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제47화 산채, 황금 들녘 (2)
“예? 정말요?!”
알렌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옆에 있던 이리엘 또한 지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저는요! 저는 뭐 없어요?”
눈에서 빛을 쏟아 내는 걸 보니, 콩고물이 떨어지진 않을까 잔뜩 기대하는 눈치다.
나는 그녀에게 눈을 흘겼다.
“너는 왜?”
“저도 알려 주세요! 기! 예!”
그녀의 눈동자는 배움의 열의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 가차 없이 찬물을 뿌렸다.
“너 활 쏘는 거 보니 괜찮더라. 활쏘기 계속 연습해.”
“뭐예요! 왜 저한테만 그래요. 그러지 말고 저도 뭐라도 하나 알려 주세요.”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문을 떼었다.
“너에게는 가르쳐 줄 만한 게 없으니 괜한 욕심 부리지 말고 저들이나 따라가. 강해지고 싶거든 말한 것처럼 활을 쏴라. 검보다는 그쪽이 낫더라.”
“그럼 왜 알렌 형님만 알려 주는 건데요?”
“사람은 그 기질이 모두 다른 법이니까. 누군가에게는 쓸데없을 잡기도 누군가에게는 성명절기가 될 수 있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도 그런 거 하나 배워 두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하여간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이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알짱거리는 이리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어냈다.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휘청거리며 밀려나 이마를 부여잡은 이리엘은 내게 눈을 부라렸다.
“쳇, 더럽게 비싸게 구네. 치사해서 안 배운다, 안 배워. 흥!”
몸을 홱 돌린 이리엘이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걸음 하나하나에 불만이 가득 담겨 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나한테 기예라도 맡겨 놨나.
나는 그녀의 조막만 한 뒤통수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성질머리하고는. 쯧쯧.”
“제네스 님, 그럼 저는 앞으로 뭘 배우게 되는 겁니까?”
옆을 돌아보니 알렌이 간신배처럼 굽실거리고 있었다.
벌써 잔뜩 들떠 있구만.
나는 녀석의 눈가에 든 야망을 단번에 읽어 냈다.
“기대할 거 없다. 말했듯 쓸모없는 잡기인데, 네게 도움이 될 듯하여 가르쳐 주려는 것이니까. 왠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넵!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뭐든 가르쳐만 주십시오!”
알렌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답했다.
잔뜩 기대한 눈치다.
내 말은 귓등으로 듣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는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녀석이 원하는 답을 던져 주었다.
“네놈이 배울 건 허세신공(虛勢神功)이란 거다.”
“……허세신공? 그게 뭔데요?”
녀석이 어벙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공명을 중원의 말로 했기에 녀석은 정확한 뜻을 풀이할 수 없을 터.
나는 일부러 발렌시아 대륙의 언어로 말해 주지 않았다.
그게 더 있어 보이니까.
“이름이 뭔가 멋있는데요?”
알렌은 예상대로 굉장히 흡족해했다.
이왕 배우는 거 멋있어 보이면 동기 부여도 되고 좋지 않겠는가.
나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허세신공은 경지가 깊어지면 자연스레 생겨나는 기세를 인위적으로 가공해 내는 기공이다. 약한 놈들이 싸우기 전에 제 몸집을 부풀리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지. 효과가 극적이지는 않지만, 네가 배짱은 있는 것 같으니 이번과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 곁들여 사용하면 효과가 있을 게다.”
허세신공만으로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위압감을 주기는 어렵다.
하지만 녀석의 배짱과 행위가 곁들어진다면 이번과 같은 상황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터.
과거, 도박장에서 판돈 대신 받았던 무공인데 알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기억이 났다.
구결이 완벽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허접한 기공을 완성도 있게 만드는 건 내게 일도 아니다. 대충 원리를 이해하면 내 식대로 풀어낼 수 있으니까.
“그럼 한번 시범을 보여 주마.”
내 멋대로 재조합한 허세신공을 연공하자, 주위의 공기가 일제히 날을 세우며 사나운 기파를 뿜어냈다.
살기보다는 흉포함이 적지만, 공간을 장악하는 것에는 오히려 더 효과적일 듯했다.
과연, 허세신공이란 이름대로 제대로 사용하면 뭔가 있는 것처럼은 보일 수 있겠다.
대충 장단을 파악하고 나니 알렌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핀잔했다.
“쯔쯧. 허약하기는.”
“지,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요.”
숨을 고른 녀석이 이내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제가 이제 이 기술을 배우는 건가요?”
“그래. 내가 보여 준 수준에 이르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배워 볼 테냐?”
“예!”
알렌이 힘차게 대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효과를 직접 맛봐서 그런지 열정이 더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실실 웃는 게 갖고 싶던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애 같다.
