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제68화 심판의 광장 (3)
리포드는 처형대에 오르는 가냘픈 노인을 보았다.
헤쳐진 백발에 허름한 옷가지를 걸치고 있는, 꾀죄죄한 몰골의 노인.
‘……벌써 10년이 지났나.’
당당했던 풍채를 잃어버린 그를 바라보며 리포드는 지나간 세월을 가늠했다.
‘노인네, 아직 안 죽었군.’
하지만, 광장을 내려다보는 그의 푸른 눈동자는 추레한 몰골과 달리 여전히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리포드는 그런 그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과거의 그가 겹쳐 보인 탓이다.
오래전, 왕실 기사단 레오니랜서의 일원이었던 자신은 간혹 로드르의 호위 임무를 수행했었다.
얼마나 깐깐하고 까탈스러웠는지.
매번 빌어먹을 영감탱이라며 씹어 댔었지.
행색은 남루해졌지만, 눈빛만큼은 그때의 기개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금방이라도 예전처럼 불호령을 떨어뜨릴 것 같은 그 모습에, 리포드는 잠시나마 평화로웠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왕궁은 참으로 빛나고 따뜻했었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지만.
빌어먹을.
리포드는 별들의 무덤 위에서 무릎이 꿀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프렌치아를 받치던 커다란 기둥이었던 자.
그런 그의 무릎이 꿇어지니, 꼭 프렌치아가 무릎을 꿇는 것 같아 마음이 쓰리다.
‘그래도 여태까지 용케도 살아 계셨소.’
그가 프렌치아에서 가졌던 위상을 생각했을 때, 지금까지 살아 있던 게 오히려 기적이었다.
비록 할렌트의 더러운 술수에 이용되어 참담한 말로를 걷게 되었지만…….
이 공개 처형 저변에 깔린 의미를 그도 알고 있을는지.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었다.
그토록 프렌치아를 사랑했던 자가, 프렌치아의 새로운 희망을 꺼트리며 죽어야 한다니.
그는 본인의 죽음으로, 프렌치아의 마지막 숨통을 끊게 될 터였다.
할렌트는 이런 때를 대비해 그를 살려 두었던 것일 테고.
적이지만, 참으로 대단하기 그지없는 자다.
‘개X같은 새끼.’
모든 상황은 녀석의 의도대로 수월하게 흐르고 있었다.
“지금부터 죄인, 로드르 헤이어스의 죄목을 낱낱이 공표하겠다!”
마력을 품은 기사의 목소리가 광장 끝까지 쭉쭉 뻗어 갔다.
기사는 손에 쥔 두루마리를 펼치고 로드르 헤이어서의 죄목을 낱낱이 고했다.
그가 부르짖는 로드르의 죄는 여기 있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제국과 프렌치아가 역사적인 합병에 성공했음에도 과거에 파묻혀 그 합병의 의미를 훼손한 죄.
본인을 따르는 이들을 이용하여 나라의 분란을 조장하고 반란을 꾀한 죄.
이런 것들이 그의 죄였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나라를 빼앗은 도둑놈이 나라를 빼앗긴 이에게 죄를 묻고 있으니,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것에 반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광장에 선 시민들은 일말의 웅성거림도 없이 그저 그의 죄목을 듣고 있었다.
그것이 합당해서가 아니라,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바로잡을 힘이 없기에.
지금껏 별들의 무덤에서 스러진 별 중, 그 죄목이 합당한 자가 누가 있었겠는가.
자신의 나라를 위해 싸운 수많은 이들이 전범으로, 역적으로 목이 떨어졌다.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나.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그것마저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X같은 거지.’
그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었다.
별들의 무덤은 총독부에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만든 처형대였다.
이곳에 모인 음유시인과 용병, 상인, 여행객들은 지금과 같은 참혹하고 원통한 현실을 프렌치아 구석구석까지 퍼트릴 거다.
