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제50화 초원의 들개 (2)
달빛 한 점도 소중한 칠흑의 밤.
나는 듬성듬성 늘어선 커다란 나무둥치 사이에서 잠에 빠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스슥.
미약한 기척에 상체를 일으킨 나는, 캄캄한 어둠 속을 응시했다.
“웬 놈이냐.”
“허, 무슨 자신감으로 불침번을 서지 않나 했더니, 잠들지 않았었나 보군.”
꺼져 가는 모닥불의 옅은 빛 아래,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난기 섞인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자.
구면인 녀석이었다.
이름이 네더만이었던가.
물론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만.”
나는 몸을 일으키는 것으로, 가까이 오려는 녀석의 걸음을 잡았다. 그는 양손을 들어 적의가 없다는 표시를 보여 왔지만, 나는 받아 주지 않았다.
“너에게 허락된 간격은 거기까지다.”
“이거, 생각보다 더 야박한 친구였군.”
걸음을 멈춘 녀석이 서운한 티를 냈다. 첫 만남도 그랬지만, 능글맞은 게 구렁이 같은 자다.
저 여유가 본래의 성격인지 본인의 강함에 대한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무, 무슨 일이에요?”
잠에서 깨어난 이리엘이 나와 녀석을 번갈아 보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알렌 녀석도 일어나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는 알렌을 보며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달덩이가 왜 땅바닥을 구르고 있나 했더니, 자네 그새 인물이 훤해졌구만.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지 뭔가. 하하.”
알렌이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나를 압니까?”
“허, 그때 산적들과 함께 한 번 보지 않았나. 저 청년은 기억하고 있는 것 같네만.”
“아―.”
그제야 알렌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잘랐다.
“잡담은 됐고, 지나가던 길이면 지나가라.”
“지나가던 길이었기는 한데, 잠깐 쉬었다 가고 싶어졌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나이가 들었더니 관절이 다 쑤셔서 말일세.”
혓바닥이 뱀처럼 매끄럽다. 능청맞게 구는 게 하루 이틀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저런 자는 진짜 속내를 알기 어려운 법이니까.
나는 한결같음을 고수했다.
“그래도 지나가라.”
“……이거 참, 심지가 강철같이 단호하군. 그럼 가까이 가지 않고 여기서 쉬겠네. 아까 여기까지는 허락했다고 하지 않았나.”
네더만이 풀썩 자리에 앉았다. 나는 검파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음대로. 대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거야.”
“죽인다는 말을 원래 그렇게 친절하게 하는 편인가? 간담이 다 서늘하구만.”
그는 너털웃음과 함께 몸을 일으켜 엉덩이를 털었다.
“내가 여기 있는 게 싫다면 한 가지만 묻고 떠나도록 하겠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의 동의라고 생각했는지 말을 이었다.
“내가 최근 이츠리엘을 죽인 흰사자를 찾고 있는데 말이야. 나는 그게 자네가 아닐까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근거는.”
“그가 이츠리엘을 죽이고 구출한 이가 크레이산의 삼 형제라더군. 그들이라면 의적 아닌가. 그런데 우연히도 자네는 당시 산적들을 돕고 있었지. 그리고 내가 근래 본 이들 중 자네가 가장 강한 것 같거든. 이렇게 기세가 안 읽히는 사람은 또 오랜만이라서. 어때? 이 정도면 나름 합리적인 추론 아닌가? 뭐,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게. 포상금 같은 걸 노리는 게 아니니. 말했다시피 나도 프렌치아의 독립을 원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 이츠리엘 휘하의 폴체로 상단에 있었습니까?”
알렌이 나서서 빈정거렸다. 자신의 머리를 비웃은 게 아직 마음에 남아 있나 보다. 네더만은 여유로운 태도로 답을 해 갔다.
“내가 좋아하는 격언이 있지. 목적을 이루는 데 수단과 방법을 따로 두지 말라는 말인데. 다 이츠리엘에게 접근하기 위한 작전이었네. 자네들의 방해가 없었다면 나는 무사히 그들의 진지 내로 진입해서 목적을 이뤘을 테지.”
더 이상의 대화가 불필요하다 여긴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잘못 짚었다. 나는 흰사자가 아니다.”
“그런가? 이거 아쉽게 됐군. 나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정체를 밝히기가 민감한 모양이야?”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면서 자연스레 앉으려는 녀석.
나는 그런 놈을 빤히 바라보았다.
“…….”
