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제60화 정략혼인? (2)
이야기를 끝내고 식당을 나선 나는, 고요한 복도를 걸었다.
카드론의 말로는 암호를 해석하는 데 3일은 걸릴 거라고 했다.
어떤 임무를 수행 중이었는지 파악한 후, 그것에 맞게 해석하려면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하단다.
어이가 없어서.
자기네 암호문임에도 그리 오래 걸리다니.
보안을 위해 효율을 포기한 경우였다.
어차피 당장 급한 일은 아니라 알았다고 했다.
로드르의 공개 처형까지는 20여 일이 남아 있었으니, 해석본을 보고 출발해도 늦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방문 앞이었다.
나는 문을 열기 전에 이곳이 내 방이 맞는지부터 의심했다.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까닭.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것들이 아주.
“저녁 맛있게 드셨어요?”
문을 열자 알렌이 방주인이라도 되는 양 나를 반겼다. 이번에는 네더만까지 와 있었다.
“카드론과의 식사는 할 만했나?”
“저희는 진짜 좋았어요!”
신이 난 이리엘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다다다 쏟아 냈다.
“세실리아라고 테이난 가문의 첫째 따님이 있는데, 그분이 저희를 대접해 주셨거든요. 근데 정말 대박이었어요! 엄청 예쁘고 친절하신 데다, 교양까지 흘러넘치시더라고요. 제네스 님도 봤으면 아마 반했을걸요.”
“세실리아가 그렇기는 하지.”
네더만이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물론 나는 전혀 관심 없는 이야기였다.
내 관심사는 이 자식들이 제 방들을 놔두고 왜 내 방에 모여 있느냐는 거다.
“됐고. 너희들 여기서 뭐 하냐?”
“보면 모르나? 카드놀이 중이잖은가.”
네더만이 손에 쥔 카드들을 보여 주며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말했다.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꾹 삼키고는 정확히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니까, 그걸 왜 내 방에서 하고 있냐고.”
“제네스 님 혼자서 심심해하실까 봐 일부러 왔죠. 이 방이 제일 넓은 데다 너른 발코니도 있어 쾌적하기도 하고요. 어서 와서 같이 해요.”
알렌이 웃는 얼굴로 주먹이 근질거리는 말만 골라 해 댔다.
저것들을 어떻게 굴려 줘야 잘 굴렸다고 소문이 날까?
네더만은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손짓을 해 왔다.
“그래, 얼른 이리 와서 앉게. 마침 이 판이 끝났으니, 바로 시작하면 딱일세.”
“그래요.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빨리 와요.”
이리엘도 녀석들의 행태에 말을 보탰다.
근래 별다른 사건이 없어 그런지 잔뜩 풀어진 모습들이다.
누가 보면 여행이라도 온 줄 알겠네.
작금의 상황은 사실 심각했다.
할렌트는 죽은 왕세자를 이용하는 것도 모자라, 로드르 헤이어서의 공개 처형까지 선포했다.
이런 와중에 독립군이란 놈들이 시시한 카드놀이나 하고 자빠졌다니.
“우리가 여기에 놀러 온 줄 아나 보지?”
“허, 자네 생각보다 걱정이 많은 편이구만. 괜한 걱정은 내려놓고 마음을 편히 먹게. 사람이 어찌 매번 진지하게 살 수 있겠나. 전쟁 통에도 사랑을 나누는 게 인간일세. 이 정도 여유는 즐길 줄 알아야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거라고. 안 그런가?”
네더만의 말에 알렌과 이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나섰다.
그래, 이 부분은 녀석의 말이 맞다.
쉴 때는 쉴 줄도 알아야지.
내가 나답지 않게 솔직하지 못했다.
나는 사실 이들이 카드놀이 하는 걸 문제 삼고 싶은 게 아니었다.
카드놀이를 내 방에서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지.
“혹시 카드놀이를 할 줄 몰라서 그러세요? 제가 가르쳐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알렌이 웃으며 다시금 화를 돋우었다.
하지만 이 말도 맞다. 나는 녀석들이 하고 있는 카드놀이의 룰을 모르니까.
그런데 나를 뭘로 보고 감히 그런 도발을.
“됐으니까, 카드놀이를 하려거든 너희들 방에서 해라.”
나는 화를 삭이며 나답지 않게 친절히 말했다.
아무래도 흡족한 저녁 식사 때문에 마음이 평소보다 넉넉해진 것 같다.
그런 내게 이리엘이 눈을 흘기며 핀잔을 주었다.
“에이, 튕기지 말고 같이 해요. 사람이 왜 그렇게 재미없게 굴어요.”
“그러니까 말이야. 중후한 중년인인 나도 무게를 안 잡는데, 자네가 그럼 쓰나. 싫으면 말게. 우리끼리 할 테니.”
카드를 현란하게 섞으며 네더만이 말했다.
이들은 내 방을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역시 사람은 좋은 말로 하면 듣지를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좋은 음식을 먹고 와 좋게 대해 주려고 해도 꼭 이렇게 엇나가지.
“내가 나가라…….”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녀석들이 벌려 놓은 판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들, 현금을 자리 앞에 쌓아 두고 있다.
“설마 이거 돈 내기냐. 너희들이 돈이 어딨어서.”
우리는 루시안에게 출발하며 받았던 공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것을 정확히 3등분하여 사용하고 있었으니, 이 자식들 생활비를 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냥, 가볍게 하는 거예요.”
이리엘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알렌이 옆에서 설명을 보탰다.
“저희가 근래 아낀 돈으로 하는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제네스 님 몫도 따로 빼 놨구요.”
생각해 보면 요새 노숙을 많이 하기는 했다.
