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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후 천하제일인이 되어 귀환했다-46화 (46/228)

제46화

제46화 산채, 황금 들녘 (1)

나는 어둠을 질풍처럼 가로질렀다.

동문 쪽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저 앞, 풀숲에 달빛을 반사하는 빛이 있었다.

숨어 있던 산적이 보내는 신호.

나는 그것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흐익!”

돌풍과 함께 불쑥 모습을 드러낸 나를 보며, 녀석은 귀신이라도 본 듯 숨을 들이켰다.

내가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갔느냐.”

그는 딸꾹질이 나오는 입을 틀어막고 한 방향을 가리켰다.

나는 곧장 그 방향으로 향했다.

숲길에는 녀석이 지나간 흔적이 선명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뒤쫓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발을 구르자, 거센 바람이 전신을 훑고 지나쳤다.

찰나에 삼켜지는 공간.

잠시 후 숲을 두드리는 말발굽 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내 나는 그들의 뒤를 잡았다.

이츠리엘과 그를 따르는 세 명의 기사.

콰앙!

나는 일부러 땅을 강하게 밟으며 인기척을 내었다.

“저 새끼 뭐야!”

뒤를 돌아본 이들이 나를 발견하곤 비명과 함께 눈을 희번덕 떴다.

나는 그런 이들을 보며 이츠리엘과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왕궁이 적의 습격에 불타오르던 그날.

나는 두 명의 호위 기사들과 함께 호레인 숲을 지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녀석을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수면 위로 올라왔다.

동시에 선연해지는 기억.

나는 어느새 그날에 서 있었다.

두두두!

말발굽이 연신 숲을 두드렸다.

셔츠가 몸에 달라붙을 정도로 땀이 흥건했다. 짙은 녹음의 냄새가 사방에 가득했고, 스산하게 울던 풀벌레 소리는 말발굽에 짓밟혀 삼켜졌다.

나는 그저 앞만 보고 나아갔다.

적들이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에, 나는 별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늦은 밤에 왕궁을 벗어난 우리는 숲을 밤새 달렸다.

하지만 결국, 안개가 자욱이 낀 새벽이 되었을 때 뒤를 쫓아온 무리와 마주하게 되었다.

“멈추시오!”

숲속을 울리는 목소리.

뿌연 안개 속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점차 가까워지며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는 거뭇한 인형들.

“하.”

그들을 보는 순간, 절로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적인 줄 알았으나, 왕궁기사단 레오니랜서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 초록색 머리칼에 뾰족한 턱을 가진 자가 있었다.

“충! 왕궁기사단 레오니랜서의 7성 기사 이츠리엘이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7성 기사라면 조장급 기사.

적어도 익스퍼트 중급에 이르렀을 터.

지금 상황에서 매우 귀중한 전력이 돼 줄 터였다.

“이츠리엘 경, 자네가 와 주어 마음이 놓이는군. 그런데 이곳은 어찌 온 것이야. 왕궁은 어떻게 되었지?”

그는 궁금해하는 나를 보며 환히 웃더니 말을 이었다.

“왕궁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이 잘 마무리되었기에 제가 세자 저하를 모시러 온 것이니까요.”

“……그 말은?”

“프렌치아는 끝끝내 왕궁을 지켜 냈습니다.”

“차, 참말인가?”

그의 말에 긴장이 탁, 하고 풀어졌다.

분명 성문이 뚫렸다고 들었거늘, 결국 막아 낸 것인가.

“테이난 후작가에서 적절한 지원이 있었습니다. 그 덕분이죠.”

테이난 후작가는 왕국의 징병을 거부하고 중립을 선택한 자들.

그들이 마음을 돌린 듯했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이제 왕궁으로 돌아가시지요.”

나와 호위 기사들은 그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따랐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방심하는 순간, 금세 낯빛을 바꾸고 호위 기사들의 가슴팍을 차디찬 검으로 꿰뚫었다.

콰직!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호위 기사들.

나는 그 상황에 잠시 사고를 멈추었다.

레오니랜서인 그들이 대체 왜……?

그때 나는 어렸다.

왕궁기사단이 변절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프렌치아 왕가를 위해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서약한 기사들이었으니까.

“크하하하! 순진도 하셔라. 제 말을 그대로 믿었던 겁니까? 제국의 군세를 왕국이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츠리엘은 나를 보며 광인처럼 웃어 댔다.