그것에 사람들은 분개하고 절망하다가,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끝끝내 체념하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별들의 무덤에서 스러지고 있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 별들이 품고 있던 빛.
독립에 대한 희망.
그 불길마저도 함께 사그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
사람들은 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벌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광장에는 수없이 많은 이들이 있었음에도, 기사의 목소리만 낭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공문의 마지막 문장이 읽혔다.
“현 시간부로, 로드르 헤어어스의 사형을 집행한다!”
기사의 선언과 동시에 무릎 꿇고 있던 로드르의 몸이 우악스러운 손길을 따라 기울어지며 앞으로 목이 빠졌다.
“아―.”
사람들의 탄성이 광장에 흩어졌다.
로드르의 옆으로 커다란 검을 쥔 사형 집행관이 섰다.
서슬 퍼런 칼날이 노인의 목에 대어진다.
결국, 흰사자는 오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와 봤자, 헛된 죽음일 테니까.
리포드는 이 순간을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무거운 죽음이라고 해서 죽음의 순간이 긴 것은 아니다.
로드르는 순식간에 목이 베이고 그의 생은 허무하게 마무리될 터였다.
집행관의 검이 들렸다.
하늘에 걸린 칼끝에서 햇볕이 조각나 부서졌다.
굉음이 울리며 처형대가 휘청 흔들린 것은, 칼날이 떨어지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폭발음과 동시에 높이 솟아 있던 처형대의 중앙부, 왼편이 터져 나갔다.
마치 거인이 한 움큼 뜯어먹은 것 같은 자국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쿠구구구구.
그 충격에 한차례 휘청인 처형대가 왼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 이런 미친!”
리포드는 그 광경을 보며 안 그래도 부릅뜨고 있던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대체 어쩌자고?
처형대가 기울어지자, 그 위에 있던 기사들과 사형 집행관, 그리고 포박당한 채 무릎이 꿇려 있던 로드르 헤이어서까지.
그 모두가 가팔라지는 경사를 따라 쓸려 내려가다가 허공에 던져졌다.
그 밑에 있던 까마귀 녀석들은 무너지는 처형대를 피해 개미 새끼들인 양 좌우로 흩어졌다.
쿠와앙!
기울어진 처형대가 바닥에 쓰러지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와 함께 로드르 헤이어서도 떨어지고 있었다.
거뭇한 무언가가 그를 향해 쏘아진 건 그때였다.
자세히 보니 기다란 천이었다.
검은색 천은 떨어지던 로드르의 몸을 단번에 휘감아 잡아채 갔다.
개구리가 혓바닥을 뻗어 먹이를 채는 듯한 장면이었다.
리포드는 어디론가 빨려 가는 로드르를 따라 다급히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로드르를 받아 내는 하나의 신형을 볼 수 있었다.
오지 않을 거라 여겼던, 흰사자가 그곳에 있었다.
* * *
나는 처형대에 오르는 로드르 헤이어서를 바라보았다.
내가 기억하던 그와는 전혀 다른 외형.
하지만 푸른 귀화와 같이 타오르는 눈빛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의 죄목이 공표되는 동안, 나는 그를 찬찬히 보았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초연함을 잃지 않았다.
그를 보며 나는 전생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로드르는 아버지의 충직한 신하이면서 허물없이 지내던 벗이었으니까.
나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기에, 나는 항상 아버지를 통해 그를 보았었다.
그래서일까?
야윈 그에게서 나는 왠지 아버지를 보는 듯한 뭉클함을 느꼈다.
그사이 그의 죄목은 끝에 다다라 있었다.
나는 시선을 내려 그에게 닿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을 보았다.
처형대를 두른 까마귀들과 겉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주변에 포진하고 있을 막강한 전력들.
그 모든 걸 헤치고 로드르 헤이어서를 구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들이 그의 목을 베는 데는 찰나의 시간만이 필요하므로.
때문에 적들에게서 그를 떨어트려 놓는 것이 우선이다.
“현 시간부로, 로드르 헤어어스의 사형을 집행한다!”
