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제67화 심판의 광장 (2)
스티스시는 전범 재판을 담당하는 사법기관인 ‘스티스 법원’이 세워진 도시였다.
스티스 법원이 설립된 이래, 수많은 프렌치아의 영웅들이 전범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 또 하나의 별이 스러지려 하고 있었다.
무려 한 달 전부터 공개된 사형 집행일.
그 때문에 현재 스티스시는 수많은 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번에 저무는 별이 다름 아닌 로드르 헤이어서인 까닭.
하지만 스티스시에 감돌고 있는 기이한 열기는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로드르 헤이어서의 처형이야 이미 확정된 사안.
사람들의 초유의 관심은 흰사자의 등장 여부에 쏠리고 있었다.
“과연 그가 올까?”
“여기를 어떻게 오겠나. 이렇게 병사들이 쫙 깔렸는데. 왔더라도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겠지.”
“특임대도 왔다더군.”
“초원의 들개도 당했으니, 당연히 그 정도는 와야지. 소드 마스터란 소문도 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특임대라면 어떤?”
“‘로열나이트’라더군.”
“정말이지 만반의 준비를 했군.”
“그만큼 위협적인 존재라 이거지.”
“차라리 안 왔으면 좋겠는데…….”
“프렌치아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게 낫지. 어차피 로드르 님은…….”
사람들은 둘 이상만 모였다 하면 흰사자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입이 모였음에도 그들은 하나의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흰사자가 오든 오지 않든, 로드르 헤이어서는 처형당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그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도시로 속속들이 도착하는 병력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이 음울한 도시에 지금으로부터 4일 전에 도착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그를 빼낼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사실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아무리 나라도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그에게 접근할 수는 없으니까.
깽판이야 칠 수 있겠지만, 그가 죽으면 말짱 도루묵 아닌가.
때문에 나는 그가 처형대에 오르기 전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덕분에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며 탈출 경로도 대강 그려 놓았다.
안 그래도 음울했던 도시의 분위기는 사형 집행일이 다가올수록 더 묵직해져 가고 있었다.
그만큼 로드르 헤이어서의 죽음이 가지는 무게가 무겁다는 의미.
당연한 일이다.
그는 프렌치아의 마지막 별이었으니까.
국민들은 그의 죽음 앞에서 제국의 막대한 힘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될 테고, 결국 완전히 체념하게 되겠지.
그것이 공개 처형을 진행한 할렌트 바레인의 진정한 목적이었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막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럼 슬슬 가 볼까.”
이른 아침부터 속을 든든하게 채운 나는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공표된 처형 시간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음에도 사람들은 일찍부터 처형대가 설치된 ‘심판의 광장’으로 몰리고 있었다.
나 또한 그 무리를 따라 천천히 광장에 들어섰다.
“…….”
나는 광장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처형대를 보며 잠시 감상에 젖었다.
심판의 광장은 내가 처형당했던 ‘테나스타 광장’만큼 커다란 광장이었다.
전생의 마지막이 기억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가 ‘별들의 무덤’이군.”
나는 처형대 최상단에 놓인 평평한 공간을 바라보았다.
광장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도록 높이 솟은 그곳은 마치 작은 무대와 같았다.
저곳에서 프렌치아의 수많은 별이.
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이야기가.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저곳을 ‘별들의 무덤’이라 불렀다.
“언제 시작한다던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그렇군. 그분의 마지막을 위해 기도나 하세.”
광장에 나온 사람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처형을 기다렸다.
간혹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보이기도 했으나, 그의 죽음이 가지는 상징성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시민이 이미 로드르의 죽음을 받아들인 까닭이다.
제국에 합병된 지 10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티스시에 들어온 적의 병력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그 유명한 까마귀 기사단인가 보군.”
“저번에 못 봤었나?”
“이번이 처음일세. 정말이지 엄청나군. 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는 기분이야.”
“단원 모두가 익스퍼트에 이르렀다는데. 그런 이들이 저리 모여 있으니, 숨이 턱턱 막혀 올 수밖에.”
