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후 천하제일인이 되어 귀환했다-48화 (48/228)

제48화

제48화 산채, 황금 들녘 (3)

세자가 살아 있다니.

본부에서 들었던 걸 포함하면 벌써 두 번째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죽은 세자는 여기 있거늘, 세자가 살아 있다니.

“그를 두 눈으로 보았느냐?”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만…….”

역시.

“그 암호문은 세자 저하를 직접 본 이가 건네준 겁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왕세자를 본 자가 있다고?”

“네. 그가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세상에 정신 나간 놈들이 한둘인가.

차라리 드래곤을 봤다고 하는 게 더 믿음직스럽겠다.

나는 말해 봐야 입만 아픈 소리는 집어치우고 본론을 물었다.

“그래서 이 암호문에 적힌 내용은 뭐지?”

“……죄송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저도 모릅니다. 암호문을 해독할 수가 없어서요. 예상하기로 세자 저하께서 계신 곳의 정보가 아닐까 합니다.”

힘겹게 말한 녀석은 다시금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 냈다. 나는 원활한 대화를 위해 녀석의 몸에 내력을 불어넣어 잠시 편하게 해 주었다. 그는 가뿐함에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은 편안할 거다.”

“아,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암호문을 해독할 수 없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지?”

종이에 빼곡히 적어 놓고도 해독할 수 없다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나는 그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해명하라는 의미였다.

“그게, 표기하는 암호의 모양은 같지만 암호의 뜻은 맡은 임무에 따라 각기 다르기에 해석은 본부에서만 가능합니다. 저도 건네받은 암호문을 그저 외워 옮긴 것이라, 해석은…….”

나는 말끝을 흐리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거짓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놈의 말은, ‘검’의 문양을 암호문으로 사용해도 임무에 따라 ‘검’의 뜻이 ‘막사’가 될 수도 있고 ‘침대’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검’의 정확한 의미는 본부에서만 해석이 가능한 거고.

여러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보안은 확실하겠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정보들을 수집하기에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럼 어쩌다 네가 해석도 못 하는 암호문을 갖게 된 거냐?”

“저는 원래 델론트 항구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었는데, 어느 날 낯선 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러고는 이 암호문을 건넸죠. 그자는 그때 이미 죽기 직전의 상태였습니다. 지금의 저보다도 죽음의 문턱에 더 가까웠죠.”

그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델론트 항구라면 프렌치아가 아니라 크레본 제국의 도시.

제국과 프렌치아 사이에는 소해라는 해협이 있는데, 델론트 항구는 프렌치아를 오가는 선박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항구였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그는 제게 살아 계신 세자 저하를 두 눈으로 봤다고 말했고, 이 암호문을 건넨 뒤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러고는 깨어나지 못했죠. 저는 본부로 이 암호문을 전하려 했으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제국군에 쫓겨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주르아든 왕국을 통하는 육로를 이용해 내려오다가 이츠리엘에게 붙잡혔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제가 이 정보를 가진 줄을 몰랐고, 그저 국경을 넘어온 독립군인 줄만 알았죠.”

나는 손에 쥔 암호문을 물끄러미 보았다.

죽은 녀석은 대체 무엇을 보고 세자를 보았다고 한 것일까?

나와 닮은 이라도 찾은 것인가?

단순한 착각은 아닐 거였다. 그 소문이 은은히 퍼지고 있는 걸 보면.

녀석이 정확히 무엇을 보았는지는 아마 이 안에 담겨 있을 테지.

나는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일단 믿겠다.”

이 암호문을 ‘굽이치는 해협’에 건네주겠다는 뜻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리엘이 물었다.

“그들과는 어떻게 접촉하면 될까요?”

“잠깐.”

나는 손을 들어 대화를 막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 이야기는 알렌과 함께 듣는 게 좋겠다. 나는 나갈 테니 너희 둘이 들어라.”

“아, 네.”

나는 암호문을 안주머니에 넣고 막사를 나왔다. 그리고 지나가는 이를 붙잡아 알렌을 막사로 보내라 명했다. 사소한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 거지?