앉다 말고 내 눈빛을 본 녀석은 너털웃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알겠네, 알겠어. 조금의 빈틈을 안 주는군.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본의 아니게 밤잠을 방해해서 미안하네. 기회 되면 또 보자고.”
녀석은 그제야 손을 흔들며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가 사라지자 이리엘이 내게 시선을 주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왜 이렇게까지 했냐는 말이었다.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다른 파벌의 독립군인 거 같기도 하고, 우호적인 태도였으니까. 아무런 대화 없이 문전박대할 만한 상황은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정보는 저자의 입을 통해 알게 된 것. 신원이 확실한 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섯 보.”
“네?”
“녀석이 다섯 보 내에 있을 때 너희 둘 중 하나는 내 앞에서 죽일 수 있는 자다. 신원도 확실치 않은데 굳이 곁에 둘 필요 없지.”
“아―.”
이리엘이 짧게 탄성을 뱉자, 알렌은 나를 향해 므흣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네스 님, 생각보다 저희를 끔찍이 생각해 주시―.”
빡!
“끄악!”
나는 반들거리는 머리통에 꿀밤을 먹이는 것으로 녀석의 말을 막았다.
“끄응…….”
“괜한 소리 말고 잠이나 자.”
* * *
마을, 아르텐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수다를 떨던 아낙들과 마을 이곳저곳을 뛰놀던 아이들은 자취를 감췄고, 휑한 거리에는 먼지만 날릴 뿐이었다.
이는 모두 갑자기 나타나 마을을 점거한 기사들 때문이었다.
“벽보 잘 붙인 거 맞아? 왜 깜깜무소식이야.”
파르페가 이른 아침부터 성질을 부렸다. 에르카는 혀끝에서 간당거리는 욕지기를 억지로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근방의 도시에 모두 붙였으니, 곧 소식이 올 겁니다.”
그 옆에 있던 이솔루니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번에 안 오면 어떠냐. 프렌치아에 널린 게 마을인데. 우리는 가만히 즐기고 있으면 된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잔혹한 웃음.
이들에게 마을 주민들은 미끼 혹은 놀잇감일 뿐,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에르카는 그 구역질 나는 행태를 힘겹게 참고 있었다.
작금의 프렌치아에서는 이들을 처벌할 방법이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총독 할렌트의 충견인 이들에게, 마을 하나 날려 버리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유야 어떻게든 만들면 그만이니.
아르텐이 가깝다는 이유로 흰사자와 연관된 마을이 된 것처럼.
“밖이 왜 이리 소란스러워?”
이솔루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에르카는 그가 나서기 전에 재빠르게 바깥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다.
마침 그의 귀에도 소란이 잡힌 까닭.
문을 열자, 마당에서 한 노인이 단원들에게 입이 막힌 채 우악스럽게 끌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 집의 주인이자 마을의 촌장.
아무래도 불만 사항을 이야기하려 한 듯하다.
못 본 척 문을 닫으려는 찰나, 뒤편에서 흥미롭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둬 봐라.”
이솔루니의 말에, 기사는 촌장을 풀어 주었다. 숨을 몰아쉰 노인은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말했다.
“기사님, 제발 제 얘기 좀 들어 주십시오!”
이솔루니는 촌장에게 계속 말해 보라는 식으로 턱짓을 했다. 마른침을 삼킨 그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저희 모두 이틀째 집 밖으로도 못 나가고 있습니다. 키우던 작물도 돌봐야 하고, 다들 생계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대체 저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십니까.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저희가 일상을 지낼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바짝 엎드려 간청하는 촌장의 모습에 이솔루니는 에르카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나 보군.”
“……예, 혹여 반발이 있을까 하여.”
에르카는 자신들이 이곳을 점거한 이유와, 일주일 안에 흰사자가 오지 않을 경우 모두 죽을 거라는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았다.
거센 반발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저항하는 자들은 죽여도 된다는 명이 있었지만, 흰사자만 잡으면 끝날 일.
괜히 무고한 이들까지 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솔루니는 그런 그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네놈이 그리 물러 터졌으니까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거다. 소대장이란 놈이 아직도 이런 놈들을 다룰 줄 모르는 것이냐.”
핀잔을 준 그는 엎드려 있는 촌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오늘 너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지.”
“가, 감사합니다.”
놀란 촌장은 여러 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이솔루니는 그런 그를 보며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본래는 사지를 찢어 죽일까 하였으나, 다 늙어 빠진 놈을 그냥 죽이기는 아쉬워 내 특별히 살려 주는 것이다.”