그래서 생활비가 여유로운 것이겠지.
그렇다고 생활비를 걸어?
……하, 이 철부지 녀석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들은 도박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모른다.
도박장에서 패가망신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번 제대로 당해 봐야 정신 차리지. 쯔쯧.
나는 혀를 차며 네더만과 이리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그들은 멀뚱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사부님에게 물려받은 거라고는 허름한 오두막 한 채뿐이었던 내가 어떻게 생활비를 충당했겠는가?
내가 무림에서 돈을 벌었던 방법은 딱 두 가지였다.
거슬리는 놈에게 뜯거나, 도박장에서 뜯거나.
이쪽으로는 내가 또 전문이다.
자식들. 판돈을 걸었으면 진즉에 말할 것이지.
나는 벙찐 녀석들을 보며 말했다.
“뭐 해? 패 안 돌리고.”
* * *
“부르셨어요.”
카드론 앞으로 단아한 여인이 서 있었다.
금빛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그녀는, 카드론의 첫째 딸 세실리아 테이난이었다.
“손님들 대접은 잘 해 주었느냐.”
“예. 좋은 분들 같더라고요. 재밌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왜 저한테 대접을 부탁하신 거예요?”
“호기심을 동하게 하기 위해서지.”
카드론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사랑스러운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네 배필감을 찾았느니라.”
“예? 배필감이요?”
세실리아는 생각지 못한 소식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배필감이라니.
“너도 이제 슬슬 혼인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저는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는걸요.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걱정하지 마라. 너도 분명 마음에 들 게다. 가문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네가 대접한 이들의 일행이다. 나이대도 너와 비슷하고, 아까 보니 인물도 좋더라.”
세실리아는 카드론의 말을 기다렸다.
인물만으로 자신의 배필감을 선택하지 않았을 터.
예상대로 그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소드 마스터란다.”
“소드 마스터요?”
“너도 흰사자에 대한 소문은 들었겠지?”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프렌치아에서 가장 뜨겁게 회자되는 이였다. 그녀도 모를 리 없었다.
“아, 혹시 이름이 제네스인가요?”
“그래.”
“아, 일행분들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식사하면서 세실리아는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온통 그를 험담하는 이야기였던 탓에, 굉장히 흉포한 사람으로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었다.
그가 흰사자였을 줄이야.
그렇다고 그를 나쁘게 생각지는 않았다.
다들 그를 험담하면서도 굉장히 신뢰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으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게 칭찬을 하는 건지 욕을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반려자가 된다고?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동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분은 동의한 건가요?”
“아니, 아직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 미모를 보면 바로 넘어올 게다.”
“그건 아닐 거 같은데요.”
세실리아는 카드론의 자신감에 살포시 웃었다.
그러면서 식탁에서 보았던 이리엘을 떠올렸다.
머리칼은 소년처럼 짧았지만, 그 정도로 예쁜 사람을 본 건 자신도 처음이었다.
여자인 자신이 봐도 반할 정도.
그런 사람과 함께 다니는 이가 자신에게 미모로 반할 이유는 없었다.
세실리아는 그 사실을 그대로 전했다.
“미모로는 넘어오지 않을걸요. 일행 중에 엄청 예쁜 사람이 있더라고요.”
하지만 그것으로도 카드론의 자신감은 꺾을 수 없었다. 그의 자신감은 세실리아를 향한 사랑에 기반한 것이니.
“걱정 말거라. 사내란 자고로 들꽃보다 가꿔진 꽃을 꺾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예.”
카드론이 자신을 얼마나 금쪽같이 여기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웬만한 사내에게는 절대 시집보내지 않을 거라 엄포까지 놓던 분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시집을 가라니.
하지만 그가 소드 마스터라면 카드론의 마음이 이해는 갔다.
“어머니는요?”
“아직 말은 안 했다만 당연히 허락할 거다. 그는 그만큼 훌륭한 신랑감이야. 만약 그가 우리 편에 선다면 가문은 다시없는 영화를 누리게 될 거다. 게다가 가문도 부양할 가족도 없다고 하니, 너와 테이난에서 함께 살 수 있을 테고.”
“아―.”
아무래도 카드론은 그를 데릴사위로 들일 작정인 듯했다.
그것은 세실리아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모르는 곳에 가서 사느니, 나고 자란 테이난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게 좋으니까.
“흠,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그래, 조만간 자연스레 소개시켜 줄 테니 한번 잘 봐 보거라. 성격에 흠이 있지만, 그렇다고 경우가 없지는 않으니 능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내할 만한 정도일 거다.”
“네, 알겠어요.”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환히 웃은 카드론은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런데 요새 계속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 게야?”
“……마을 구경이요. 이것저것 살 것도 많고 해서.”
“항상 호위를 대동하며 움직이는 거지?”
“그럼요. 릴리와 항상 함께 다니고 있어요.”
그 후로, 카드론에게 한참이나 잔소리를 들은 세실리아는 힘겹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방을 나섰다.
그나저나 갑자기 혼인이라니.
놀란 가슴을 진정한 세실리아는 아랫입술을 살포시 물었다.
‘그래도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제네스란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해야 혼인이 가능할 테니.
자신이야 카드론이 강력히 추진한다면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선택은 자연스레 그 사람의 몫이 될 거다.
‘어떤 사람일까?’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지도 모를 사람.
솔직히 궁금하기는 했다.
성격은 별로인 것 같지만, 그래도 경우가 없지는 않다고 하니…….
‘뭐, 만나 보면 알겠지.’
세실리아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붙잡고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내일 저녁쯤에야 제네스를 만나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또 아주 우연히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