양심을 팔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자의 광기.

나는 그것을 태어나 처음으로 보았다.

“네 이놈―!”

상황을 이해한 나는 놈에게 벼락같이 호통을 내질렀다.

“네놈이 감히 서약을 어기고 왕가를 배신해! 그러고도 네놈이 기사라 할 수 있단 말이냐!”

“왕가? 기사?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퍼억!

그는 내 호통에 주먹으로 화답했다. 묵직한 것이 볼에 틀어박히며 나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호신용으로 검술을 익혔다지만, 피할 수조차 없었다.

흙바닥에 처박힌 나는 입 안에 퍼지는 비릿한 피와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이 새끼가 제가 아직도 왕세자인 줄 아나.”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나를 내려다보며 녀석이 조소했다.

뱀처럼 교활하고 악마처럼 사악한 미소.

화가 치밀었지만, 동시에 그가 무서웠다.

“넌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곧 뒈질 15살 먹은 꼬맹이일 뿐이라고. 큭큭.”

“네 이놈!”

나는 겁먹은 하룻강아지처럼 짖어 댔다.

그에게 기사로서의 명예와 충심을 들먹이며 꾸짖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힘 앞에 그런 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발길질에 가슴팍이 차였다.

볼품없이 나자빠진 나는, 컥컥거리며 억지로 숨을 토해 냈다.

그 위로 무자비한 폭력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에게 짓밟히며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왕세자로서의 위엄과 명예. 품격과 위상. 권위와 권세. 내가 지켜 오고 배워 왔던 그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끌고 가.”

그는 상황을 지켜보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그들은 내 몸을 우악스럽게 끌었다.

그들은 이제 나의 기사들이 아니었다.

존중의 시선 대신 경멸이 담긴 싸늘한 시선이 내게 날아들었다.

“한심한 새끼. 도망치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가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왕국이 패망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으아악!”

비명 소리에 짧은 회상에서 깨어났다.

뒤쫓는 나를 본 녀석이 귀신을 본 듯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이제 녀석이 코앞이었다.

천령신공 보법편.

제2장 추뢰(追雷).

쿵!

바닥을 강하게 찍는 동시에 속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녀석의 뒤쪽으로 날아오른 나는,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채 바닥에 던졌다.

우당탕탕!

바닥에 내팽개쳐진 녀석이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으으으…….”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몰골로 신음을 흘리는 녀석.

억지로 몸을 일으켜 보려 하지만 몸이 말을 잘 안 듣나 보다.

그는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른 기사들이 말을 돌려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가장 앞선 녀석이 말 위에서 창을 내질렀다.

턱!

나는 그 창대를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버티지 못하고 낙마해 바닥을 구르는 기사.

콰직!

나는 빼앗은 창으로 놈의 목을 찔렀다.

부웅!

그새 다가온 다른 놈이 내게 검을 그어 왔다. 나는 창을 돌려, 내리찍는 칼을 쳐 내는 동시에 그 방향대로 휘돌아 창을 뿌렸다.

회전을 따라온 창촉이 녀석의 목을 쳤다.

치솟은 핏물과 함께 머리통이 뱅그르르 돌았다.

순식간에 기사 둘이 죽었다.

“이 X 같은 새끼가!”

이츠리엘도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달려들었다. 푸른빛의 검기가 어둠을 밀어냈다.

콰과과과광!

사위를 휩쓰는 검기의 폭풍.

바닥에 짐승이 할퀸 자국 같은 기다란 고랑들이 남았다.

나는 자욱하게 핀 흙먼지 사이로 창의 뭉툭한 부분을 내질렀다.

퍼억!

그것은 정확히 이츠리엘의 복부에 꽂혔다.

“크어억!”

배를 부여잡은 녀석이 주저앉았다.

“뒈져!”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기사가 검을 그어 왔다.

구면인 자였다.

별장에서 만났던 금발의 사내.

나는 창을 휘둘러 녀석의 검격을 쳐 냈다.

캉! 카강!

창대와 칼날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녀석의 검을 튕겨 낸 창이 핑그르르 돌더니 가슴팍으로 쏘아진다.

콰직!

일순간에 심장을 꿰뚫린 녀석.

그는 핏대가 선 눈으로 나를 보았다. 긴 창을 뽑자, 피 구름이 일더니 녀석이 바닥에 풀썩 엎어졌다.

