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제63화 네스테르 신전 (2)
투명한 유리창에 비쳐든 얼굴을 보며 세실리아는 소리쳤다.
“제네스 님! 여기에요! 여기!”
하지만 쇠창살을 흔들며 힘껏 불러 보아도 그는 창 앞에 멀뚱히 서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런 X발! 조용히 안 해? 확 멱을 따 버릴까 보다.”
앞으로 다가온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제네스를 부르는 게 이곳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임에도, 사내의 손이 허리춤의 검으로 향하자 세실리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가두고 있는 창살 안으로는 그녀 외에도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창을 살피고 있는 제네스만 간절히 바라보았다.
“크크큭.”
사내는 그런 이들을 보며 교활하게 웃었다.
“꼭 우리에 갇힌 원숭이 X끼들 같구나. 저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이 너머에 너희들이 있는지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은 Dr. 주르하의 비밀 연구실.
제네스를 막고 있는 벽은,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입구였다.
하지만 이 벽은 안에서만 열 수 있는 특수한 문.
게다가 보안 마법까지 걸려 있어 안에서는 밖을 훤히 볼 수 있음에도, 밖에서는 내부에 공간이 있는지 절대 알 수 없다.
게다가 마법으로 강화된 문의 강도는 강철보다도 단단하다.
설령, 이 안에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더라도 웬만한 이들은 문에 흠집조차 내지 못할 터.
그럼에도 저들은 헛된 희망을 품고 그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한심한 새끼들. 너희가 그런다고 저 녀석이 이곳을 알아차릴 것 같으냐.”
녀석은 벽을 두드려 보기도 하고 쓸어 보기도 했지만, 예상대로 그 너머에 공간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곧 포기하고 돌아가겠지.
세실리아는 그런 제네스를 보며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제발, 제발, 제발…….’
그녀는 그가 자신들을 발견하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자신의 호위 기사, 릴리는 이미 녀석들에게 끌려간 상황.
이대로 시간이 지체된다면 그녀는 죽고 말 터였다.
자신의 운명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
‘내가 괜히 오자고 억지를 부려서는…….’
세실리아는 어젯밤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병동의 지하실에서 석연찮음을 느꼈을 때,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고했어야 했다.
괜한 의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선에서 알아보려 했던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테이난가의 장녀라는 자신의 신분을 믿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가장 큰 실책이었다.
이 정도로 위험한 자들이 엮여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까닭.
잡혀 와 듣게 된 이곳의 실태는 실로 끔찍했다.
사람들을 어떤 실험의 실험체로 쓰고 있다고 했다.
듣는 것만으로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의 처참한 일.
어찌 같은 인간으로서 인체실험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이들에게 조금 전, 릴리가 끌려갔다.
그녀가 어떤 고통을 겪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잔혹한 일이란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임에도 세실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제네스가 자신들을 발견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의 강함은 카드론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는 바.
현재로서는 제네스가 그녀의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아…….”
그때, 세실리아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다리의 힘이 풀린 그녀는 쇠창살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창 앞을 기웃거리던 제네스가 뒤돌아 멀어지고 있었다.
실망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었던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허망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크하하하하하!”
이들을 지켜보던 사내가 박장대소했다.
희망에서 절망으로 일변하는 이들의 표정 변화가 눈에 훤히 들어왔다.
그것을 구경하는 즐거움에 온몸이 짜릿할 정도.
그는 차오르는 우월감을 담아 한껏 조소했다.
“멍청한 것들! 그러게 내가 뭐라 했느냐. 밖에서는 이곳을 절대 알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크하하하…… 하?”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그는 돌연 웃음을 멈추었다. 실험체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실의에 빠졌던 얼굴 위로 다시 기대감이 번지고 있었다.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본 그는, 다시금 벽 앞에 서 있는 제네스를 볼 수 있었다.
이어 들리는 강력한 폭발음.
콰아아앙!
귀청이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먼지를 동반한 매서운 돌풍이 장내를 휩쓸었다.
“……뭐, 뭔데, X발.”
후폭풍이 한차례 지나가고 다시금 고요해진 장내.
사내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팔을 슬며시 내렸다. 천천히 가라앉는 먼지구름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역시, 내 감이 맞았군.”
감정의 고조가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목소리.
그가 조금 전까지 벽 앞에 서 있던 자임을 알고 있음에도, 사내는 그런 그를 귀신처럼 바라보았다.
그가 절대 넘을 수 없을 거라 여겨지던 벽을 넘어온 탓이다.
“대체 어떻게……?”
제네스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담담히 답했다.
“그냥, 수상해서 부숴 봤다.”
* * *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 아쉽기도 하고, 지하실의 구조도 괜히 꺼림칙해서 벽을 부숴 봤더니 그 너머에 널찍한 공간이 있었다.
“그저 심증만으로 벽을 부쉈다는 말이냐?”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 남자.
나는 그를 싸늘히 바라보았다.
나의 예민한 육감은 그저 단순한 심증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 한심한 놈은 당연히 그 차이를 모른다.
