단 필사적으로 하는 수밖에요.”
“그래서 저렇게 열심히셨구나.”
빙긋 웃은 세실리아는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오늘이네요.”
“네, 그러게요…….”
이리엘이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그녀의 눈은 평소보다 퀭했다.
어젯밤 잠을 설친 까닭이다.
“많이 걱정되나 봐요.”
“네? 걱정이요?”
이리엘이 눈썹을 올리며 되물었다. 세실리아는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과녁을 가리켰다.
“오늘따라 유독 집중력이 떨어져 보이는 거 같아서요.”
매번 중앙에만 몰려 있던 화살들이 오늘은 중앙을 벗어난 화살도 여럿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매우 훌륭한 수준이었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보인 실력에 비하면 확실히 부족했다.
이리엘은 그것을 보고는 더 이상 발뺌하지 못했다.
“뭐, 제 발로 드래곤 레어에 들어간 격이니 걱정은 되죠. 아무리 강하더라도 위험할 테니까.”
“그렇죠.”
그런 이리엘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은 세실리아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네스 님 어떻게 생각해요?”
“네?”
이리엘은 깜짝 놀라 되묻고는, 오히려 역으로 세실리아에게 질문했다.
“세실리아 님이야말로 어떻게 생각하시는 데요? 혼인할 수도 있는 사이 아니에요?”
“그냥 아버지의 바람일 뿐이죠.”
세실리아가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분 어떤 사람이에요?”
“……뭐, 보이는 그대로예요. 싸가지 없고, 말도 못되게 하고, 툭하면 협박하는 사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 것 같더라고요.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받고 나니까 좀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요.”
“그, 그럼 세실리아 님은 혼인에 찬성하세요?”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 마당에 소드 마스터라니까 그럴까도 했는데, 그쪽에서는 저한테 아예 마음이 없는 것 같고 경쟁자가 워낙 세서 그냥 말았어요.”
“네? 경쟁자가 있어요? 누구요?”
세실리아가 슬쩍 웃었다.
“그러게요? 누굴까요. 어쨌든 꼬셔 볼까 하다가 말았어요. 넘어올 것 같지도 않고요.”
“그 사람이 이상한 거죠. 제가 남자라면 바로 넘어갔을 텐데.”
“그럴까요?”
“아유, 그럼요. 마음 같아서는 세실리아 님한테 우리 오빠 소개해 주고 싶은데. 그 인간보다는 훨씬 괜찮은 사람이라고요!”
“이리엘 님 오빠면 잘생겼겠다.”
“성격도 자상해요. 저 같은 동생을 둬서.”
“그렇겠네요.”
“왜 한 번에 이해하시는 건데요?”
“농담이에요.”
“아니잖아요.”
“티 났어요?”
“엄청.”
눈을 마주친 둘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웃음을 그친 세실리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로드르 님을 구하는 게 정말 가능할는지…….”
로드르 헤이어서는 그녀 또한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쓴 저서들도 책장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고.
“실제로 뵙고 싶기도 하거든요.”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이번에도 괜찮을 거예요. 아마도.”
“그럴까요?”
“네. 자신 있게 말했으니 잘 모셔 오겠죠. 저는 오히려 로드르 님께 잡일을 시킬까 걱정이네요. 그런 사람이니까.”
“네? 설마요.”
제네스는 자신의 상식을 벗어난 사람이었다.
용 사냥꾼도 설거지시키는 마당에, 전 재상이었다고 못 시키겠는가.
제네스의 하극상을 상상하던 이리엘은 문득, 레논 보육원 원장을 떠올렸다.
가만 보면 그분한테는 예의 있게 대화를 했었다.
“농담이에요. 설마 로드르 님한테까지 그러겠어요.”
이리엘은 말을 정정하며 자신 없게 웃었다.
* * *
로드르가 나를 보았다.
우리 앞으로는 잘 익은 토끼 고기가 놓여 있었다.
내가 구운 거다.
“고맙네.”
“드시고 얼른 기운 차리세요.”
고개를 끄덕인 그가 살코기를 뜯었다.
뼈를 쥔 팔이 토끼 뼈만큼이나 가냘팠다.
뼈와 가죽만 남은 앙상한 몸.
이러니 충격을 조금도 버티지 못하지.
일단 기력부터 회복시켜야 속도를 내든 놈들을 베든,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기를 우물거린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정말 맛있군.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야.”
로드르는 체면치레도 않고 고기를 마구 먹어 댔다.
감옥에서 10년간 쓰레기 같은 풀죽만 먹었을 테니 얼마나 맛있겠는가.
