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제56화 굽이치는 해협 (1)
네더만을 포함한 우리는 굽이치는 해협의 본부가 있다는 테이난 영지를 향해 계속해서 남하하고 있었다.
현재 우리가 위치한 곳은 도시, 바르바탄.
웅성웅성.
숙소를 찾기 위해 움직이던 중,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는 것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겹겹이 쌓인 뒤통수 너머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게시판이 있었고, 그 위로 지금 막 누군가의 초상화가 붙고 있었다.
게시판까지 거리가 있었지만 내게는 문제되지 않았다.
나는 그 초상화와 알렌을 번갈아 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알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녀석에게 솔직히 말했다.
“네 초상화가 여기까지 퍼진 것 같다.”
“예?! 저, 정말로요?”
깜짝 놀란 녀석의 얼굴은 금세 하얗게 질려 갔다.
“가서 한번 보거라.”
지금껏 우리는 초상화가 퍼졌다는 크래커의 말만 들었을 뿐, 그것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아, 아니에요. 봐서 뭐 합니까. 혹시 알아볼 수도 있고.”
알렌은 턱에 붙여 놓은 복슬복슬한 수염을 더욱 넓게 퍼트리며 얼굴을 가렸다.
그런다고 가려지겠냐만.
그래도 대머리에 수염까지 붙여 놓으니 다른 사람 같기는 하다.
내가 말했다.
“알아볼 일 없으니, 가서 보기나 해 봐.”
알렌이 내게 불안한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말 안 듣는 녀석의 반질거리는 머리통을 한 대 때릴까 하다가, 잔뜩 겁먹은 모습이 비 맞은 똥개처럼 처량하여 네더만에게 시선을 옮겼다.
“네가 데리고 갔다 와.”
내 말에, 네더만이 본인의 가슴팍을 짚으며 눈을 키웠다.
“내가? 이렇게 다 큰 녀석을? 자네가 착각하나 본데, 알렌은 세 살 난 꼬맹이가 아니라고. 잘 봐 보게. 수염도 이렇게 멋들어지게 나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요. 제가 애인가요. 저 안 봐도 됩니다. 하하.”
호탕하게 웃은 녀석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왜 그러세요? 그러다 진짜 누가 알아보면 어떡하려구욧!’
녀석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밀어 치운 나는, 내 의견에 반하는 녀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사이 네더만은 저 멀리 있는 초상화를 보고는 씩 웃고 있었다.
그 또한 볼 수 있을 테지.
“까짓것 내가 인심 한번 쓰겠네. 안 그래도 세 살배기 자식이 갖고 싶던 참이었거든. 덩치가 좀 많이 크기는 하지만, 썩 나쁘지는 않군.”
내 의도를 파악한 네더만은 알렌의 목을 팔로 걸어 잠그더니 반강제로 끌고 갔다. 알렌은 그 품에서 버둥거리면서도 억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그 상황을 보던 이리엘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알렌을 보았다.
“초상화를 확인하면 더 불안해하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요새 도시에 들를 때마다 숙소에 틀어박혀서 못 나왔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다. 저걸 보면 나아지겠지.”
바르바탄에 오기까지 알렌은 사람 사는 곳을 지나칠 때면, 죄지은 사람처럼 제 몸을 꽁꽁 숨겨 왔다. 머리를 밀고 수염을 붙였음에도 불안하단다.
저리 소심한 놈이 어떻게 제국군 앞에서 허장성세를 부렸던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녀석을 심부름시키기 성가셨던 나는, 이번에 그 불안감을 덜어 줄 요량이었다.
“궁금하면 너도 가서 봐 봐.”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리엘은 그제야 네더만의 뒤를 총총 따랐다. 네더만은 앞을 막는 인파를 헤치며 알렌을 초상화 가까이 끌고 가고 있었다.
“잠시 좀 지나갑시다! 여기 덩치 크고 수염까지 난 세 살짜리 애가 있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얼굴은 보지 마쇼. 부끄러움이 상당히 많은 녀석이라고.”