아무래도 총독부에서 어떤 공작을 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보가 은밀히 도는 것 또한 그들의 계략 중 일부일 확률도 있었고.

하지만 아직 객관적인 근거가 부족했다.

내가 죽은 세자라는 것만이 의심의 근거였으니.

그들의 의중이 무엇인지는 이 암호문을 해석하면 알 수 있으려나.

뭐, 마땅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우선은 이것을 ‘굽이치는 해협’에 전해 주는 게 최선일 듯하다.

그러면 뭐라도 나오겠지.

동시에 나는 흐릿한 기억 속의 외숙부, 할렌트 바레인을 떠올렸다.

그를 향한 적대적인 감정과 전생의 기억 사이에 괴리가 인다.

내가 알던 그는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괘념치 않았다.

기제만 마련된다면 사람의 본성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이 대체 어떤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계획, 반드시 실패하게 될 거다.

감히 이 몸을 미끼로 쓴 대가를 혹독히 치르게 해 주지.

* * *

왁자지껄.

해가 지고 시작된 술자리. 산채는 떠들썩했다. 요 며칠 사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처음의 술자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이 줄었을 뿐.

그래서인지 이들은 더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나는 한쪽으로 빠져 홀로 술병을 기울이며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뜨거운 불길처럼 식도를 훑고 내려가는 액체.

과연, 크래커의 말대로 지난번에 마셨던 것보다 향이 깊고 진했다.

나는 그 맛을 음미하며 이곳에서 하루를 더 보내기로 한 결정에 만족했다.

“여기서 혼자 뭐 해요?”

이리엘이 내 옆에 풀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녀 또한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술병으로 향한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이리엘은 병을 치켜들며 말했다.

“산적은 잔을 쓰지 않는 법이죠.”

황당해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공작가의 귀한 여식이었던 이리엘이 산채에서 병나발을 불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사이 산적이 다 됐구나.”

“그럼요! 다들 제가 산 여자인 걸 깔끔하게 인정했다고요.”

이리엘이 자신 있게 소리쳤다.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하나 더 높았다.

……제대로 취했군.

가만 보니 눈도 반쯤 풀려 있다.

잠시 침묵하며 분위기를 잡던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진짜 살아 있을까요?”

앞뒤 맥락 없이 던져지는 뜬금없는 질문.

하지만 나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나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 말했다.

“아니. 그는 죽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이리엘이 볼을 부풀리며 째려보았다. 날 선 눈빛이었지만, 무섭기는커녕 새끼 고양이 같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다.

“그가 죽는 걸 내가 봤으니까.”

“다른 사람을 변장시켰을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어떤 마법을―.”

“아니. 그는 분명 죽었어.”

나는 그녀의 말을 자르며 확언했다. 이리엘은 그런 내게 불만을 토해 냈다. 내 말을 부정하는 것이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어떻게 확신하는데요! 살아 있다는 소문도 있고, 심지어 직접 본 사람도 있다잖아요!”

나는 답하기보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리엘의 눈빛은 슬펐다. 그녀가 듣고 싶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 답을 왜 내게서 들으려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그녀가 원하는 답을 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답하지 않고 물었다.

“그가 살아 있길 바라나?”

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물었다.

“왜?”

“왜라뇨.”

“어차피 그가 살아 있다 한들 지금 상황을 타개하지는 못할 거다. 오히려 분란을 일으킬 소지가 될 수도 있지. 차라리 없는 게 나아.”

현재 왕세자의 생존은, 상징성 외에는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지.

오히려 혼란만 부추길 거다. 할렌트가 노리는 바도 그런 것이겠고.

그러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현재 프렌치아의 독립을 위해 필요한 건 허울 좋은 상징성이 아니라, 제국을 떨쳐 낼 실질적인 힘이니까.

물론, 그가 살아 있을 리야 없겠지만.

내 말에 이리엘이 시퍼런 도끼눈을 떴다.