“기껏 구해 드렸더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니요. 오래 사셔야지요.”
내 말에, 그는 씩 웃었다.
나는 고기를 먹기 좋게 떼어 그의 앞에 놓인 풀잎 그릇에 놓아 주었다.
사부님도 돌아가시기 전에는 저렇게 야위었었지.
막대한 내공도 세월의 흐름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그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왠지 돌아가시기 전의 사부님 생각이 난다.
내가 이래서 유독 백발에 약하다.
“자네가 이렇게 젊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네.”
그는 나를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기절했다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된 대화는 지금이 처음이었다.
“내가 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소드 마스터인 건가?”
“네.”
검을 익히지 않았어도, 내가 벌인 일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는 잘 알고 있을 터.
“프렌치아 사람인가?”
“그렇죠.”
“아직 프렌치아의 운이 다하지는 않았나 보구만.”
그는 나를 보며 흘흘 웃었다.
소드 마스터의 존재는 국가 권력과도 직결되는 문제.
내 나이를 생각하면 호재일 수밖에 없었다.
“자네를 볼 낯이 없군.”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나라를 물려주어 미안하네.”
그는 툭 내뱉었지만, 진심이 담겼다는 걸 알았다.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적어도 이런 고기를 먹을 일은 없었지 않았겠나.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맛있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소드 마스터가 받는 대접을 생각하면 맞는 말이기는 했다.
소드 마스터라면 어느 나라로 귀화해도 부귀영화가 줄줄이 따라붙을 테니.
하지만 그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라의 재상이었던 자도 먹는데, 소드 마스터라고 못 먹겠습니까.”
“흘흘흘. 그건 맞는 말이군.”
그는 소탈하게 웃었다.
나라의 재상이었던 자와 소드 마스터가 깊은 산속에서 노숙을 하며 고기를 뜯는 꼴이라니.
참 나라 꼴 잘 돌아가고 있다.
“부탁 하나 해도 되나?”
“뭡니까.”
“나를 버려야 살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가차 없이 버려 주게.”
단호한 눈빛이었다.
그의 모든 기품은 이제 저 푸른 눈에 담긴 듯했다.
볼품없는 행색의 노인이지만, 귀화처럼 타오르는 눈빛에는 여전히 위엄이 서려 있었다.
나는 별 시답잖은 말을 다 한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런 순간이 온다면 버리지 말래도 버릴 겁니다.”
“푸하하하. 마음에 드는 청년이군.”
“그러니 최대한 많이 먹고 기운 차리세요. 마지막 고기다 생각하시고.”
호탕하게 웃은 그는 고기 맛에 집중했다.
표정이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는 듯하다.
나는 저러다 그가 진짜 죽을까 싶어 살뜰히 살폈다.
오랜만에 수발을 들고 있다 보니 자연스레 알렌 녀석이 떠올랐다.
자식, 지금쯤 아주 편하게 있겠지.
이리엘도 마찬가지이겠고.
아. 아니려나?
오기 전 네더만에게 단단히 당부했던 일이 떠올랐다. 둘을 익스퍼트 경지에 올려놓지 않으면 죽일 거라 협박해 두었다.
두 녀석 모두 상급 마나 유저 끝자락에 있었기에 최상급에 이른 자의 열정적인 가르침이 있다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네더만이 실없게 굴어도 실력은 확실한 놈이니까.
어쩌면 그 녀석들, 나보다 더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꼬였던 마음이 금세 편안해졌다.
“다 드셨어요?”
오랜만에 먹는 고기라 그런지 식사량은 적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가죠. 다시 업히세요.”
“이거 완전 갓난아이가 된 기분이군.”
나는 투덜거리는 그를 다시 업고 천으로 꼭 맸다.
사실 이렇게 여유 부릴 시간은 없었다.
나는 점차 조여 오는 포위망을 느끼고 있었다.
어렴풋이 전해지는 기척만 보아도, 스티스시에 둘려져 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포위망이었다.
가히, 천라지망이라 해도 무방하겠지.
마교 놈들 이런 기분이었나.
갑자기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상당히 X같았겠군.
하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했었다.
로드르의 상태를 알고 있던 이들은, 내가 그와 함께 가기 위해서는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을 테니.
그렇기에 각오는 해 두었다.
성을 벗어나는 것보다, 이 파레안숲을 벗어나는 게 더 험난한 여정이 될 거란 걸.
어차피 달리 방법은 없었다.
속전속결로 이곳을 뚫는 것만이 유일한 타개책.
내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로드르의 체력.
나는 그를 업고 다시금 숲을 달렸다.
그리고.
그렇게 3일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녀석들의 덫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