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제51화 초원의 들개 (3)
뙤약볕이 내리쬐는 오후, 그늘 한 점 없는 광장에 한 노인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
그의 입술은 사막처럼 메말랐고, 세월을 담은 주름의 깊이는 모래 언덕처럼 굴곡져 있었다.
“으…….”
노인의 옅은 신음이 공허하게 흩어졌다. 모두가 그의 고통을 알았으나 누구도 돕지 못했다.
고요한 광장 위로 앙증맞은 발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타다닥.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소녀가 흰 사발 그릇을 품에 안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출렁이며 쏟아진 물이 대부분 소녀의 옷에, 바닥에 흘렀지만 다행히 마실 만큼은 남아 있었다.
“휴.”
안도의 숨을 내쉰 아이는 노인에게 그릇을 내밀었다.
“할아버지! 물!”
거꾸로 매달려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노인은 입술에 닿는 물기에 허겁지겁 입을 축였다. 물의 대부분은 바닥에 버려졌지만, 노인은 그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갈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불현듯 정신이 든 노인이 눈을 떴다. 그리고 열심히 그릇을 받치고 있는 자신의 손녀를 볼 수 있었다.
“아린!”
노인의 갑작스런 외침에 아린은 화들짝 놀라며 배시시 웃었다.
“이제 좀 괜찮아?”
“어서 가! 어서!”
노인은 몸을 꿈틀거리며 손녀를 매섭게 쫓아냈다. 깜짝 놀란 아린은 다급히 몸을 돌렸지만, 걸음을 옮길 수는 없었다.
누군가 자신의 뒷깃을 잡아 올렸기 때문.
허공에 들려진 아린은 당혹스러움에 뒤를 올려다보았다.
기사가 그녀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린 채 서슬 퍼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의 눈가에 금세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린!”
다급한 외침이 광장에 울렸다.
아이의 어미로 보이는 자가 사색이 되어 달려오고 있었다. 기사는 그런 그녀를 무심히 바라보며 아이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바닥에 나뒹군 아이는 너무 놀라 울지도 못하고 겁에 질린 채 기사를 바라보았다.
“안 돼요! 제발 살려 주세요!”
아이를 품에 안으며 울부짖는 어미.
스릉.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기사의 허리춤에서 서슬 퍼런 칼날이 뽑혀 나왔다.
검을 쥔 기사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주변을 슥 살핀 그가 검을 허리춤에 꽂으며 말했다.
“데리고 돌아가라. 어서.”
기사의 눈가에는 연민이 담겨 있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어미가 고개를 숙이며 기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 순간, 기사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콰직!
“아아악!”
어미는 아이를 품에 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런 이들에게 조각난 살점이 후드득 떨어졌다.
“한심한 새끼.”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사내가 갑자기 날아와 광장에 내려섰다.
눈썹을 가로지르는 긴 상흔을 가진 남자.
초원의 들개, 호르킨이었다.
그는 죽은 기사의 시체에 침을 퉤 뱉으며 말을 이었다.
“기사란 놈이 이리 나약해서야.”
그는 활짝 웃으며 아이를 품은 어미를 바라보았다.
“애건 어른이건 죄를 지었으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지. 안 그래?”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그의 손에는 거대한 낫과 비슷한 형태의 무구, 사이드가 쥐어져 있었다.
“살려 줄 수는 없고, 대신 같이 죽여 주마. 어때? 이 정도면 만족―”
호르킨은 말을 하다 말고 사이드를 허공에 휘둘렀다.
쾅!
무언가가 사이드와 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났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묵직함. 날아온 것은 돌멩이였다.
“어떤 미친 새끼야!”
그의 시선이 돌멩이가 날아온 궤적을 따라 틀어졌다. 그곳에서 웬 검을 쥔 사내가 쇄도해 오고 있었다.
“이 건방진 새끼가!”
콰아앙!
서로의 무기가 부딪치며 굉음이 일었다. 호르킨은 창대로 전해져 오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날아가 건물에 처박혔다.
“어서 데리고 가세요.”
사내는 노인을 매달고 있는 밧줄을 잘라 노인을 받아 낸 뒤, 자신을 뒤따라 다급히 달려온 또 다른 사내에게 전했다.
“아, 예.”
노인을 둘러멘 사내는 자신의 부인과 아이를 데리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뭐 하는 새끼냐?”
호르킨이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내며 걸어 나왔다. 한 번의 경합만으로 실력이 상당함을 알 수 있었다. 예사 인물이 아니다.
그의 미간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그런 그를 막아선 중년의 사내는 여유로운 태도로 검을 고쳐 잡았다.
“남의 신원을 물을 때는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예의라네. 아무래도 자네는 예절을 기본부터 다시 배워야겠어. 내가 싸게 가르쳐 줄 수 있는데, 어디 한번 배워 볼 텐가?”
사내의 말에, 호르킨은 콧잔등을 들썩이며 이죽거렸다.
“X랄하고 있네.”
“이런, 자네는 화법부터 다시 배워야겠군. 미안하지만 가격을 좀 더 받아야 할 거 같네만.”