“제가 그런 이유로 살아 있길 바라겠어요! 세자 저하는 제 약혼자이기도 했고 제가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에요.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살아 있길 바라는 게 아니라고요.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머리가 뎅― 하고 울렸다.

내가 잘못 들었나?

세자를 좋아했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네가 뭘 착각하는 거 아니냐. 내게는 네가 세자를 못살게 굴던 기억밖에 없는데. 오히려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내가 기억하는 전생의 이리엘은 오히려 지금보다 까탈스럽고 신경질적이었다.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지.

나중에 어느 정도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그때도 상냥하지는 않았다. 조금만 수가 틀려도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냈었으니까.

난 그때나 지금이나 이리엘이 날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가 뭘 못살게 굴었다고 그래요!”

이리엘은 찔리는 게 있는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뭘 못살게 굴었냐고?

나는 그녀가 잊고 있는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켜 줄 필요성을 느꼈다.

“볼 때마다 죽일 듯 노려보며 지나가는 건 기본에, 기분 나쁘다고 난데없이 책을 집어 던지질 않나. 같이 밥 먹기 싫다고 식탁을 박차고 나간 것만 몇 번이야? 또 자기 집에 오지 말라고 울고불고 떼쓰고, 말만 걸면 신경질을 그렇게 부렸었지. 더 자세히 말해 줄까?”

“……그, 그걸 다 어떻게 알아요?”

이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젠장.

나도 모르게 전생의 감정에 이입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둘러댔다.

“웨일런궁에서 일했던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아―.”

잠시 뜸을 들이던 이리엘은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그게 원래 그맘때 여자애들은 좋아하는 이성한테 일부러 심술궂게 하는 그런 경향이 있어요. 소녀의 마음이 다 그런 거라고요. 뭐, 그중에서도 제가 유별났던 건 인정합니다.”

그녀는 술병에 입을 가져가며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나는 그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이미 취해서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보였기에.

이리엘은 입가에 묻은 술을 산적처럼 거칠게 훔치더니 내게 말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말아요. 그맘때 여자애들은 그렇게 굴어도, 이맘때 여자애들은 좋아한다고 심술궂게 감정을 표현하진 않으니까. 무슨 뜻인지 알죠?”

답할 가치도 느껴지지 않는 물음이었다.

이게 뭐라는 거야.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관심 없다.”

“칫. 근데 왜 하필 이름이 제네스예요?”

이리엘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 아주 날을 잡았구나.

내가 답을 하지 않자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이름만 아니었다면 제가 이렇게까지 그쪽을 싫어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내 이름이 제네스인 게 무슨 상관이냐.”

내가 귀찮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표현했음에도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 취하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콧바람을 뿜으며 갔을 터였다.

하지만 콧바람은 여전했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괘씸하잖아요. 웨일런궁에 있었다면서! 우리의 신분도 알고! 오빠랑 내가 세자 저하와 어떤 관계인 줄 다 알고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왜 하필 그 이름이냐고요! 가명인 거 다 알거든요!”

“가명 아닌데.”

“거짓말하지 말아요!”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나?”

나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벙찐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취기가 올라왔는지 이제 눈이 완전히 풀려 있다.

“거짓말을 한 적은 없죠……. 그럼 개명해요!”

“싫다.”

“이익.”

“취한 것 같으니 가서 자라.”

나는 그녀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이리엘은 그런 내 손을 덥석 붙잡더니 물려고 이를 드러냈다. 나는 그녀의 이마를 밀어 그것을 막고는 저편에서 열심히 떠들고 있는 알렌을 불렀다.

“알렌! 이 녀석 좀 치워라.”

취해서 내게 이를 드러내고 있는 이리엘을 본 알렌은 화들짝 놀라더니, 벼락같이 튀어와 이리엘을 떼어 냈다.

“얘가 왜 이렇게 취했어?”

“저 하나도 안 취했어요!”

이리엘이 흐느적거리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가서 재워라.”

“제네스 님도 참, 애한테 술을 이렇게 많이 먹이면 어떡합니까?”

“내가?”