기사의 선언으로 그의 죽음이 명백해지던 순간, 나는 흰사자 가면을 쓰며 앞으로 걸었다.
그런 나를 본 이들이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동공을 키웠다.
처형대를 지키고 서 있던 까마귀들도 마찬가지.
처형대 위에서는 사형 집행관이 로드로의 목덜미에 검을 가져다 댄 상황이었다.
그들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나는 주먹을 당겼다. 그리고 집행관의 검이 들어 올려지는 순간, 그것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쿠웅!
가장 먼저, 폭발할 권력을 지탱할 다리가 지면에 단단히 틀어박히며 뿌리를 내렸다.
이어, 뒤로 당겨졌던 주먹이 뻗어지기 시작한다.
권면으로 소용돌이치듯 휘감기는 기의 폭풍.
공간 자체를 휘감는 듯한 권력이 점을 찍는 순간, 그것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천령신공 기예편.
제4장 거신포(鉅辛砲).
자그만 권면 위로 집체만 한 거인의 주먹이 겹쳐지는 듯했다.
그 안에 담긴 권력이 그러했다.
주먹 위로 집중된 내력이 마치 거인의 주먹처럼 형상화되었고, 그것이 포탄처럼 쏘아져 처형대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앙!
처형대의 좌측 허리가 커다란 반원 모양으로 뜯겨 나가며 부서진 조각이 진눈깨비처럼 흩날렸다.
쿠구구구구!
측면의 지지대를 잃고 한쪽으로 급격히 기우는 처형대.
그 위에 올라 있던 다른 이들과 로드르 또한 그것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받아 내기 위해 몇몇이 움직였지만, 내 걸음이 더 빨랐다.
천령신공 보법편.
제2장 추뢰(追雷).
쾅!
한 줄기 섬광이 되어 쏘아진 신형이 그와 내 사이의 간격을 찰나에 지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닿기에는 부족했다.
나는 왼팔에 감겨 있던 검은 천을 풀어 그에게 뿌렸다.
휘리릭!
내공을 담아 강도를 강화한 천이 왜소한 로드르를 단숨에 휘감아 내 품으로 끌어왔다.
‘됐다.’
그의 앙상한 골격이 내 품에 안기는 순간,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내 의도대로 흘러가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내게 딸려온 그의 낯빛은 굳어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그를 곧장 등 뒤에 업었다.
종잇장처럼 가벼운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내 손길을 따랐다.
“단단히 붙잡으세요.”
나는 그를 당겨 왔던 검은색 천으로 어미가 아이를 포대기에 감싸 업듯 그를 내 몸에 고정해 갔다.
“막아라!”
정신을 차린 적들이 나를 보며 소리쳤다.
광장은 혼란으로 들끓고 있었다. 시민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 비명을 지르며 광장을 벗어나려 했다.
쏜살같이 달려온 까마귀들이 내 주변을 포위해 갔다.
내 신위를 본 녀석들은 섣부르게 공격하기보다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검을 겨누며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는 까마귀들.
나는 검은색 태풍의 중심에서 여유롭게 마지막 매듭을 마무리해 갔다.
로드르가 내 품에 들어온 것으로 모든 작전은 이미 끝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제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될 일.
물론,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 거였다.
철저하게 준비된 병력이 도시 전체에 단단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으니.
적들의 경계 수준은 가히 요새와 같았다.
이곳을 벗어날 타개책은 오직 하나뿐.
압도적인 힘으로 적들의 포위망을 뚫어 내는 것.
그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그때, 업혀 있던 로드르가 말을 걸어 왔다.
말을 얼마나 오랫동안 안 했는지 사막처럼 메마른 목소리였다.
“……날 두고 가게. 나와 함께 이곳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나는 고리를 엮은 천의 양 끝을 반대 방향으로 꾹 당기며 마지막 매듭을 맺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며 허리를 폈다.
내가 말했다.
“아뇨. 이제 여기서 나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