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제59화 정략혼인? (1)
네더만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참, 너다운 생각이다.”
“혼인만큼 확실한 동맹도 없지.”
카드론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자, 네더만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게 네가 원한다고 되겠어?”
“물론. 녀석이 세실리아를 거절할 리는 없을 테고, 세실리아 또한 충분히 마음에 들어 할 거다. 그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사내니까. 그 녀석, 생긴 건 어떻지?”
“재수 없게 잘생겼다.”
“훌륭하군.”
“장인한테 반말하는 사위라…… 보는 재미는 있을 거 같은데, 쉽지 않을걸.”
네더만이 찻잔을 괜스레 만지작거리며 씩 웃었다.
“아무래도 그 자식, 여자에 전혀 관심이 없는 거 같거든.”
그 부분에 관해 이야기해 본 적은 없지만, 이리엘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머리칼이 짧아 중성적인 느낌이 있지만, 이목구비만 봐도 나라를 뒤흔들 정도의 빼어난 미인.
그럼에도 제네스는 그런 그녀를 돌처럼 대하고 있으니.
“너 같은 호색한이 아니라면 오히려 좋지.”
카드론의 말에, 네더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사윗감으로는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제네스는 호색한이 절대 아니니까.
굳이 따지자면 고자에 가깝지.
“세실리아가 얼마나 예쁜지는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아직 여인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굳이 거절하지 않을 거다.”
“물론 세실리아가 예쁜 건 잘 알지. 내가 조금만 어렸다면 네 사위가 되겠다고 청하고 싶을 정도니까.”
“…….”
카드론은 네더만을 보며 끓어오르는 살심을 억지로 눌렀다.
“왜 그렇게 봐? 당연히 농담이라고. 예쁘다는 칭찬이기도 하고. 나도 네 사위가 될 생각은 꿈에도 없어.”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라. 진짜 죽일 뻔했다.”
“크크큭.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딸을 시집보낼 수 있겠냐.”
“너 같은 놈만 아니라면.”
“섭섭하군. 내가 어때서. 나 정도면 괜찮은 남자라고.”
“쓸데없는 소리. 일단 녀석과 저녁 식사를 하며 의중을 떠 봐야겠군. 북부에 두고 온 여자가 있다거나 약혼녀가 있다거나 한 건 아니지?”
“잘은 몰라. 없는 거 같던데.”
“그렇다면 됐다. 세실리아를 보면 푹 빠지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야.”
네더만은 그의 자신감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세실리아가 예쁜 건 맞지만, 딸 바보에게는 더욱 예뻐 보이는 법이니.
그런 이유로 카드론은 성공을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본 제네스를 생각하면 실패가 빤히 보이는 계책.
그 목석을 대체 무슨 수로 꼬신단 말인가.
자신이 봤을 때는 세실리아가 아니라 미의 여신이 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 * *
“저 어때요?”
흰색 원피스를 입은 이리엘이 한 바퀴를 뱅그르르 돌자, 치마가 둥그렇게 퍼졌다가 가라앉았다.
석찬 때 입을 드레스라는데, 테이난 후작가에서 선물로 줬다고 한다.
나와 알렌도 멋들어진 정장을 받았다.
입을 생각은 없지만.
“엄청 예쁘죠? 보기만 해도 사랑스럽죠?”
간만에 여성스러운 옷을 입어 잔뜩 신이 난 이리엘이 입을 헤벌쭉 벌렸다.
저렇게나 좋을까.
“완전 대박이야! 너무 예쁜데?”
알렌이 옆에서 손뼉을 마주치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역시, 알렌 형님. 확실히 보는 눈이 있다니까요. 저도 거울 보고 깜짝 놀란 거 있죠. 머리가 길었으면 더 예뻤을 텐데.”
이리엘은 붉게 물든 짧은 머리칼을 쓸며 아쉬워했다.
내가 봤을 때 붉은색 보다는 청발이 더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청발을 하고 있으면 혹시나 후작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까닭에 여전히 붉은 머리를 유지하는 중이다.