나는 황당함에 알렌을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 표정을 본 녀석은 이리엘을 부축하더니 황급히 멀어져 갔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머리가 괜히 지끈거렸다.

“아무리 봐도 당찬 아가씨란 말이지. 한번 잘해 보게.”

이리엘이 떠나니 크래커가 옆에 와 앉으며 말을 걸었다.

안 그래도 박해진 인내심이거늘.

나는 그를 사납게 보았다. 크래커는 억울하다는 듯 내게 항변했다.

“왜? 이쁘잖아. 그것도 엄청.”

“그런 말 할 거면 가라.”

나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거, 야박하고만. 사실 그런 말 하려고 온 거는 아니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왔네.”

“그런 말 할 거라도 가라.”

나는 다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는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말을 이었다.

이 자식들이 아주 단체로 날을 잡았나 보다.

“포르틴 녀석 말이야, 자네는 모르겠지만 참 좋은 놈이었네. 형들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놈이었지.”

“바보 같다니. 제 형을 똑 닮았었군.”

“푸하하. 그렇지.”

크래커가 슬프게 웃었다. 오늘따라 왜 슬픈 것들만 내 옆에 따라붙는지 모를 일이다.

“녀석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건 나도 알아. 절대 용서할 수 없지. 하지만 마음 편히 욕할 수는 없더군. 나와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이리 죽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그래서 그게 네 탓이라는 거냐?”

나는 듣기 싫은 녀석의 이야기를 바보처럼 앉아 맞장구쳤다.

그냥 모른 척 가도 됐을 것인데.

아마 나도 취했나 보다.

나는 취한 김에 말을 덧붙였다.

“너희들 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만, 녀석의 삶은 모두 녀석이 한 선택의 결과다. 그 자식은 언제나 스스로 결정해 왔고, 마지막에도 결국 스스로 결정했지. 상황이 그를 그 선택으로 몰아갔더라도 결국 결정한 건 그 자신의 몫. 삶은 그 선택에 관한 결과일 뿐이다. 그러니 그것의 책임 또한 온전히 본인의 짐이지.”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네가 그의 인생을 이끌었다고 생각하는 건 지극히 오만한 착각이다. 누구도 남을 위해 자신의 삶을 선택하지 않아. 남을 위해, 남을 따라서 하는 선택 또한 본인이 내린 결정이니까. 그러니 필요 이상의 과한 책임을 지며 큰 사람인 척 굴 거 없다. 괜히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어지니까.”

크래커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이미 때린 거 아니지? 두개골이 다 욱신거리는군.”

“한번 맞아 볼 테냐?”

그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하하. 내가 실언했네. 아무래도 취한 것 같으이.”

“가서 잠이나 자라.”

나는 술로 목을 축였다. 말을 길게 해서 그런가, 맛이 더 좋았다.

크래커 녀석은 옆에 앉아 술맛 떨어지는 소리를 계속해 댔다.

“자네 말이 다 맞아. 포르틴 녀석, 항상 제멋대로인 놈이었지.”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전에 말이야. 베론이란 꼬마 녀석과 헤어질 때 그 녀석에게 마음껏 울어도 되는 나라를 만들어 준다고 했었지?”

녀석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금 말문을 떼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저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노력한다면 원하는 걸 가질 수도 있고, 또 서로를 배신하지 않고 사랑하는 이를 잃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나라. 그러니까 우리같이 그저 평범한 삶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나라도 만들어 줄 수 있겠나?”

나는 횡설수설하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녀석은 멋쩍은지 괜히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말했다.

“베론은 아홉 살이었다.”

“응?”

“네가 애냐? 넌 네 손으로 직접 만들어라.”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그는 처음 산채를 소개하던 날, 분명 그리 말했었다.

나는 떠들썩하게 연회를 즐기고 있는 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네놈의 왕국이라며.”

그는 내 시선을 따라 그들을 보더니, 눈가가 슬프게 휘어졌다.