처형대 주변을 두르고 있는 까마귀 기사단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물경 300에 이르는 기사들이 칠흑처럼 어두운 갑옷을 입고 도열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광장의 하늘이 가라앉은 것처럼 육중한 기세가 전신을 짓눌러 왔다.
“허. 저들이 저 정도인데, 로열나이트는 대체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솔직히 비교할 수가 없지. 까마귀 기사단의 지휘관급 전력이 뭉쳐 만들어진 기사단이니. 최하 전력이 익스퍼트 중급에 이른다고 하더군.”
“정말이지 무지막지하구만.”
“그뿐인가. 듣기로는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전투부대 ‘이어스’도 왔다던데.”
“마법사들까지?”
“그것도 모자라, 도시 전체에 흩어져 있는 병력은 보통의 병사가 아니라 모두 선별된 정예들이라고 하네.”
“……이번에 할렌트가 아예 작정하고 준비했구먼그래.”
“초원의 들개를 잃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아무리 흰사자가 소문만큼 강하다 해도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할렌트는 스티스시에 투입된 병력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만천하에 공개했다.
올 테면 와 보라는 자신감인 동시에, 시민들이 가질 일말의 희망마저 꺾어 버리기 위함이었다.
과연, 상황은 그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발코니.
“후우.”
살집이 푸짐한 남자가 궐련을 태우고 있다.
그런 그의 뒤로, 정장을 입은 여인이 다가왔다.
“리포드 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나.”
뿌연 연기를 뿜어낸 리포드는 재떨이에 궐련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이 빌어먹을 짓을 관둬야 편히 궐련도 피울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언제나 편히 피우고 계십니다만.”
꼿꼿이 선 레이나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그건 맞지.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는 더 이상 이 지긋지긋한 독립군 노릇을 못 해 먹겠다고.”
독립을 위해 발로 뛴 10년.
그동안 프렌치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그 마지막 별마저 저무는 날이었다.
그렇기에 평소보다 더 회의적인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제국의 지배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고, 제국의 힘은 약해지기는커녕 갈수록 번성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독립의 희망은 점차 멀어져 가고 있는 상황.
패망한 왕국을 향한 애국심과 저항의 의지로만 버텨 내기에는 점점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말만 10년째인 거 아시죠?”
“그랬나?”
“네.”
레이나의 단호한 대답에, 리포드의 입매가 비틀렸다.
“젠장. 내가 그 정도로 결단력이 없는 인간인지 몰랐군.”
“생각만큼 없지는 않으세요.”
레이나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달랬다.
매번 7살 애처럼 투정을 부려도, 이 사내가 누구보다 프렌치아를 위한다는 건 모두 알고 있었다.
동부 독립군을 대표하는, ‘작렬하는 태양’의 수장이자, ‘동부의 성문’ 혹은 ‘인간 성벽’이라 불리는 리포드 아레우스.
그것이 그의 이름이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니 퍽 고맙군.”
“별말씀을요.”
벌컥.
방의 문이 열리며 새로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출발하죠.”
입술 끝에 세로로 그어진 작은 흉을 가진 사내.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동부에서 ‘붉은 송곳니’라 불리우는 사르페였다.
리포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래, 출발하자고. 로드르 영감이 죽는 꼴을 보게 된다면 내가 지금껏 내리지 못한 결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그래도 결단 못 내리실걸요.”
사르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려 보이자, 리포드는 황당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내가 그 정도로 못 미더운 사람이었어?”
“저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셔 놓고 결단 못 내렸잖아요.”
“제길. 이거 모지리가 따로 없었군. 그런 나를 믿고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너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레이나는 그런 그를 보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독립군을 자원했겠어요?”
“크하하하하!”
리포드는 허리까지 뒤로 꺾으며 호탕하게 웃어 댔다.
“맞는 말이네, 맞는 말이야.”
평소와 다르지 않게 입씨름을 한 그들은, 심판의 광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광장으로 가는 중에 사르페가 속삭여 왔다.