솔직히 이렇게나 좋아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괜히 배알이 꼬이긴 하지만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다.
나는 내가 한 말을 뒤집지 않는다.
가르쳐 주기로 했으니 가르쳐 줘야지.
대신 계획보다 혹독하게 가르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 * *
이틀이 지났다.
우리는 여전히 산채를 지키고 있었고, 예상대로 제국군은 오지 않았다. 덕분에 알렌은 작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아직 하룻강아지가 짖는 정도의 기세를 뿜어낼 뿐이지만, 기본적인 연공이 가능하니 앞으로 반복적으로 수련만 하면 될 일이었다.
“어제도 별일 없었나 보네요?”
이리엘이 슬렁슬렁 다가와 물었다.
그녀는 끼니때마다 우리에게 식사를 챙겨 주고 있었다.
“실력 많이 늘었어요?”
그녀가 눈 밑이 검은 알렌에게 물었다. 요 이틀 거의 잠도 재우지 않고 괴롭, 아니 가르쳐 주었더니 몰골이 저리 되었다.
“물론.”
알렌은 이리엘을 바라보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 한번 보여 주세요.”
이리엘이 기대 어린 눈빛으로 두 손을 모았다. 알렌은 눈에 힘을 주며 이리엘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미풍이 살짝 일렁였다.
“뭐, 뭔가 된 거 같기도 하고요……?”
당황한 이리엘이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기세를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다는 거죠?”
“맞아! 어때? 조금은 느껴졌어?”
“……네, 조금은요.”
이리엘의 표정이 어색했다.
딱 보니 거짓말은 못 하는 성격이다. 그래도 표정이 홀가분해 보였다. 알렌의 성과를 보니 기예에 대한 환상이 지워졌나 보다.
“그럼 가실까요?”
이리엘이 앞장서며 말했다.
산적들이 움직인 흔적이 지워졌으니, 이제 이곳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그녀를 뒤따라 걸었다.
새로운 산채는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산등성이 두 개를 건너니 도착할 수 있었다.
“전과 비슷하네요.”
알렌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형이 비슷하기는 했다. 절벽의 틈새 사이로 깊숙이 들어간 곳에 산채가 있었다.
사람들은 간이 천막을 펴고 지내고 있었다.
전처럼 건물을 지으려면 꽤 시간이 걸릴 터.
내가 말했다.
“크래커는 어디 있지?”
“저쪽이요. 그리고 바르텐이 깨어났어요.”
이리엘이 저편의 막사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래커에게 다녀오마.”
“다녀와서 만나셔야 할 사람이 있어요.”
만나야 할 사람?
나는 눈짓으로 물었다.
“제네스 님을 뵙고 싶다는 사람이 있거든요.”
“누구?”
“감옥에 있던 분인데요, 제네스 님을 꼭 봐야겠다고 전부터 그랬어요. 우선 이야기하고 나오세요. 저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가 보면 알게 되겠지.
대충 예상이 되기도 하고.
“왔는가!”
막사로 들어가자 크래커가 벌떡 일어나며 나를 반겼다. 침상에 누워 있던 바르텐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앉았다.
수척하기는 하지만 많이 나은 듯 보였다. 그는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야기는 모두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픈 사람의 인사를 굳이 받고 싶지 않았던 나는 대충 손사래를 쳤다.
“됐다. 터는 좋아 보이는군.”
“그래? 괜찮지? 이제 다시 시작해야지. 그래도 한 번 해 봤으니 금방 해낼 거야.”
크래커가 호탕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이틀 새 많이 밝아져 있었다.
녀석도 그렇지만 다들 적응이 빨랐다.
아픔을 딛고 금세 일어나는 분위기.
거주지를 잃는 아픔이 처음도 아닐 테니 금방 이겨 내는 듯하다.
이미 산채에서 거주한다는 것 자체가 고향을 떠나왔다는 뜻이니까.
그들이 세상에 동떨어진 이곳에 밀려오기까지 사연이 굴곡져 있을 것은 빤하지 않은가.
우습게도 그때의 아픔들이 이들을 금세 일어서게 만들고 있었다.
아픔을 딛고 나아가는 이들의 생존력이 대견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불행에 익숙해진다는 거.
그거 사실 참 뭣 같은 거거든.
내가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는 필요 없겠군.”
“언제 가려고?”
“곧. 오늘 안에 출발해야지.”
내 말에 녀석이 펄쩍 뛰며 언성을 높였다.
“곧이라니! 이렇게는 절대 못 보내지! 오늘 저녁에 있을 연회는 꼭 참석하고 가라고!”
이 와중에 연회라니, 한심한 녀석.
예상보다 일정이 늘어졌다. 걸음의 속도를 높여야 했다.