“가장 가깝던 의형제가 배신했다. 내 목숨만큼 귀히 여기던 이가. 지금까지 이 황금 들녘을 함께 만들어 온 이가 형제들을 팔았다. 이곳의 작은 주춧돌조차 우리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우리의 추억이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우리의 왕국을…… 함께 만들어 온 그것을. 그 녀석은 배신한 거다. 황금 들녘은 이미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어. 처음부터 함께해 온 이도 배신하는 판국에 내가 무얼 만들 수 있겠나.”

“한심한 놈.”

나는 싸늘히 말했다.

“고개를 들어 저들을 똑바로 봐라. 저게 네가 말하는 실패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웃고 떠들며 연회를 즐기고 있는 산적들을 보았다. 그가 가슴으로 품은 백성들을 보았다.

“너만 슬픈 게 아니야. 너만 무언가를 잃은 게 아니다. 그들 또한 많은 것을 잃었다.”

포르틴은 그만의 형제가 아니었다. 이번 전투로 죽은 것은 포르틴만이 아니었다.

“너만 이곳을 소중히 여기는 게 아니라고.”

산채, 황금 들녘은 크래커만의 것이 아니었다. 저들에게도 황금 들녘은 소중한 보금자리였고, 자신들을 지켜 주는 소중한 울타리이자 작은 왕국이었다.

그들 또한 그것을 잃었다.

자신들의 가족을 잃었고, 함께 쌓아 올린 산채를 잃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연회를 즐기고 있다.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아픔을 잊기 위해.

다시 살아가기 위해 슬픔을 승리의 기쁨으로 덮고 있는 거다.

그들에게는 이 아픔을 이겨 낼 힘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너의 왕국은 여전하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저들이 왜 저런 힘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냐.”

나는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크래커를 바라보았다.

“네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가장 앞에서 이끌고 있는 자.

자신을 산 남자라 칭하고, 호탕한 척 웃는 바보 같은 놈이지만, 저들은 모두 녀석의 등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러니 애처럼 징징거리지 말고 똑바로 서. 더 잘할 것도 없다. 지금처럼 저들을 이끌어라. 따르는 자는 따르고 아닌 자는 떠날 테지. 저들을 봤을 때, 넌 잘해 나가고 있다.”

녀석을 달래 주기 위해 한 말도 아니고, 그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도 아니었다.

그저 저들을 보며 느껴지는 진실 그대로의 감상일 뿐.

크래커가 지금껏 산채를 잘 꾸려 왔기에, 저들에게 확실한 믿음을 주었기에.

저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거다.

“크하하하하!”

별안간 크래커가 호탕하게 웃었다. 세상이 떠나갈 듯 커다란 웃음이었다.

이제야 완전히 산 남자 타령을 하던 녀석으로 돌아온 듯했다.

저 모습이 꼴 보기 싫었는데, 주눅 든 것보다야 낫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을 그친 녀석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내가 자네보다 무위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성숙지 못했군! 지금까지 헛산 듯싶어.”

웃기는 녀석.

전생의 나이까지 합하면 내 나이가 61살이다.

누구 앞에서 정신적 성숙을 논한단 말인가.

“덕분에 정신이 또렷해진 기분이다.”

크래커는 옆에 앉은 제네스를 뜨겁게 바라보았다.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무심한 눈길은 언제나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왜일까?

녀석이 하는 말이 귀가 아닌 가슴에 틀어박힌다.

몸과 마음이 전에 없이 가뿐해지는 걸 느꼈다.

눈앞에 그토록 바라던 황금 들녘은 없었지만, 자신은 이미 황금 들녘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서 웃고 떠드는 녀석들이 자신의 눈에 그리 보였다.

자신이 꿈꾸던 왕국이 눈앞에 이미 있었다.

“우습게도 난 지금, 그토록 바라던 황금 들녘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쯧, 정신이 나갔군.”

제네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술을 들이켰다. 크래커는 그런 그를 보며 다시 한번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산채가 떠나갈 정도로 커다랗게.

한편, 그 시각.

까마귀 기사단 2소대장 에르카는 특임대 ‘초원의 들개’가 근처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산을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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