시선을 녀석의 뒤편으로 옮기자, 감옥인지 사육장인지 모를 수상한 공간이 있었다.
가출했다고 여겨지던 세실리아가 그곳에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갇혀 있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안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쇠창살에 달라붙어 울부짖었다.
“무슨 일이야!”
그때 좌측으로 뻗어 있는 긴 복도에서 검을 쥔 자들이 여럿 튀어나왔다. 앞에 서 있던 녀석 또한 어느새 검을 꼬나쥔 채였다.
“그냥 돌아가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거다.”
녀석이 비릿한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천천히 뇌운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쳐라!”
내게 일제히 달려드는 녀석들.
으름장을 놓은 것치고는 형편없는 수준이다.
잘 쳐줘 봤자, 상급 마나 유저 정도 되려나.
다들 고만고만한 놈들이었다.
촤―악!
은빛 궤적이 피어나는 동시에 가장 앞선 녀석의 머리통이 핏물과 함께 치솟아 올랐다. 내게 달려들던 녀석들은 그 모습에 잠시 멈칫거렸다.
나는 그들을 향해 쏘아졌다.
발을 구르자 크게 확장되는 동공이 눈에 잡힌다.
새하얀 섬광이 그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다시금 핏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내 앞을 막아 온 녀석들은 고작 다섯.
흐르듯 공간을 누빈 뇌운검이 그들을 손쉽게 유린했다. 녀석들은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핏물을 뿜어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참으로 시시한 놈들이었다.
“릴리가 안으로 끌려갔어요!”
그들을 정리하기 무섭게 세실리아가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거기 있어라.”
나는 그들을 창살 안에 그대로 두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을 가두었던 쇠창살은 지금부터 그들을 보호해 줄 장벽이 되어 줄 거다.
기다란 복도에는 문들이 병실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다.
어쩐지 지하실이 좁다 했더니 안쪽에 이렇게 넓은 공간을 숨겨 놓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걸어가며 기를 발산하는 것으로 문을 터트리듯 열었다.
내가 지나칠 때마다 양측의 문이 쾅! 소리와 함께 날개를 활짝 펴듯 강제로 열렸다.
방의 내부는 수술실처럼 꾸며져 있었고, 문이 열릴 때마다 짙은 혈향이 흘러나왔다.
빈방도 있었지만, 수술대에 사람이 누워 있는 방도 있었다. 그들 주위로는 하얀 가운을 입은 자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가장 끝 방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뒤를 돌아 말했다.
“지금부터 문밖으로 나오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너희들이 살 방법은 하나뿐이다. 너희들 앞에 누워 있는 자들을 살려내라.”
말을 끝내고 나는 복도를 오가며 그들을 감시했다. 내 말을 무시하고 밖으로 도망쳐 나온 이들은 머리통이 터져 죽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심각한 상태의 사람들은 없었다.
이제 막 실험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고 했다.
호위 기사인 릴리 또한 의식을 잃었을 뿐, 별 탈 없이 무사했다.
나는 흰 가운을 입은 놈들을 한 방에 몰아넣고 수혈을 짚었다.
내가 깨우기 전까지는 푹 잠들어 있을 터.
나는 이들을 테이난성에 넘길 작정이었다.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한 이들은 철창에 넣어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게 했다.
일련의 일을 처리하는 동안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병동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벽을 부술 때 내공으로 소리를 차단한 까닭이기도 했지만, 외부에서 현 상황을 감시하는 이들은 없는 듯했다.
그럼 이제 마지막 걸음을 옮길 차례였다.
기다란 복도 끝.
마지막 문이 남아 있었다.
다른 곳과 달리 보안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나는 장내가 정리될 때까지 일부러 열지 않았다.
책임자로 보이는 이가 없던 상황.
그는 아마 이 문 너머에 있을 듯했다.
나는 문을 강하게 발로 찼다.
콰아앙!
단단한 강도를 가지고 있던 강철 문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지며 터져 나갔다.
철문이 사라지며 훤히 트인 시야로 너른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새끼들, 대체 땅굴을 얼마나 판 거야?
안으로 발을 디디자 옷자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공간을 울린다.
사사사사삭.
어둠 속을 활보하는 바퀴벌레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들.
어느새 검은 옷을 입은 30여 명의 인영이 내 앞에 내려서 있었다.
“크르르.”
얼굴을 가린 복면 사이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미X놈들인가?
형체는 분명 사람이건만, 살기로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짐승 같다.
“클클클. 여기까지 오다니 간덩이가 부은 놈이로구나. 꽤 쓸 만한 실험체가 되겠어.”
그들의 뒤편에서 쇠를 긁는 듯한 거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목소리에서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복면인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스태프를 쥔 노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가운을 걸친 추레한 몰골의 노인.
마치 해골바가지가 사람의 가죽을 쓴 것 같은 생김새.
구면이었다.
목소리부터 설마 싶었지만, 그 설마가 맞았다.
그는 과거 베론을 납치했었던 마법사이자,
이미 내게 한 번 죽었던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