네더만의 수고 덕분에 가장 앞 열까지 손쉽게 도착한 알렌은, 양손으로 가리고 있던 얼굴을 들어 손가락 틈새로 자신의 초상화를 빼꼼 바라보았다.
“뭐, 뭐야?!”
화들짝 놀란 알렌은 자신의 두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연실 비비적거렸다.
“……말도 안 돼.”
허탈한 심경이 그의 목소리를 따라 힘없이 흩어졌다. 흰사자의 동료라는 자의 얼굴이 눈앞에 떡하니 그려져 있으나, 어디에도 자신의 얼굴은 없었다.
“허, 흰사자의 동료가 이렇게 생긴 자였어?”
네더만이 그 옆에서 턱을 쓸며 감탄을 터트렸다. 어느새 다가온 이리엘도 허망한 목소리를 내는 건 마찬가지.
“……그러게요. 이렇게 생긴 사람이었군요.”
그들의 반응을 본 알렌은 자신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에 그려진 얼굴은 자신과 닮은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얼굴이었다.
“내가 그려도 이것보다는 낫겠는데?”
네더만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알렌을 바라보았다. 실의에 빠진 알렌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자신의 빈 머리를 쓸어 만졌다.
“나, 나는 대체 왜 머리를 밀었던 거지?”
그가 변장을 위해 잃었던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 아닌가.”
“……맞아요. 적어도 이제 불안에 떨 일은 없잖아요.”
둘은 절망에 빠진 알렌을 토닥여 주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알렌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구경꾼 사이로 축 늘어진 알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충격을 받은 듯하지만, 이제 전처럼 궁상떨지는 않겠지.
알렌의 초상화가 어쩌다 저렇게 그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예상해 보자면 당시는 워낙 늦은 밤이었고, 오만한 연기를 했던 알렌의 표정과 그들이 그런 알렌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압박감이 더해져 이런 일이 벌어진 듯했다.
평소에 알렌은 덩치만 컸지, 순한 인상이니까.
그때 초상화를 붙였던 경비병이 다시금 다급히 뛰어와 한 장의 게시물을 더 붙였다.
“헉!”
“아니, 저게 참말인가?”
“……어찌 이런 일이.”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새로 붙은 게시물에 모든 인파가 크게 출렁였다.
불붙듯 빠르게 번져 가는 소란.
그만큼 그 여파가 상당했다.
그것의 내용을 본 나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그가 살아 있었나?
마찬가지로 그것을 보고 다가오는 굳은 표정의 일행들.
알렌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로드르 헤이어서 님의 공개 처형 날짜가 잡혔다네요…….”
로드르 헤이어서.
나 또한 잘 알고 있는 자였다.
그는 프렌치아의 재상을 지냈던 자이자 아버지의 막역한 벗이었으며, 트레터 세리어스 공작과 함께 프렌치아를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이었으니까.
그런 그를 이제야 공개 처형한다니.
“그가 아직 살아 있었나?”
내 물음에, 네더만이 기함을 토했다.
“그걸 몰랐다고? 세 살짜리 애가 여기 하나 더 있었군.”
“내가 원하는 답은 그것이 아닐 텐데.”
“자세한 건 자네의 똑똑한 친구들이 설명해 줄 걸세.”
네더만이 알렌과 이리엘 쪽을 바라보았다. 그 또한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하는 듯했다.
이리엘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기본 상식을 멀리해야 한다는 조건이라도 있는 거예요? 다 큰 어른들이 어떻게 그것도 몰라요?”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라고 해 두자고.”
네더만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이리엘은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숙소부터 잡고 이야기하죠. 길거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거 같으니까.”
그녀의 의견을 따라 숙소부터 잡은 우리는 1층 식당 구석에 모여 앉았다.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일행의 공식 이야기꾼 알렌이 목을 풀며 내게 물었다.