이제 남은 건 나와 이츠리엘뿐이었다.

“으아아아!”

죽음을 직감한 녀석이 전력을 다해 달려들었다.

수직으로 내리그어지는 푸른 선.

나는 창대를 들어 그것을 막았다.

콰아아앙!

창대와 칼날이 부딪치며 발생한 충격파에 지반이 으깨졌다.

10년 전에 레오니랜서에 속해 있던 기사.

확실히 날카로운 검세다.

익스퍼트 상급에 올라선 듯했다.

지금의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지만.

카앙!

휘돈 창대에 튕겨 나간 검이 빙글빙글 날아 뒤편의 바닥에 꽂혔다.

녀석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산발한 머리와 넝마가 된 옷이 보기 좋았다.

“이제 포기한 거냐?”

어금니를 악문 녀석은 눈동자만 굴렸다.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듯했다.

“내,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이냐?”

그가 물었다.

정말이지 진부한 물음.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이든 내줄 생각으로 보였다. 역시 목숨보다 귀한 건 없음이야.

“바라는 건 없는데. 하나 궁금한 게 있군.”

“……?”

녀석의 눈가에 의문이 피어오르는 순간, 나는 놈의 심장에 창을 박아 넣었다.

콰직!

그리고 물었다.

“이렇게 도망치면 살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녀석의 입가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보다가 손에 쥐고 있던 창대를 놓았다.

놈은 황망한 눈빛을 간직한 채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 * *

내가 산채로 돌아왔을 땐, 날이 밝은 후였다.

산채는 안개가 자욱한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위치가 발각됐으니, 자리를 옮겨야 하는 건 당연한 수순.

다들 이주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나는 본채로 가, 가장 먼저 크래커를 찾았다.

그는 의식을 잃은 바르텐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아, 왔는가? 정말 수고 많았네.”

나를 본 그가 몸을 벌떡 일으켜 다가왔다.

나는 나를 안으려 하는 크래커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인사는 됐다.”

그는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자네 덕분에 살았어. 정말 고맙네. 어떻게 이 마음을 전해야 할지…….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들어주고 싶네만.”

“됐다.”

“그럴 거 같기는 했지.”

“이주할 곳은 있는 거냐?”

“다행히도. 여기만큼은 아니지만, 만약을 대비해 미리 봐 둔 곳들이 있었어. 포르틴도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는 쓰게 웃었다.

“생각보다 제정신이군.”

포르틴의 배신에 큰 충격을 받았을 텐데도 그는 잘 버티고 있었다.

속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크래커는 누워 있는 바르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부러 죽이지 않은 게야.”

그건 사실이었다.

포르틴은 일부러 급소를 피해 찔렀다. 그래 봤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만.

“멍청한 놈.”

그는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이츠리엘은 죽은 건가?”

“그래.”

나는 담담히 답했다.

“그 X 같은 새끼, 내 손으로 꼭 죽이고 싶었는데.”

크래커는 어금니를 으득 물며 화를 삭였다.

“그놈이 내 앞에서 포르틴을 죽였어.”

나는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당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결국 철저히 이용당했군.

그렇다고 포르틴의 잘못이 희석되지야 않겠지만, 이츠리엘을 너무 곱게 죽인 것 같다는 후회는 들었다.

하지만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잊어라. 어차피 죽은 놈이다.”

“……그래야지. 이츠리엘이 죽었다면 그걸로 족하네. 어차피 내 힘으로는 죽일 수도 없던 놈이니.”

그가 씁쓸히 웃었다.

“다행이군. 인생 다 산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있었다면 목을 베었을 거다.”

“위로가 좀 섬뜩하구만.”

크래커는 괜스레 목을 쓸며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물었다.

“이주는 언제 시작할 예정이지?”

“오후에 바로 출발할 생각이야. 최대한 빨리 가는 게 나을 것 같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츠리엘은 죽었지만, 산채의 위치가 노출된 상황.

제국군이 언제 또 올지 모른다. 여기서 편히 휴식을 취할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말했다.

“이틀이다.”

“응?”

“이틀은 여기 있어 주마.”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받은 은혜도 다 못 갚을 것―.”

“싫다면 그냥 가고.”

“정말, 정말 고맙네.”

녀석은 덩치에 맞지 않게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안으려 했다. 나는 다시 한번 녀석의 가슴팍을 밀쳐 냈다.