그녀야 후작을 직접 본 기억이 없다지만, 후작은 그녀를 봤을지도 모를 일이니.
같은 독립군이기에 정체를 꼭 숨겨야 하는 건 아니어도, 굳이 알아 좋을 건 없다.
“에효. 언제 머리를 기르려…… 죄송해요. 형님 앞에서 할 말은 아닌데.”
알렌을 보며 말을 하다만 이리엘은, 침대에 풀썩 앉으며 새초롬하게 웃었다.
“괜찮아. 다시 기를 수 있다는 게 어디야.”
알렌은 밤톨이 된 자신의 머리를 쓸어 만졌다.
그는 본인의 초상화를 본 이후로 다시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이야기하는 건 상관없는데, 왜 여기 와서 그러지?”
이곳은 내 방이었다. 우리는 각자 개인 방을 받았기에 이렇게 함께 모여 있을 이유가 없었다.
특히나 나는 책을 읽고 있는 와중이었다.
둘은 약속한 것처럼 동시에 말했다.
“심심하잖아요.”
“…….”
어이가 없어서 딱히 할 말도 없다.
나는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읽던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저것들을 상대해 봐야 내 시간만 아깝지.
“그거 다 읽지 않았어요?”
내가 읽는 책을 본 이리엘이 볼을 부풀리며 불만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이들이 하는 잡일의 출처가 대부분 이 책에서 나오는 까닭이다.
「긴 여행을 제대로 즐기는 101가지 방법」.
현재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이다.
내가 말했다.
“다시 읽는 중이다.”
이리엘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테이난 후작이 굽이치는 해협을 이끌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지 않아요?”
확실히 그가 독립군이란 건 의외였다.
가장 먼저 변절한 자가 뒤에서 독립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니.
녀석의 의중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그것에 대한 물음은 뒤로 미룰 생각이었다.
이곳에서 신세 져야 할 시간이 길었다.
일정상 맡겨 둬야 할 것들도 있고.
이리엘의 물음에, 알렌이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니까 말이야. 어쩐지 암호문이 복잡하더라니.”
임무별로 암호문을 다르게 쓸 만큼 보안에 철저했던 이유도 이해가 간다.
가문의 멸문을 막기 위해서는 보안을 철저히 할 수밖에 없었을 테지.
누군가 문을 두드린 건 그때였다.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이리엘과 알렌은 눈을 키우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들의 예상대로 기다리던 석찬을 안내하기 위해 온 하인이었다.
창밖을 보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배도 허기지겠다, 참으로 적절한 때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한동안 노숙을 해 온 우리에게 후작가에서의 식사는 진심으로 고대하던 일이었다.
하인의 안내를 따라 다양한 작품이 전시된 복도를 걸었다. 뜨문뜨문 걸려 있는 예술품 덕분에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제네스 님은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하인은 나에게만 다른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내 의문을 눈치챈 하인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제네스 님께서는 후작님과 단독 대면이 있습니다.”
후작이 아무래도 나와 단둘이 이야기할 자리를 마련한 듯했다.
무슨 수작이지?
“그럼 이따 봬요.”
둘은 잘됐다는 심경으로 손을 흔들며 다른 하인을 따랐다.
후작과 함께 식사하는 게 불편했을 테지.
나 또한 그랬다.
나를 대변할 저들이 있어야 식사에 집중할 수 있거늘.
나는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보았다.
단둘이 대면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나도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말하는 것보다 먹는 게 좋은 나로서는 탐탁지 않은 상황이다.
잠시 후, 하인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문.
거대한 문이 세로로 쪼개지며 식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식사만 하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커다란 방의 중심에 기다란 식탁이 있었고,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식당이다.
“어서 오시게.”
식탁에 앉아 있던 사내가 옅은 미소와 함께 나를 맞이했다.
부리부리한 인상에 깔끔하게 관리된 콧수염을 가진 중후한 중년인.
이자가 바로, 카드론 테이난.
낯설지만, 얼굴이 익숙했다.
