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제53화 네더만 (2)
쿠르르르릉―!
천지가 쪼개지는 듯한 굉음이 연이어 울었다.
흰사자의 푸른빛 오러와 들개들의 검붉은 오러가 얽히며 사방에서 회오리쳤다.
작은 전장이 한층 더 가열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콰앙!
강한 폭발의 충격파가 땅을 밀어 버리고 지나간다.
주변의 지반이 움푹 가라앉을 정도의 파괴력.
“큭.”
이솔루니는 짧은 신음과 함께 걸음을 물렸다.
그가 물러선 자리를 다른 대원들이 신속하게 메꿨다. 그는 부러질 것 같은 손목을 움켜잡으며 미간을 잔뜩 구겼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새끼지?’
흰사자의 검이 갈수록 묵직해지며 첨예한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지속적인 상승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반면 자신들의 힘은 서서히 하향을 그리는 중.
체력적으로 지치니 당연한 일이다. 용 사냥꾼과의 전투가 어느 정도 영향을 줬으리라.
그런 상황에, 저 괴물 같은 놈은 오히려 갈수록 강한 힘을 내뿜고 있으니…….
팽팽한 균형을 이루던 전력의 격차가 점차 벌어지며, 전장의 승패가 가파르게 기울고 있었다.
콰과과광!
빛 무리가 터져나가며 흰사자를 포위하고 있던 이들이 튕겨 나갔다.
사위를 포위한 들개들의 중심에서 홀로 서 있는 흰사자.
가면에 가려진 얼굴 덕에 표정이 읽히지 않는다. 호흡도 거칠어지지 않아, 이자가 대체 어느 정도의 상태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이 미X놈은 지치지도 않는단 말인가.’
상대의 상태를 읽을 수 없다는 압박감이 공포가 되어 어깨를 짓눌러 왔다.
‘……설마, 소드 마스터는 아니겠지?’
이솔루니는 이를 꽉 물며 고개를 저었다.
드넓은 대륙에 고작 네 명뿐인 존재.
그들 중 여기에 있을 만한 자는 없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가 아니고서야 어찌 자신들을 홀로 압도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아무리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는 성벽을 앞에 둔 기분이었다.
대원들 모두 자신과 같은 심정일 터.
마음에서부터 점차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이게 너희들의 전력인가?”
흰사자가 검을 늘어뜨린 채 말했다.
명백한 도발.
그럼에도 들개들은 공세를 펼치지 못하고 송곳니만 드러낸 채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 * *
“그럼 이제 슬슬 마무리하자.”
내가 말했다.
녀석들의 낯빛이 순식간에 똥 씹은 것처럼 굳었다. 스스로 자신들의 상태를 잘 알 터.
나를 향한 칼끝의 예기가 서서히 무뎌지고 있었다.
더 이상의 전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이제 끝을 낼 때가 온 것이지.
그래도 간만에, 꽤 재밌는 전장이었다.
마교 놈들에 비하자면 부족하지만, 7명이 함께 합을 맞춘 것치고 나쁘지 않았다.
압박감도 상당했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걸 떨쳐 내는 맛도 있었다.
긴장감까지 주지 못해도 여흥 정도로는 충분했다.
과연, 특임대란 이름값은 허명이 아니었다.
“어디서 허세야!”
“뒈져라!”
이를 간 녀석들이 패배를 부정하려는 듯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한순간에 사위를 점해 오는 공세.
끝을 내기로 한 이상, 이제 나도 적당히 봐줄 이유가 없다.
나는 칼날 위로 진기를 밀어 넣었다. 속전속결로 마무리할 작정이다.
막대한 내력을 머금은 칼날이 지잉― 울었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4장 광휘폭검(光輝爆劍).
검을 휘두르는 동시에 푸른빛의 섬광이 폭발했다.
콰과과과과과―!
칼날을 타고 뿜어진 빛 무리가 공간을 통째로 집어삼킨다.
예기를 품은 빛줄기가 사방에 휘몰아치며 반원의 막으로 응축된 뒤, 이내 커다란 동산처럼 크기를 키우며 단숨에 일대 반경을 쓸어버렸다.
광장 위로 반원의 발광체가 솟아나는 듯한 광경이었다.
구오오오오.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드러나는 광경은 처참했다.
주변의 지반이 깨끗하게 밀려 움푹한 구덩이를 만들어 냈다. 그 잔해 속에서 넝마가 된 들개들은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둘이 죽었고, 다섯이 남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는 자는 이솔루니밖에 없었다.