“안 꺼져?”

“한번 안아 보면 안 되겠나? 나는 지금 자네에게 뽀뽀라도 퍼붓고 싶은 심경일세. 고맙다 못해 사랑스러워서 미치겠군. 이런 감정은 처음이야.”

“달고 다니는 게 거추장스럽나 보지?”

내 물음에 그는 다급히 가랑이를 움츠렸다.

“그 말이 아니라! 그만큼 고마워 죽겠다는 이야기라고! 내 소중이는 절대 안 되네!”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고,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말했다.

“됐고, 쉬어라.”

“아, 자네도 피곤할 텐데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푹 쉬게.”

나는 배웅하겠답시고 따라나서려는 크래커를 협박해 방에 밀어 넣고 본채를 나섰다.

* * *

꼬질꼬질한 포로 넷이 산채 정문을 등진 채 서 있었다.

시야를 가렸던 두건은 풀어 준 상태.

나는 가늘게 떠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이제 가도 좋다. 동료들을 이끌고 돌아올 테면 그 또한 좋다. 나는 계속 이곳에 있을 테니.”

그들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

내 허락이 떨어지자 녀석들은 뒤도 보지 않고 산을 뛰어 내려갔다.

내가 있음을 말해 줬으니,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아마 오지 못할 거다.

크래커가 내 옆에 서며 물었다.

“식사는 어쩌려고?”

“때 되면 가져오도록.”

“그리하지.”

크래커가 고개를 끄덕이며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나는 녀석의 입에서 나올 말을 사전에 차단했다.

“한 번만 더 고맙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뭐든 자를 거다.”

“고…… 큼큼.”

그는 헛기침으로 반쯤 뱉은 말을 삼킨 뒤, 산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산채를 벗어나는 행렬이 이어졌다. 산적들과 그 가족들은 짐을 짊어지고 산길을 걸었다.

크래커에게 말했듯 나는 이곳에서 이틀간 머물 작정이다.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가면 흔적이 남을 터.

이틀은 그 흔적이 어느 정도 지워질 만큼의 시간이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뭐 하냐?”

알렌이 옆에서 나와 똑같은 자세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제국군이 오면 함께 싸워야죠. 소문을 들어 보니 걔들은 흰사자가 두 명인 줄 알고 있다더라고요. 저도 좀 효과가 있을 겁니다.”

나는 가슴팍을 내민 채 자신감에 차 있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자식이 머리가 어떻게 됐나?

내 시선을 느낀 녀석은 웃음을 크게 터트리며 말했다.

“움화하! 제네스 님은 모르시겠지만 제가 크게 한 건 했거든요! 하하!”

나는 그제야 확신을 갖고, 옆에 있던 이리엘에게 물었다.

“얘 머리는 언제 다친 거냐?”

“알렌 형님 말이 사실이에요. 형님이 없었으면 이렇게 모두를 구하지 못했을 거라구요.”

이리엘의 말에, 녀석은 더욱 콧대를 높였다.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습니까?”

“무슨 일인데?”

“후훗, 그게 말입니다.”

내가 묻자 알렌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주인을 반기는 똥개처럼 잔뜩 신이 난 채였다.

나는 녀석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그를 다시 보았다.

그런 허세를 부리다니.

배짱은 두둑한 녀석이다.

“제가 제네스 님을 기가 막히게 따라 했다니까요.”

“정말 비슷했어요.”

이리엘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누가 누구랑 비슷했다고?

탐탁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를 순순히 칭찬해 주었다. 앞에서 꼬리를 이리 흔들어 대는데 인심 정도는 써야지.

“그래, 잘했다. 어디 가서 엄한 놈에게 죽기 딱 좋겠구나.”

“……칭찬이신 거죠?”

알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넌 여기 남고, 이리엘은 저들을 따라가라.”

“네, 저만요?”

“넌 의술에 능한 편이니 도움이 될 게다. 가서 도와.”

“저도 같이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끼니때마다 올게요.”

알렌이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나와 함께 있겠다는 건 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서두였을 뿐, 그는 진짜 제국군이 올까 겁먹은 듯했다.

나를 따라 하던 배짱은 다 어디로 갔는지.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더니 그 말이 딱 맞구나.”

“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됐고. 너에게는 따로 가르쳐 줄 기예가 있으니 남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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