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제55화 일어나는 불길
루시안은 제네스의 소식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마음 한편에 괜한 염려가 일었다.
“이리엘이 걱정이네.”
제네스가 날뛸수록 그와 함께 있는 이리엘 또한 위협을 받게 될 것은 자명한 바.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고 제네스가 잘 지켜 줄 거라 믿고 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생을 전장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루시안의 심경을 읽은 레이크가 입을 열었다.
“잘 있을 겁니다. 워낙 당차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오히려 너무 당차서 문제일 정도로. 제네스와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건 그렇네요.”
상단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이리엘은 제네스를 못 잡아먹어 안달일 정도로 싫어했었다.
제네스는 그런 그녀를 새끼 고양이 보듯 취급도 안 해 줬지만.
그런 이리엘의 마음은 잘 알고 있었다.
제네스의 성격이 싫은 것도 크겠지만, 녀석이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게 싫은 거겠지.
“그나저나 정말 생존해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그들이 받은 정보는 흰사자에 관한 이야기뿐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제네스 일행들이 전한 은밀한 소식 또한 함께였다.
“처음에는 그럴 리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갈수록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루시안이 쓰게 웃었다. 아직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세자를 본 목격자도 있다고 했다. 아주 조금은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생기고 있었다.
“확률은 매우 낮지만, 확실히 가능성은 열어 둬야겠습니다.”
레이크가 말했다.
물론 그 가능성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희박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왕세자를 살려 두었을 이유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만약 그럴 이유가 있다면, 왜 지금까지 숨겨 왔을까?
답은 알 수 없었다.
정황상으로는 할렌트의 수작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세자의 생존은 독립군의 통합을 생각했을 때 외면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는 프렌치아의 독립 여부와는 무관해도 독립군에 관해서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므로.
“만약 저하가 생존해 있다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무엇을?”
“왕의 자리 말입니다.”
레이크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사실 그가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자신은 루시안을 왕위에 올릴 것이기에.
루시안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 자리는 본래 저하의 것이다. 당연히 저하가 살아 계시면 저하가 왕위에 오르셔야지.”
“제 왕은 루시안 님뿐입니다.”
“하하. 그건 고마운 일이군.”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레이크가 표정을 더욱 굳혔다.
무표정한 그가 표정으로 심경의 변화를 드러낸다는 건, 그만큼 이 사안을 무겁게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럼 찬탈이라도 하란 말이냐?”
루시안의 물음에, 레이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운 녀석.”
루시안은 그의 충정을 보며 아이를 어르듯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가 그 녀석을 보지 않아서 그래. 저하를 뵈면 그 또한 왕이 될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될 거다.”
“아니요. 그는 10년 전의 사람입니다. 살아 있다면 지난 10년간은 제국의 포로로 잡혀 있었을 테고요. 10년 전에는 그런 사람이었다 해도, 지금은 아닐 겁니다. 지난 10년간 루시안 님이 이룬 업적을 생각해 보세요. 1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저는 루시안 님만이 왕좌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만들 것이고요.”
“고마운 말이야. 하지만 그 부분에 관한 판단은 아직 일러. 아직 저하가 살아 계신 것이 확인된 것도 아니고, 직접 만나 얘기해 본 것도 아니잖아. 미리 대비하는 건 좋지만, 섣부르게 나아가지는 말자.”
루시안이 레이크의 어깨를 두드렸다.
레이크는 그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여유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내.
루시안을 볼 때면 항상 너른 해협이 떠오른다.
세상을 양분하는 수평선 아래,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물결.
그 넓고 깊은 해협에는 거대한 산도, 깊은 골짜기도 모두 공평히 잠겨 있다.
루시안은 그런 남자였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이 남자야말로 진정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이었다.
레이크는 그래서 루시안을 반드시 왕위에 올리고 싶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새로운 프렌치아를 위해서도.
레이크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럼 이번에는 저하가 살아 계시지 않다는 가정하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이쪽이 확률이 더 높으니까요.”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크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제네스 님이 문제입니다.”