큰 인연은 없었기에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세자 시절 마주치기는 했을 테지.
나는 가볍게 묵례 후, 식기가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좀 더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둘만의 자리를 마련했네. 나와의 단독 대면이 불편하지는 않을까 모르겠군.”
“불편하지만, 상관없다.”
내 솔직한 말에, 그는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과연, 네더만에게 듣던 대로군.”
그가 손짓하자, 풍미를 갖춘 음식들이 식탁을 채우기 시작했다.
“네더만에게 대강의 이야기는 다 들었네.”
“잘됐군.”
“가장 먼저 철부지 녀석을 살려 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싶군. 천덕꾸러기나 다름없지만, 우리에겐 중요한 전력이라서.”
“우연일 뿐이다. 그자가 운이 좋았지.”
네더만을 구하려고 구한 건 아니었다.
갔더니 녀석이 있었을 뿐.
“듣자 하니 수도로 향하고 있다던데.”
“임무차 가고 있다.”
자세히 묻지 말란 식으로 짧게 답했다.
네더만에게도 수도로 가는 이유를 굳이 말하지 않았다. 숨길 이유는 없지만, 나서서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은 독립을 위해 같은 쪽에서 싸우고 있어도, 엄밀히 말하자면 언젠가 적이 될지도 모르는 자들이다.
이들 또한 독립 이후에 그리는 나라가 따로 있을 테니까.
내전이 벌어지는 건 자제해야겠지만, 각자의 욕망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합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음식은 입맛에 맞는가?”
“실력이 제법이군.”
나는 요리사를 칭찬하며 칼끝을 세워 고기를 썰었다.
두툼한 고기에서 육즙이 흘러내렸다.
적당히 익은 고기를 입에 넣자, 큰 덩어리가 부드럽게 녹아내린다.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일세.”
그가 분위기를 전환하며 말을 이었다.
“이런 자리가 익숙해 보이는군.”
현재 나는 수준급의 식사 예절을 보이며 식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딱히 신경 쓴 것은 아닌데, 왕세자 시절 항상 격식에 맞게 식사를 한 덕에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그리하고 있다.
당연히 그때만큼이야 아니겠지만, 이 정도 예절은 귀족가에서 자란 이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
그는 아무래도 내가 귀족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독립군 활동을 하다 보면 목숨이 위험할 텐데, 혹 부양하는 가족들은 있나?”
“딱히 없다.”
“그렇군. 결혼을 약속한 여자나, 좋아하는 여자는?”
나는 고기를 입에 가져가다 말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질문이 상당히 사적이다.
보다 공적인 대화가 오갈 줄 알았거늘.
이 녀석, 아무래도 내게 관심이 많은 듯한데.
내 무력에 관해 네더만에게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그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별다른 의도는 없다네. 사람은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더 강해지는 법이니. 자네의 강함의 이유가 그곳에 있나 했지.”
“그런 건 딱히 없다.”
“그렇구만.”
내 대답에, 그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재수 없게 웃었다.
별다른 의도가 있는 거 같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이든 괘념치 않았기에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고기를 입에 넣었다.
슬슬 배도 찼겠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을 꺼낼 차례였다.
“우리가 이츠리엘에게서 당신의 부하를 구했다는 건 알고 있을 테지.”
“물론 알고 있네. 안타까운 소식이야. 그 부분에 관해서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그에게 받은 암호문이 있다. 해석을 공유했으면 하는데.”
내 말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리해야지. 아직 정확한 내용은 나도 모르지만. 자네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를 거 같은데.”
이 암호문에 담긴 정보가 왕세자의 생존과 연관되어 있다는 건 그 또한 대강 알고 있을 터.
그것이 어떤 문제를 야기하건, 녀석은 내 힘을 빌린다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여기고 있을 터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 또한 흔쾌히 힘을 보탤 생각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손으로 이 소문의 근원을 지울 생각이니까.
나는 품에서 꺼낸 암호문을 건네주었다.
“……이것이군.”
암호문을 건네받은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