중년의 사내, 네더만이 능글맞은 미소로 호르킨을 약 올렸다.
“말이 많구나!”
지반을 박차며 쇄도하는 호르킨.
날쌘 그의 움직임을 따라 사이드가 수평으로 그어진다.
쐐애액!
바람이 갈라지며 울리는 섬뜩한 소리.
네더만은 그것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안쪽으로 파고들며 긴 창대를 검으로 쳐 냈다.
쾅!
강력한 충격에 튕겨 나가는 사이드. 하지만 이내 당겨지며 다시금 하반신을 쓸어 온다.
사이드는 낫과 같이 생겨 베고 긁는 공격이 주가 되기에 검으로 상대할 때는 간격을 좁히는 게 관건.
네더만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콰가가각!
두 개의 궤적이 맞부딪치며 철이 갈리는 소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궤도가 틀어진 사이드는 애먼 허공만 베고 지나쳤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그것에 분개한 호르킨이 사납게 휘돌며 사이드를 휘둘렀다.
서―걱!
이어 들리는 소름 끼치는 절삭음.
쿠구궁.
네더만의 뒤쪽에 있던 건물이 비스듬히 갈라져 쏟아져 내렸다.
“호오, 날이 꽤 서 있구만.”
그것을 가뿐히 피해 낸 네더만은 여유로운 태도로 감탄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와 달리 그의 검은 질풍처럼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콰과과과광!
두 개의 궤적이 찰나에 얽히며 발생한 폭발음이 광장을 울렸다.
“젠장!”
위기를 감지한 호르킨이 이를 악물었다.
초록빛을 머금은 오러가 빈틈을 비집고, 그의 머리통을 쪼개기 위해 맹렬히 질주해오고 있었다.
그때, 뱀처럼 기다란 그림자가 그 사이를 막아섰다.
콰아앙!
무언가에 가로막혀 검을 물리는 네더만. 그의 난감한 시선이 전방을 향한다.
광장으로 새롭게 떨어져 내리는 신형들이 있었다.
호르킨까지 합하면 그 수가 무려 일곱.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가 광장 전체를 삽시간에 집어삼켰다.
“흠.”
네더만은 전신을 찌릿찌릿 울리는 압박감을 느끼며 침음을 흘렸다.
“까마귀들 외에 전력이 또 있었나? 이건 좀 예상 밖인데.”
마을로 진입하기 전, 주변을 경계하는 까마귀 녀석들을 보았다.
규모로 봤을 때 1개 소대가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여기고 들어왔는데.
이 정도의 실력자들이 몰려 있을 줄이야…….
왠지 느낌이 싸했다.
네더만은 아니길 바라면서 물었다.
“설마 너희들 특임대는 아니겠지? 그들이 이런 촌구석까지 올 이유가―”
“네놈이 흰사자냐?”
……있군. 빌어먹을.
간만에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적의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자신의 멍청함에 욕지기가 절로 치밀었지만, 네더만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하하. 이거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나 보군. 나는 보다시피 흰사자가 아닐세. 자세히 보라고, 누가 봐도 같은 인간 아닌가.”
“그렇기는 하군.”
“그래서 말인데 나는 이쯤에서 가던 길을 가도 되겠는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살다 보면 이럴 때가 한 번쯤 있지 않나. 잊은 줄도 몰랐던 급한 일이 불현듯 생각나는 경우 말이야. 내가 지금 그런 상황이거든. 하하.”
네더만이 호탕한 척 웃으며 공감을 유도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솔루니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급한 일을 걱정할 필요 없다. 그것은 살아 있는 자의 몫이니.”
“설마 내가 죽기라도 했단 말인가?”
제 몸을 만지작거리는 네더만을 두고 호르킨이 입을 열었다.
“실력이 상당합니다.”
“심심했는데 내가 한번 겨뤄 볼까?”
파르페가 묵색의 창을 쥐고 나오자 네더만이 그를 보며 반색했다.
“한 명씩 겨루자는 건가? 자네들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공명정대하구만.”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의 네더만.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그의 머릿속은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다.
등줄기로 식은땀까지 흘러내린다.
자칫하면 이곳이 무덤이 될 판이었다.
네더만은 은근슬쩍 주변의 지형을 살폈다.
어떻게든 도망치는 게 당장에 최선.
광장 주변으로 거뭇한 것들이 등장한 건 그때였다.
외곽을 경계하던 까마귀들이 광장 주변을 넓게 포위하며 내려섰다.
‘미쳐 버리겠군.’
엎친 데 덮친 격.
입 안이 바싹 말라온다.
“이자가 흰사자입니까?”
에르카는 광장 바닥에 누운 부하의 시체를 보며 싸늘히 표정을 굳혔다.
“아아, 오해하지 말라고. 그 녀석은 저놈이 그런 거니까.”
네더만은 재빨리 호르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같은 편을 죽인 거였다니, 이렇게 경우 없는 놈은 처음이군. 내가 안 그래도 그 때문에 막 교육을 하려던 참이었네.”