“그러게. 재밌는 상황이네.”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
우연히도 그 둘 모두가 현 상황에 가장 중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는 언젠가 루시안 님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겁니다.”
“날카롭기에 위험한 칼이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고.”
루시안도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인정했다.
그의 무력도 그렇거니와 그는 이제 레오니랜서를 상징하는 남자가 됐다.
그의 위명은 날이 갈수록 높아질 터였고, 프렌치아 전역을 독립에 대한 희망으로 들끓게 할 터였다.
그리고 그만큼 사람들은 그를 추종하고 따르게 되겠지.
왕이 될 자신보다 더.
세상에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이 레이크가 우려하는 바였고.
“그가 지금은 왕위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사람의 마음입니다. 언제 홱 바뀔지 모르죠. 그렇기에 그를 레오니랜서로 만드는 것에 많은 고민을 했었고요.”
“그럼에도 너는 그렇게 했지.”
“……네, 그랬죠.”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레이크는 그렇게 했다.
그는 제네스와 대화를 나눴던 순간을 떠올렸다.
레오니랜서를 부활시키겠다는 계책을 설명하기에 앞서, 레이크는 이와 같은 염려를 제네스에게 직접적으로 말했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태도로 코웃음을 쳤었지만.
-내가 왕을?
-귀찮아서 하라고 해도 안 해.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너도 그렇지만, 나도 루시안을 왕으로 만들 작정이거든.
제네스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확고했다.
그는 적어도 자기 속내를 숨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는 분명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가 문제인 것이지.
지금은 자신과 뜻이 같지만, 그는 자신과 달리 루시안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은가.
레이크는 이런 우려를 감추지 않았고, 제네스는 그 물음에 이리 답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루시안을 잘 알아.
-내 말을 믿고 안 믿고는 알아서 하고.
-그래서 어쩔 생각인데. 칼날에 베일까 무서워 검을 쥐지 않을 생각이냐.
레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믿건 말건 상관치 않겠다.
-대신 나를 똑바로 쥐어라. 나는 하늘 아래 가장 강한 사람이며, 세상의 무엇도 벨 수 있는 검이다.
-루시안이 왕위에 오르는 시기는 네가 그 칼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음이야.
-어중간하게 쓴다면 네놈의 목부터 베어 주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단호한 말에, 레이크는 간만에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마치 루시안을 만났을 때처럼.
대업을 위한 운명의 끈이 이어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레이크는 자신의 빈손을 움켜쥐어 보았다.
그 손아귀에는 제네스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이 쥐어져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 베어 버릴 수 있는 검.
이 검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은 대륙에 루시안밖에 없음을 그는 알았다.
이 검을 누구보다 잘 휘두를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 또한, 그는 알고 있었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맞물리고 있는 듯했다. 그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상념에서 깨어난 레이크는 루시안을 보며 말했다.
“솔직히 그를 믿고 싶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이죠. 그래서 두렵기도 합니다. 무력뿐만 아니라 통찰력까지 뛰어난 자입니다. 왕이 되고자 마음먹는다면 본인의 힘으로 충분히 될 수 있는 사람이죠.”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동의했다.
“확실히 난 놈이지. 대체 어디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건지. 진짜 신수 아니야?”
“신수는 아닙니다.”
가벼운 농담마저도 진지하게 받아치는 레이크에 고개를 내젓는 루시안이었다.
“너도 참 대단하다. 어쨌거나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하지만 이렇게 말해 주고 싶군.”
루시안의 푸른 눈동자가 그를 직시했다.
“그저 온전히 믿어. 그 끝이 죽음일지라도.”
한 치의 의심도 담기지 않는 형형한 안광이 레이크의 염려를 단숨에 꿰뚫는다.
“그 또한 이제 우리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야. 어차피 우리가 통제할 수도 없는 녀석이고. 그럴 때는 그냥, 믿어. 그게 최고야.”