“……예?”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감에 촌장의 낯빛이 굳었다.
“아무래도 네놈이 집에만 있으니 답답한 모양인데, 내 친히 바깥 공기를 마음껏 쐬게 해 주마.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네놈에게 주는 배려다.”
이솔루니는 촌장 옆에 있던 기사들에게 말했다.
“이자를 광장에 거꾸로 매달아라. 그리고 지금부터 물 한 모금 주지 말아야 할 것이야.”
조금의 연민도 감정도 담기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이솔루니는 잔혹한 형벌을 말했다.
“만약 그것을 어기고 물을 주는 자가 있다면, 그자의 목을 베어 그 옆에 매달 것이다. 이 노인네가 과연 그 핏물을 받아 마실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 * *
시원한 바람이 몸을 훑었다. 마음도 실로 상쾌했다.
개운하게 목욕을 마친 나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고급 침대는 아니지만, 노숙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간만에 도시에 온 우리는 숙소를 잡고 평온한 휴식을 즐기는 와중이었다.
이만큼 좋은 숙소는 본부를 나서고 처음이었다.
복도에서 경박한 걸음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소리의 질감과 걸음의 보폭으로 가늠했을 때, 알렌의 발소리가 분명하거늘 걸음이 굉장히 다급했다.
벌컥!
“제네―.”
빡!
“끄악!”
나는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녀석에게 꿀밤부터 날려 주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냐? 문은 노크를 하고 열라고 수없이 말했거늘. 쯔쯧.”
알렌은 벌건 머리통을 문지르며 말했다.
“지금 노크가 문제가 아니라, 큰일 났습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구요!”
심각한 표정의 녀석은 복도로 고개를 빼쭉 내밀어 좌우를 살피더니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내게 한 장의 종이를 건넸다.
딱 보니 벽보를 떼 온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 안에 적힌 글을 가만히 읽었다.
요지는 내가 일주일 내에 오지 않을 경우, 마을 아르텐을 지도에서 지우겠다는 협박이었다.
아르텐 사람들이 나를 도와 암살을 벌이는 데 일조했다는 소설과 함께.
누구도 믿지 않을 이야기였다.
이런 허접한 명분으로 마을 하나를 지우겠다고 공표하다니…….
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간만에 속이 뜨겁다.
“밑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초원의 들개’래요.”
“유명한 녀석들이냐?”
내 물음에 알렌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열변을 토했다.
“당연하죠! 이 녀석들, 특임대라고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르다니까요! 구성원 모두가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인 데다, 그들을 이끄는 이솔루니는 익스퍼트 최상급 경지에 이른 자예요. 들리는 풍문으로는 소드 마스터까지 상대할 수 있다던걸요! 게다가 어찌나 잔혹한 녀석들인지…….”
알렌의 표정은 말을 하면서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설명하다 보니 상황의 심각성이 더욱 와닿는 모양.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달 난 녀석이 참으로 볼만했지만, 나는 말을 끊었다.
“그만.”
가만히 듣고 있다가는 놈들의 신상까지 줄줄이 읊을 기세였다.
이 정도로 상세히 노출된 놈들인 걸 보면 확실히 유명한 놈들이긴 한가 보다.
“……어쨌거나 ‘초원의 들개’는 총독부에서 손꼽히는 전력이라고요.”
“됐고, 아르텐이 어디야?”
날짜를 보니 이미 이틀이 지났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5일.
나는 그 안에 아르텐에 가야 한다.
“여기서 멀지는 않아요. 하루면 갈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생각보다 가까웠다.
“이리엘에게 설명하고 바로 짐 챙겨.”
“아, 네. 알겠습니다.”
반사적으로 답하고 뒤로 돌아 문고리를 잡은 녀석은, 나가다 말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러고는 나를 슬며시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가능하시겠어요?”
오랜만에 보는 불안한 눈빛이었다.
“내가 죽으러 가겠냐.”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나가라 손짓했다. 알렌 녀석은 그것에 안심이 되었는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잠시 믿음이 흔들렸었나 봐요.”
“빨리 나가기나 해, 자식아.”
나는 뭉그적거리는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었다.
펄쩍 뛰며 엉덩이를 부여잡은 녀석은,
“악! 갑니다! 간다고요!”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히 문을 열더니 망아지처럼 뛰쳐나갔다.
나는 그 모습에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하여간 꼭 맞아야 말을 듣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