나는 당차게 거절했다.
“됐으니, 너희끼리 즐겨라.”
“저번에 먹었던 것보다 훨씬 맛있는 담금주가 있네! 내가 이츠리엘을 암살한 뒤에 따려고 묵혀 두었던 것이지. 자네가 아니면 그 술을 누구와 마시겠나!”
나는 술로 나를 유혹하는 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자식이 지금 나랑 장난하나.
진즉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그럼 내일 가도록 하지.”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이 정도 여유야 충분히 있다.
평소에 더 부지런히 움직이면 되니.
긴 대화는 술자리에서 하기로 하고 막사를 나서자, 마당에는 이리엘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날 발견한 그녀가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털며 다가왔다.
“이야기 끝났어요? 금방 끝났네요.”
“내일 떠나기로 했다.”
“아, 네. 그럼 이쪽으로 가시죠.”
이리엘은 앞장서며 환자의 상태와 주변에 관한 설명을 조잘조잘 떠들었다. 나는 한 귀로 흘리며 걸었다. 위급한 환자들을 위한 막사가 병동처럼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입구의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자, 침상에 누워 있는 이가 보였다.
옷을 입고 있음에도 골격이 드러날 정도로 야윈 남자였다.
얼핏 훑어봐도 그의 몸은 지독한 고문으로 오래된 헝겊처럼 해져 있었다.
손톱과 발톱은 모두 빠져 있었고, 옷으로 덮이지 않은 피부는 불에 그슬린 화상과 뜯기고 베인 흔적으로 뒤덮여 멀쩡한 살갗을 찾기 어려웠다.
살아 있는 게 기적일 지경이었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
그의 생명은 서서히 꺼져 가고 있었다.
“나를 찾았다고.”
그는 이리엘의 도움을 받아 억지로 앉았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그는 폐를 쏟아 낼 듯 격렬하게 기침하더니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군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본론이나 말해라.”
쌀쌀맞은 내 태도에 이리엘이 눈을 흘겼다. 하지만 다 죽어 가고 있는 이와 담소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빨리 쉬게 하는 게 녀석에게도 좋을 터.
“……염치없지만, 간절히 부탁드릴 것이 있어 뵙고 싶다 청하였습니다.”
예상대로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탁이 무엇이든 들어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작금의 프렌치아는 곪다 못해 썩어 버린 상처와 같다.
개개인의 원한과 사연이 나라 전체에 뭉그러져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다 보면 끝도 없다.
나는 할렌트를 벰으로써 그 곪아 터진 상처를 한 번에 도려낼 작정이었다.
베론이나 크래커야 가는 길에 내 목적과 일정이 맞아 도와주게 된 것일 뿐이고.
개인의 은원을 위해 허비할 시간은 없다.
“아까 내가 적은 것을 건네주겠나.”
그의 말에, 이리엘은 상에 올려져 있던 양피지를 내게 주었다.
양피지는 알아볼 수 없는 이상한 기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암호인 듯했다.
“저는 서부 독립군, ‘굽이치는 해협’ 소속의 독립군입니다.”
그는 중간중간 기침을 토해 내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힘겹게 이어 나갔다.
나는 일단 이야기는 들어주었다.
이제 곧 갈 놈인데.
마음이라도 편하게 보내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내 예상과는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이츠리엘은 다행히 제가 얼마나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지 몰랐지요.”
그는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양피지에 적힌 암호문에는 아무래도 어떤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는 듯했다.
“이것을 우리 지부에 전해 줄 수 있겠습니까?”
“가는 길이라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간단한 부탁이었다. 누군가에게 복수해 달라고 징징거렸다면 들어줄 생각이 없었지만, 뭐 편지를 건네는 수고 정도야.
알렌과 이리엘을 시키면 되니 어려울 게 없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무슨 내용이지?”
나는 양피지를 보며 물었다.
“……죄송하지만 워낙 기밀이라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전달하는 이에게도 말하지 못할 정도면, 그만큼 굉장히 중요한 정보란 의미.
독립군에게 그 정도로 중요한 정보라면 프렌치아와 긴밀하게 연관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녀석의 말에 양피지를 툭 던졌다.
“그리 중요하면 네가 갖다 줘라.”
이리엘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 또한 당황했는지 초점이 흔들렸다.
나는 이 안에 담긴 정보가 궁금했다.
그러니 그것을 알아야겠다.
본래 이야기가 은밀할수록 호기심이 동하는 게 사람의 심리가 아니겠는가.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워낙 중요한 정보라 제가 기분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아는 대로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정보길래 이토록 숨기려 한 것일까.
호기심이 동했지만 그의 입에서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나는 단번에 흥미를 잃었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였던 까닭이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는 결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세자 저하께서 살아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