에르카는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아무래도 이간질도 소용없을 듯하다.
‘이러다 진짜 저승길에 오르겠는걸?’
네더만은 시체를 가리키던 손가락을 멋쩍게 접었다. 그러고는 다시 초원의 들개를 바라보았다.
“내 고향에 재밌는 놀이가 있는데 함께 해 볼 생각 없나? 공명정대한 자네들이 좋아할 놀이일 걸세. 일대일로 대결해서―”
“혓바닥이 길구나. 네놈은 오늘 무슨 수를 써도 죽게 될 거다.”
이솔루니가 씩 웃자, 파르페가 앞으로 나서며 창을 겨눴다.
“어디 한번 실력 좀 볼까?”
“하, 삶의 재미를 모르는 친구들 같으니라고. 요새 재수가 없나. 왜 이리 강단 있는 녀석들만 만나는지. 씁쓸하구만.”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과 달리 네더만은 검을 바로 쥐며 자세를 낮췄다.
적의 공세에 언제든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창을 겨눈 파르페가 천천히 간격을 좁혀 오며 거리를 가늠했다.
일대의 대기가 설원처럼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쾅!
순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서로에게 쇄도했다.
낭창하게 휘며 주변을 휘감는 창격과 공간을 하나의 점으로 꿰뚫는 검격이 사납게 부딪쳤다.
콰과과과과광!
겹치듯 연달아 터지는 폭발음과 함께 노면이 으깨 지며 뒤집힌다.
그들의 충돌이 만들어 낸 충격파가 광풍이 되어 사위를 휩쓸고 있었다.
콰앙!
네더만은 창격을 튕겨 내며 간격을 좁혀 갔다.
초원의 들개의 명성에 걸맞게 상당한 실력을 가진 녀석이었다.
콰드드득!
원을 그리며 휘돈 창이 바닥을 긁으며 쇄도해 왔다. 네더만은 그 묵직한 공격을 다시 한번 튕겨 내며 그 반발을 이용해 검을 뻗었다.
동시에 그의 칼날에서 녹빛의 오러가 타올랐다.
궤도 앞에 놓인 것들을 모두 베며 쏘아지는 첨예한 검세.
콰아아앙!
두 개의 궤적이 다시 한번 강하게 맞부딪치며 대지를 울렸다.
그들의 전투를 보던 체바윈이 이솔루니에게 말을 걸었다.
“범상치 않은 자입니다. 아무래도 부대장이 질 것 같은데요.”
“그러게 말이다.”
이솔루니 또한 반개한 눈으로 그들의 격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대등한 전투를 벌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달랐다.
녀석은 파르페를 압도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들이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면 단숨에 목을 베었을 터.
개인적인 실력으로는 아마 자신보다도 윗줄에 있을 듯했다.
아직 전력을 보여 주지 않았음에도, 그는 그만큼이나 강했다.
……흰사자 말고도 이런 실력자가 이 변방에 있을 줄이야.
체바윈이 말을 보탰다.
예상되는 자가 있는 까닭이다.
“녹빛의 오러에 저 정도 강함이라면 프렌치아에서 한 명뿐이지요.”
그때 이솔루니 머릿속으로도 한 사내가 스쳐 갔다. 그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사자를 잡으려 깐 덫에 엉뚱한 대어가 걸린 까닭이다.
“서부의 검, 용 사냥꾼.”
만약 저자가 정녕 용 사냥꾼이라면, 지금 이 상황이 말이 된다.
그는 독립군 중에서도 최강이라 꼽히는 강자.
그자가 자신의 품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올 줄이야. 뜻밖의 행운이었다.
“파르페 물러서라.”
“좀만 더 해 보겠수!”
“그놈, 용 사냥꾼이다.”
“쳇. 어쩐지.”
파르페는 녀석을 떨어뜨린 뒤 급히 자리로 돌아왔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음을 순순히 인정한 것이다.
“용 사냥꾼이라니. 나 그런 사람 아닌데. 자네들이 또 오해했나 보구만.”
네더만이 안타깝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필요 없다. 아니어도 죽을 테니.”
“젠장맞을. 좀 세상을 넉넉하게 살아볼 생각은 없나? 다 잡은 물고기도 놓아주는 게 바로 기사의 도리일세.”
“닥쳐라.”
말을 끊은 이솔루니는 옆에 선 동료들에게 말했다.
“저 녀석은 생포한다.”
용 사냥꾼이 프렌치 놈들에게 가지는 무게는 아직 흰사자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가히 독립군을 대표하는 검. 그를 생포하여 공개 처형한다면 독립군의 사기는 수직으로 고꾸라질 터였다.
“적어도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네더만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검을 움켜쥐었다.
“자, 그럼 과연 명성에 걸맞은 실력을 가졌는지 볼까?”
늘어서 있던 ‘초원의 들개’들이 모두 나섰다.
네더만은 온몸을 짓눌러 오는 그들의 기세를 마주하며,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볼을 타고 흐른 땀방울이 턱끝에서 똑, 떨어진다.
……흠.
아무래도 이거 진짜 X된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