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제65화 네스테르 신전 (4)
이번에는 나 혼자만이 아닌, 알렌과 이리엘, 네더만까지 모두 함께 카드론의 집무실로 향했다.
“책은?”
“당연히, 챙겼죠.”
알렌이 자랑스레 두꺼운 책을 들어 보였다.
「불멸의 도시」.
과거 놈의 연구실에서 가져온 책이다.
관심이 없어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녀석을 보니 다시금 기억이 났다.
나는 이 책의 해석을 카드론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문자가 마법사의 언어인 ‘룬어’인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암호문을 직접 만들어 사용할 정도면 문자에 관해 많은 기반 지식이 있을 터. 믿고 맡겨 볼 만하다.
“어서들 오시게.”
문이 열리자, 먼저 와 있던 카드론이 우리를 반겼다.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 한쪽에 비치된 소파로 우리를 안내했다.
자리에 앉기 전 그는, 알렌과 이리엘을 보며 가벼운 예를 표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 세실리아를 위해 열심히 움직여 주었다고. 고맙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알렌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그의 마음을 받았다. 네더만은 그런 그들을 보며 피식 웃더니 소파에 주저앉았다.
“우리가 찾은 게 세실리아가 아니라 개구멍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고생한 건 사실이긴 해.”
네더만이 히죽거리며 말하자, 개구멍을 찾기 위해 가장 앞장섰던 이리엘이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카드론이 그런 네더만을 슬쩍 흘기며 말을 보탰다.
“세실리아에게 물어보니 그 개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더군.”
기세등등해진 이리엘은 네더만을 팔꿈치로 툭, 치며 도끼눈을 떴다.
“거봐요, 제가 거기로 나갔을 거라고 했죠!”
“오, 정말 대단한걸. 역시 개구멍 전문가는 뭔가 달라도 다르구만.”
“덕분에 단단히 막아 뒀으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아, 네.”
이리엘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표정을 보니 세실리아에게 미안한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녀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지만, 세실리아에게 개구멍이란 답답한 내성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숨구멍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에 관한 건 자칭 개구멍 전문가인 이리엘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
카드론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들을 가져와 우리에게 나눠 주며 자리에 앉았다.
“해독된 암호문의 내용일세. 한번 쭉 읽고 대화를 나누는 게 빠를 거 같아서.”
나는 건네받은 종이를 살폈다.
알 수 없던 암호문이 모두 읽을 수 있는 문자로 해독되어 있었다.
“따로 정리하지 않고 해석한 내용 그대로 가져왔네. 두서없고 형식에 어긋나도 감안해서 보게.”
종이에 쓰인 내용은 간략한 정보의 나열이었다.
실시간으로 기록한 정보를 따로 정리할 시간 없이 넘기다 보니 발생한 일인 듯했다.
「……중략…… 세자 저하 직접 확인. 은색 머리칼에 은빛 눈동자. 장성한 모습이나 확인이 어렵지 않았음. 현재 잠복 중. 총독부 소속으로 보이는 기사들이 호위 중. 삼엄하여 접근 불가. 이동 시작. 은밀히 뒤따르는 중. ……중략…… 적의 배에 잠입 계획. 잠입하여 항로 정보 획득 시도. 실패. 잠입 작전 수행 중 동료 두 명 사망. 이모텔섬으로 간다는 정보 확인. 이모텔섬 지도에서 확인되지 않음. 은신처 적에게 발각. 도주 중. 델론트 항구, 독립군에게 접촉 예정. 현재 부상 정도 심각. ……중략…… // 세자 저하께서 살아 계시다고 함. …….」
‘//’ 이후로는 암호문을 건네받았던 이가 이어서 쓴 부분이었다.
생각보다 세자의 위치가 정확히 적힌 정보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세자를 확인했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그가 본 자가 진짜 세자는 아니겠지만.
나를 닮은 자라도 찾은 것인가?
“당시 임무 수행 중이던 이는 과거, 궁에서 경비병으로 근무했었던 자일세. 적어도 저하를 잘못 봤을 리는 없어. 그만큼 닮은 사람이거나, 진짜 저하가 살아 계신 거겠지. 물론 그것이 중요한 건 아니네.”