나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곧장 움직였다.
첫 번째 목표는 창을 쥔 파르페.
신형을 따른 검이 곧게 뻗어지며 일직선을 그린다.
파르페가 다급히 창을 들어 막아 왔으나 백색의 섬광은 창과 함께 녀석의 목을 참했다.
촤악!
“이 개X끼가!”
비명 어린 고함과 함께 채찍이 날아들었다. 나는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궤적을 찰나에 꿰뚫으며 검을 뻗었다.
콰직!
곧은 검이 녀석의 심장을 꿰뚫었다.
찰나 뒤를 향해 다가오는 은밀한 궤적.
나는 뒤로 돌며 두 번의 연격을 펼쳤다.
희끗한 궤적 한 번에 사이드가 반 토막이 났고, 두 번째 궤적에 녀석의 몸이 사선으로 갈라졌다.
붉은 핏물이 허공에 자수를 놓았다.
“으아아악!”
기합과 함께 공간을 가득 삼켜 오는 검영.
대부분은 흘리고, 몇 개는 막아 내고, 하나는 엇갈리듯 지나치며 검을 뻗었다.
백색의 섬광이 또 하나의 생을 삼켰다.
나는 그제야 걸음을 잠시 멈췄다.
한 호흡에 넷이 죽었다.
이제 남은 건 이솔루니뿐.
“뒈져라!”
그런 내게 달려드는 녀석.
놈의 눈빛은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마주 쇄도했고, 검을 뿌리며 스치듯 지나쳤다.
푸확!
걸음 뒤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그리고 이내 고요한 적막이 내렸다.
나는 호흡을 길게 뱉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짧은 시간, 간만에 폭발적으로 힘을 뽑아냈다.
개운하면서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상황을 마무리하고 구덩이에서 나오니,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 대단하구만.”
돌아보니 거지꼴인 자가 있었다. 나는 그가 네더만임을 어렵게 알아봤다.
하지만 모르는 척했다.
“적이 하나 더 있었나?”
“아, 아니! 나는 녀석들과 한패가 아니라고! 내 몰골을 보게. 들개로 보이는가?”
네더만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나는 놈을 무시하고 주변을 넓게 포위하고 있던 까마귀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쩔 테냐?”
해보겠냐는 물음이었다.
소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나서서 말했다.
“검은 돌려주시지요.”
나는 손에 쥐고 있는 검을 녀석에게 던졌다.
뱅글뱅글 돌아 날아간 검이 녀석의 앞에 꽂혔다.
“잘 썼다. 관리가 잘돼 있더군.”
지나는 길에 강제로 빌려 온 검이었다. 그가 검을 뽑아 허리춤에 꽂으며 말했다.
“철군한다.”
묵직하게 말하며 등을 돌리는 녀석.
명령에 반하는 자는 없었다. 주변을 멀찍이서 두르고 있던 까마귀들이 모두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을 베어도 상관없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자들이었고 사방으로 도망치면 귀찮아지는 건 나다.
전멸시킬 수 없다면 굳이 나설 이유가 없다.
그것이 이들을 놓아준 이유였다.
이것으로서 할렌트 또한 내 전력을 대략적으로 가늠하게 되겠지.
하지만 괘념치 않는다.
정확히 가늠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거니와 그는 내 전력을 결코 가늠할 수 없으니까.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그 끝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모두 떠나자 네더만은 내게 다가오며 입을 놀렸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 자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것인가?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이 진정을 않는 다네.”
나는 답하지 않고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하나 물어볼 것이 있는데…….”
내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그는 말문을 떼었다.
“혹시, 아까 내가 하는 말 모두 들었나?”
“듣지 않았다고 없던 말이 되지는 않지.”
“젠장, 들었군.”
네더만이 괜히 호탕한 척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설마, 내가 자네 정체를 놈들에게 말했을 것이라 믿는 건 아니겠지? 그저 잠깐의 위기를 넘기기 위한 수작이었을 뿐이네. 누구보다 강한 자네이니 마음도 넓겠지.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줄 거라 믿고 있네.”
“내 정체를 알고 있다면, 내가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 걸 잘 알 텐데.”
“……젠장. 믿어 주게. 진짜로 이야기하려던 건 아니라고!”
그가 억울한 듯 항변하다가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역시 자네였구만. 대체 어떻게 그 나이에 그렇게 강해질 수 있지? 세기의 천재들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그 나이대에 도달하다니……. 혹시 엄청난 동안인 건가?”