루시안의 말에 내포된 의미는 간단했다.
그를 최대한 활용해도 좋다는 말.
그 힘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더라도, 그를 믿어 보자는 의미였다.
레이크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것으로 보이자, 루시안은 진지함을 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왠지 모르게 녀석이 그냥 믿음이 가. 딱히 이유는 모르겠어. 흠…… 굳이 따지자면 본능 같은 거야. 나도 녀석이 왜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믿어져. 설마 이름 때문인가? 만약 그래서 그런 거라면. 내가 고작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사람을 혼동하는 바보가 아니길 바랄 수밖에.”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루시안 님은 이제 곧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 날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물론 알고 있지.”
제네스의 명성이 하늘을 뚫고 치솟을수록 루시안 또한 왕이 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 누가 허수아비 왕을 바라겠는가.
모두가 왕으로 인정할 만한 자가 왕이 되어야 프렌치아는 다시금 하나가 될 수 있을 터.
루시안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하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부담스럽기도 하면서 왠지 기다려지는 순간이야.”
그의 안광이 푸르게 타올랐다.
“솔직히 자신 있거든.”
* * *
“……소드 마스터라.”
총독, 할렌트 바레인은 조금 전 받아 든 보고를 조용히 곱씹었다. 소대장, 에르카의 서면 보고였다.
초원의 들개와의 전투 장면을 직접 본 그의 말이니 믿을 만했다.
하지만 적힌 내용은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웠다.
용 사냥꾼을 생포하기 직전, 흰사자가 나타나 초원의 들개들을 모두 죽였다는 이야기.
그 압도적인 무력이 좁은 지면에 강렬하게 적혀 있었다. 에르카가 적은 문장에는 그 강함에 대한 수사가 가득했다.
“홀로 초원의 들개들을 압도했다면 여지가 없겠군.”
할렌트는 그들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로는 그들을 홀로 감당할 수 없다.
적어도 소드 마스터여야 그것이 가능할 터.
에르카의 보고를 보면 이제 갓 소드 마스터에 이른 자도 아니었다.
이미 완숙의 경지에 이른 자.
‘대체 어디서 그런 자가……. 설마 녀석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할렌트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황제의 은총을 받은 이가 제국을 적대할 리 없었다.
“……써먹기 좋은 개들이었는데 그건 조금 아쉽군.”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보좌관, 알스레도에게 시선을 주었다.
“북부가 난리가 아니겠어.”
“예. 혹 폭동의 불씨로 번질까 하여, 소문을 진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럴 테지.”
흰사자 레오니랜서는 프렌치아 국민에게 프렌치아 자체라 여겨져도 무방한 신수.
그 상징성에 미천한 것들이 어떤 희망을 품을지는 직접 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었다.
아마 의도되었다고 봐야겠지.
할렌트는 손쉽게 북부의 별, 늙은 여우를 떠올렸다.
탁월한 전략가로 이름을 떨친 자.
그들의 손에 국새와 더불어 소드 마스터까지 쥐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려 하겠지.
“그들을 이끄는 놈이 대체 어떤 녀석인지 보고 싶군.”
소드 마스터와 북부의 별까지 품은 사내.
독립군이 통합된다면 아마 그자가 맨 앞에 서서 그들을 이끌 터.
과연 그가 누구일지 궁금했다.
“법무부에 로드르 헤이어서의 공개 처형 집행을 준비하라 이르거라. 나 또한 그리 갈 것이다.”
할렌트의 명을 들은 알스레도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쉬이 짐작할 수 있는 까닭이었다.
알스레도가 명을 받들고 나가자, 할렌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의 너른 창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아직은 저 멀리 있을 이들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스스로 타오르는 것은 나쁘지 않다만, 내가 아직 그것을 허락지 않았느니라.”
지금은 자신이 계획한 때보다 조금 일렀다.
프렌치아를 덮을 불길은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활활 타올라야 한다.
그러니 지금은 이 열기를 확실히 잠재워둘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