그가 확인한 이가 진짜 왕세자이건 아니건, 궁에서 일하던 이도 착각할 만큼 닮았다면 그것의 진위는 의미가 없었다.
그 정도 만으로도 독립군과 국민들을 선동하기에는 충분할 테니.
“할렌트는 교활한 자야. 그가 어떤 식으로 저하의 존재를 이용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전에 막지 못하면 상당한 파장이 있을 걸세.”
카드론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일단, 우리는 세자가 향했다는 이모텔섬을 찾아볼 생각이네. 지도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니 아마 현지인들만 아는 조그만 섬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세자를 태운 배가 이모텔이란 섬으로 향했다고 하니, 그 섬을 찾는 것이 당장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카드론의 말대로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섬이니, 현지인들만 아는 작은 섬일 확률이 높겠지. 아니면 자기들끼리 암호를 정해 놨던 것일 수도 있고.
어쨌거나 우리는 그 섬을 찾아야 하는데. 가장 큰 난관은, 프렌치아 서부의 굴곡진 해안선에는 수많은 섬이 존재한다는 거다.
개중에 이모텔이란 섬을 찾아내는 건,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굽이치는 해협의 정보력을 믿어 봐야겠지.
어쨌거나, 세자가 생존해 있다는 소문의 베일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아직 그 안에 담긴 할렌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급하게 굴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감춰진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
이 부분은 이로써 마무리가 된 듯하고.
나는 화제를 돌렸다.
“병동에 관한 조사는?”
“신전과 공조하여 바로 진행할 것이네. 내 영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 줄이야. 낯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야.”
신전 안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신전 또한 테이난 영지 권역 내.
그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일일 거다.
관련자들도 꽤 잡아들였으니, 이 또한 알아서 잘 조사할 터.
카드론이 말했다.
“이에 대한 정보도 정리되면 바로 공유하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여 답한 나는 알렌에게 책을 건네받아 카드론에게 주었다.
책을 받아 든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말했다.
“책임자가 가지고 있던 책이야. 왠지 연관이 있을 거 같아 가져왔지.”
“책임자가 따로 있었나?”
나는 그제야 신전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카드론 또한 세실리아에게 한정적인 정보만 전해 들었을 테니까.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는 더욱 침통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던 것인지……. 그나저나 흑마법이 악마의 힘이라 불린다는 건 알고 있었네만, 시체가 사라지고 죽은 자가 되 살아날 수 있다니. 대체 무슨 수로 그런 조화를 일으킨단 말인가. 신성력이 극에 이른 대사제도 그리할 수 없을 것이거늘.”
카드론은 두통이 온 사람처럼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 또한 여러모로 생각할 부분이 많을 터였다.
하지만 아직 모든 안건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말했다.
“로드르 헤이어서의 공개 처형에 관한 건 알고 있겠지.”
“……안 그래도 그 문제에 관해서도 이야기할까 했는데. 저 녀석에게 듣기로는 그곳에 갈 작정이라던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의중에 대해서 이미 네더만에게 모두 들었을 터.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다시 생각하는 게 좋지 않겠나. 자네가 강하다는 건 알지만, 할렌트는 바보가 아니야. 자네를 옥죌 모든 준비를 이미 끝마쳤을 걸세. 이건 홀로 드래곤 레어로 걸어 들어가는 격이라고.”
“그러니 혼자가 낫다. 나머지는 짐일 뿐이야.”
결국, 로드르 헤이어서 한 명만 구해 내면 해결되는 일이다.
누군가 도와준다면 수월하기야 하겠지만, 함께 간 이들은 결코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거다.
차라리 나 혼자 가는 게 별다른 희생 없이 그를 구해 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잠시 내 짐들을 부탁하지.”
여기서 내 짐이란, 알렌과 이리엘을 의미했다. 카드론이 불안한 눈빛을 내게 던졌다. 내 일신을 걱정하는 게 아닌, 미래의 사위가 가져다줄 이득을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애초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로 가능하겠나?”
“물론.”
내 단호한 대답에, 그는 설득을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떠날 생각이지?”
“내일.”
내 말에 장내가 한차례 술렁였다. 다들 내가 당장 내일 떠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겠지.
이미 이곳에서 볼일은 끝났다.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필요한 게 있다면 모두 말하게.”
“별다른 건 없고, 여비나 두둑이 줘라.”