그는 나를 어벙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난 동안이라. 어찌 보면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나는 녀석의 물음에 답변할 생각이 없었다.
녀석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것보다 내가 묻고 싶은 게 먼저니.
“너, ‘굽이치는 해협’ 소속이냐.”
* * *
그 시각, 이리엘과 알렌은 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진 구릉에 바짝 엎드린 채 마을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이 끝난 거 같죠?”
“아마도.”
이리엘의 말에, 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탄 까마귀 기사단이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가 보자.”
금세 마을로 들어선 이들은 자연스레 마을의 중심에 있는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여전히 고요했다.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인지 여전히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는 듯했다.
“제네스 님!”
광장에 들어선 이들은 멀쩡한 제네스를 보며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가다가, 그 앞에 있는 사내를 보며 흠칫 놀랐다.
“아, 아직 안 끝났어요?”
이리엘의 물음에, 추레한 몰골의 사내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허, 내가 몰골이 이래서 못 알아보나 보군. 날세. 우리 벌써 세 번째 만남이지 않은가.”
둘은 거지꼴의 사내를 자세히 살펴보다 동시에 손바닥을 치며 그를 알아보았다.
“뭐야? 이 사람이 상황을 해결한 거예요?”
이리엘이 놀라 물었다.
제네스는 전투를 벌이지 않은 사람처럼 고고하게 서 있는 반면, 네더만은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었다.
주변의 흔적과 몰골을 봤을 때, 그가 혼자 싸운 듯했다. 그는 제네스가 인정한 강자이기도 했으니까.
이들의 반응에 네더만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부끄럽지만, 들개들은 이자가 처리했네.”
이리엘과 알렌은 놀란 눈으로 제네스를 보았다.
그가 강한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초원의 들개와 격전을 벌인 사람치고는 너무 멀쩡하지 않은가.
그들 또한 천지가 무너지는 굉음을 멀찍이서 듣고 있었기에 더 놀라웠다.
제네스가 무심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이 녀석도 함께 움직일 거다.”
“네?!”
둘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네더만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네스는 이 남자를 문전박대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함께 움직인다니.
이리엘이 물었다.
“다섯 보라면서요.”
반발하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아직 함께하겠다고 대답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제네스는 네더만의 말은 무시하고 이리엘의 의문에만 답해 주었다.
“이자, 굽이치는 해협의 간부라 하더군. 용 사냥꾼이라고 유명하다던데. 녀석과 함께한다면 그들에게 쉽게 접촉할 수 있겠지.”
암호문을 건네기 위해 굽이치는 해협과 접촉해야 하는 상황.
초원의 들개와 나누던 이야기를 듣기로 서부의 검이라길래 물었더니, 마침 그곳의 간부라고 한다.
적이 녀석의 신분을 인증해 준 격이나 다름없느니 더 이상 경계할 이유도 없고, 녀석과 함께한다면 번거로운 과정 없이 목적을 이루면서 암호문의 정보에 대해 보다 깊게 접근할 수도 있을 터.
지금의 상황에서는 여러모로 이득인 동행이었다.
“예?! 이자가 용 사냥꾼이라고요!”
알렌과 이리엘이 동시에 펄쩍 뛰며 입을 쩍 벌렸다.
알렌은 다시 한번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거지 꼴의 사내가 서부의 검, 용 사냥꾼이라니.
아니, 몰골이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지금까지 이자가 보인 행실은 가볍기가 깃털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독립군 중 최강이라 평가되는 용 사냥꾼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알렌은 제네스를 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래도 아닌 거 같은데요?”
“초원의 들개들이 한 말이니 사실일 거다.”
제네스가 주검이 된 자들을 보며 말했다. 네더만은 알렌을 보며 입술을 쭉 내밀고는 서운한 티를 냈다.
“이거 참, 솔직히 상처받았네.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아닌 거 같다니. 내가 그렇게 믿음직해 보이지 않았나?”
“…….”
알렌이 무언으로 긍정하자, 네더만은 말을 계속했다.
“큼큼. 뭐, 그 부분은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고. 일단 이자와 나누던 대화부터 마무리하겠네.”
네더만은 알렌을 바라보던 시선을 제네스에게 옮겼다.
알렌과 이리엘의 등장으로 나누던 대화가 끊겼던 탓.
그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진지한 투로 말문을 떼었다.
“그래서 지금 세자 저하께서 살아 계시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