“큼큼, 어떻게 말씀드릴까요?”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답했다.
“짧고 간결하게.”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알렌이 입을 열었다.
“로드르 헤이어서 님이 프렌치아의 재상이었던 건 두 분 다 아시죠?”
나와 네더만은 동시에 황당한 시선을 보냈다.
“다행히 이 정도는 알고 계시네요. 이것도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로드르 님은 프렌치아의 주류 학파인 ‘이드렐 학파’의 대표 학자셨습니다. 당시 프렌치아에서 행정 업무를 맡던 이들의 대부분은 모두 이드렐 학파 사람들이었고, 그를 정신적 지주로 생각하고 따랐죠. 그러니 총독부에서도 내부 반발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드렐 학파 사람들 대부분이 반기를 든다면 나라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총독부에서는 로드르 헤이어서 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도 지금까지 집행하지 않았던 거죠.”
알렌의 이야기를 들으니 당시의 정황이 대충 이해가 갔다.
프렌치아를 점령했지만, 총독부 체제하에 나라를 꾸리기 위해서는 행정 능력을 가진 인재들이 필요했을 터.
안 그래도 왕과 귀족들을 쳐 내면서 많은 반발이 있었을 테니, 총독부에서도 로드르 헤이어서의 처형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렇다면 할렌트는 그를 왜 이제 와 공개 처형하려는 것일까?
이유는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현재 북부에서는 흰사자를 두고 레오니랜서의 부활이라며 독립에 대한 열망을 피워 내고 있었다.
로드르의 공개 처형은 그 열기를 단번에 식힐 수 있는 효율적인 계책.
총독부는 그런 로드르의 공개 처형을 한 달 뒤로 잡았다.
공개 처형을 프렌치아 전역에 알리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자신 있으면 막아 보라는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로드르의 공개 처형으로 그들은 총독부의 건재함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현자’로도 불리운 로드르 헤이어서는 프렌치아 국민의 정신적 지주라 해도 무방한 존재였으니까.
그런 그의 죽음은 다시 한번 프렌치아를 꺾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독립의 열망은 자연스레 사그라질 터.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 그를 구해 낸다면 어떻게 될까?
북부에서 서서히 피어나고 있는 열기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되어 프렌치아 전역으로 뻗어 나갈 것이었다.
지금 나는 애써 피운 불길을 꺼트릴 것이냐, 아니면 그 불길을 더욱 키워 프렌치아 전역을 덮을 것이냐를 선택할 수 있는 기로 앞에 서 있었다.
할렌트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것을 미끼로 나를 끌어들이려는 수작일 거고.
그러니까 지금 녀석은 로드르 헤이어서가 프렌치아에서 가지는 상징성을 미끼로 나를 도발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싸늘히 조소했다.
“개나 주인이나 하는 짓은 똑같군.”
결국 이 상황은 아르텐 사람들을 잡아 두고 나를 유인했던 ‘초원의 들개’의 행동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어쩌실 거예요?”
이리엘이 내게 불안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물음에 네더만과 알렌 또한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나는 고민도 없이 답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어쩌긴. 나를 도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줘야지.”
“예에?!”
화들짝 놀란 알렌이 어벙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네더만도 어이가 없는지 입을 열었다.
“이 친구야, 이건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내가 그것도 모르고 이럴까.”
“……그거야 그렇겠지만.”
“이번 건 너무 위험해요. 할렌트가 바보도 아니고 정말 단단히 준비할 거라고요.”
이리엘도 옆에서 말을 보탰다.
이들의 반응이 이해는 갔다.
녀석 또한 이제 내가 소드 마스터라는 것을 알게 됐을 터.
내 전력이 노출된 만큼, 그것을 감안하여 덫을 설치하겠지.
그러니 이들은 아무리 나라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건 할렌트 또한 마찬가지겠고.
결국 로드르의 공개 처형은.
나와 녀석의 정면 승부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