그가 던진 질문의 정확한 뜻은 ‘만일 흰사자가 오면 어쩔 거냐?’는 물음이었다.
리포드는 입을 삐쭉거리며 답했다.
“어떡하기는 뭘 어떡해. 그냥 구경이나 해야지. 여긴 우리가 낄 판이 아니야. 지금 나섰다가는 개죽음이라고.”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심드렁하게 이어 말했다.
“아마 녀석도 오지 않을걸.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 아니라면 이곳에 기어 올 리 없지.”
노출된 전력만 해도 입이 쩍 벌어질 정도다.
아예 작정을 한 듯했다.
이쯤 되면 할렌트의 수작이 훤히 보여도 막을 방도가 없다.
재수 없는 새끼.
녀석은 새로운 불씨가 제대로 피어나기도 전에 완전히 짓밟으려는 속셈인 거다.
“사람 오라지게 많네.”
리포드는 인파 속을 헤집으며 불만을 토해 냈다.
안 그래도 할렌트를 생각하면 열불이 치밀어 오르는데, 사람들의 뒤통수로 꽉 막힌 광장은 가슴을 더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근데 사실일까요?”
옆을 걷던 레이나가 귓속말을 해 왔다.
“뭐가?”
“초원의 들개들이요.”
“시답잖기는.”
“그냥,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갑자기 궁금했어요.”
그들은 스티스시에 와서야 흰사자에 대한 소문을 제대로 접했다.
그전에는 뜬구름처럼 붕 떠 있는 소문만 들었던 까닭.
물론, 여기서 들은 이야기도 별반 다를 게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홀로 초원의 들개를 압도했다니,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북부의 흰사자 소속의 녀석들이 합세하여 정리한 것이겠지. 또 다른 소문에는 서부의 검, 용 사냥꾼이 함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물론 그가 소드 마스터라면 홀로 초원의 들개를 삶아 먹었다는 것이 말은 된다.
하지만 다 쓰러져 가는 나라에 소드 마스터라니.
개꿈도 그렇게 허황되지는 않을 터였다.
“한참이나 과장된 소문이지. 너도 그렇게 생각할 거 아냐.”
“그렇기는 하죠.”
레이나가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었다.
흘러가는 정황상 그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빌어먹을. 그게 말이 되냐고.”
리포드는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사르페가 그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둘 다 느끼고는 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던 말이었다.
“경계 정도를 보면 진짜일 수도 있겠는데요?”
“개소리하지 말고.”
리포드는 사르페의 의심을 단칼에 끊어 냈다. 하지만 그 또한 긴가민가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스티스시의 경계 정도가 그랬다.
고작 한 놈을 막겠다고 불러들인 전력치고는 너무 비대했으니까.
이 정도 병력 규모면 북부의 흰사자 전체가 달려들어도 막아 낼 수 있을 거다.
사르페는 굴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막말로 리포드 님을 막을 생각이었다면 이 정도 병력을 배치했겠습니까.”
뼈를 때리는 지적에 리포드가 얼굴을 사납게 구겼다.
“나도 알아, X발. 하지만 말이 되냐.”
소드 마스터?
X랄하고 자빠졌네.
그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대륙에 네 명밖에 없는 그 존재가 갑자기, 정말이지 난데없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다니.
차라리 용 사냥꾼이 갑작스레 천운이 닿아 소드 마스터 경지에 올랐다고 하는 게 더 믿음직스러웠을 거다.
리포드는 으르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난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드래곤이 오크를 잡아먹는데도 안 믿어.”
광장에 웅성거림이 번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물결치는 인파 속에 갇혀 있던 그들은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작았던 웅성거림은 어느새 거대한 울림이 되어 광장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
처형대 뒤편에 도열해 있던 병력이 반으로 갈라지자, 그 사이로 포박된 채 끌려 나오는 야윈 몰골의 노인이 있었다.
리포드는 그런 그를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영감, 오랜만이네.”
프렌치아의 마지막 별, 로드르 헤이어서.
그가 ‘별들의 무덤’을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