“어렵지 않은 일이지.”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네더만이 물었다.
“3주면 다녀오려나?”
“그럴 거다.”
그의 공개 처형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2주.
로드르를 구한 뒤, 돌아오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3주가 조금 넘는 시간이 걸릴 거다.
사형이 집행되는 스티스시로 가기 위해서는 동쪽으로 꽤 가야 하니까.
“그 안에 너희들이 해 둬야 할 일이 많아.”
나는 카드론과 네더만을 바라보았다.
내가 다녀올 동안 카드론은 이모텔섬과 신전에서 벌어진 일, 그리고 「불멸의 도시」의 해독까지.
꽤 바쁜 일정을 보내게 될 터였다.
네더만에게는 따로 지시해 둘 사안이 있었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모두 마무리해 놓도록.”
스티스시에 다녀오면 우리는 다시 수도를 향해 바삐 움직여야 한다.
그때면 3주가 지난 후일 테니, 사전에 예상했던 일정보다 한참 지체된 것이다.
하지만 로드르 헤이어스를 구하는 건 지체된 시간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었다.
현재, 그는 프렌치아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유일한 끈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회의는 그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카드론은 나가려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자네는 나와 조금 더 이야기하지. 따로 논의할 게 있어서.”
* * *
방으로 돌아가는 길.
이리엘은 네더만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네스 님 혼자서도 그게 가능한 거예요?”
그가 하려는 일이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네더만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다.
소드 마스터인 제네스의 전력을 그나마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네더만뿐이었으니까.
네더만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나도 모르지. 하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는 거 아니겠어? 제네스가 성격이 X랄 맞기는 해도 바보는 아니잖아.”
알렌과 이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격하게 동의하는 바였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혼자서는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리고 어차피 우리는 따라가도 녀석의 말대로 짐 덩이일 뿐이야. 초원의 들개 사건 이후로 할렌트 녀석도 그가 소드 마스터인 걸 알게 됐을 테니, 그에 준하는 준비를 했겠지. 그러니까 단순히 머릿수를 늘리는 건 이 상황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래도 한 명 정도는 더 있는 게 낫지 않겠어요? 네더만 씨라도 따라가 본다고 해 봐요. 서부의 검이자 용 사냥꾼이잖아요.”
이리엘의 부추김에, 네더만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저번에 들개들한테 물어뜯겨 죽을 뻔한 거 보지 못했나? 적이 만반의 준비를 한 이상,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혼자서 다수의 전력을 상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만드는 저 녀석이 비정상인 거지. 나라면 소드 마스터라도 거기는 안 갈 거 같은데.”
“……그러니까요. 무슨 자신감인지.”
이리엘은 제네스의 무모함에 고개를 내저었다.
함께 걷던 알렌이 그녀를 토닥였다.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괜찮을 거야.”
이리엘은 그런 알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굳은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썩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본인도 걱정되면서.
“그런데 후작은 제네스 님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저번부터 계속 따로 대면하던데.”
카드론에 관한 이야기였다.
둘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매번 따로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이야 불편한 자리에 가지 않아 좋았지만, 슬슬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리엘을 보며 네더만이 씩 웃었다.
“세실리아와의 혼인을 권하고 있을 테지. 무사히 살아 돌아온다면 내 딸을 주겠다, 뭐 이런 개소리를 늘어놓고 있지 않겠나. 제네스 녀석, 복이 터졌지 아주.”
“예에? 혼인이요?!”
이리엘은 눈이 빠질 것처럼 휘둥그레 뜨며 기함을 토했다. 함께 있던 알렌 또한 놀란 눈치였지만, 그는 별 생각 없이 맞장구를 쳤다.
“하긴, 제네스 님이라면 후작가의 사윗감으로 최고긴 하겠죠.”
“그렇지. 그 성격만 빼면 뭐가 문제겠는가. 그 녀석이 혼인을 하겠다고 할지는 모르겠다만.”
“그러게요. 제네스 님이 과연 혼인을 할지…….”
이리엘은 네더만과 알렌의 대화를 그저 벙찐 채 듣고만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듣게 된 제네스의 혼인 소식에 혼이 반쯤 빠져나간 까닭.
왜인지 심장이 발끝에 떨어진 것 같은데…….
그 이유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