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후 천하제일인이 되어 귀환했다-41화 (41/228)

제41화

제41화 함정 (3)

낯선 이의 소란스런 등장에 전장은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산적들은 그 잠깐의 적막을 이용해 부상자들을 챙겨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제국군은 그들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쫓을 수 없었다.

무언가가 발목을 움켜잡은 것처럼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포식자의 영역에 들어선 것처럼 서늘하고 묵직한 기운이 온몸을 짓눌러 왔다.

그들은 작은 바람에도 솜털이 오소소 돋아남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압도감이 흰 사자 가면을 쓴 자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그들을 이끌고 있던 초칸이 흰사자에게 검을 겨누며 물었다. 그는 다 잡았다고 생각한 이리엘을 놓쳐 심기가 좋지 않았다.

흰 사자 가면 안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렀다.

“곧 죽을 놈이 그것은 알아 뭐 하려고.”

“이 건방진 새끼가!”

인상을 찌푸린 초칸이 사나운 기세로 들이쳤다.

그의 움직임을 따른 푸른 궤적이 사선으로 떨어져 내린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전력을 다한 일격.

초칸이 그려 낸 궤적 뒤로 서늘한 절삭음이 들려왔다.

서걱!

창졸간에 벌어진 일에, 안 그래도 적막했던 전장에서는 이제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한 전장 위로.

털썩.

머리를 잃은 사내가 무너져 내렸다.

흰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늘어뜨린 칼끝에서 핏방울이 똑, 똑, 떨어졌다.

“…….”

이리엘은 그 광경을 보며 헛숨을 집어삼켰다. 알렌과 협공을 해도 넘을 수 없던 자.

그와의 격차는 성벽처럼 느껴질 정도로 높았다.

그녀는 그 앞에서 죽음을 각오했다.

그런데 제네스는 그런 그를 파리 쫓듯 쉬이 베어 버렸다.

그것도 단칼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등줄기가 서늘함에 오싹해졌다.

처음으로 제네스의 강함이 살갗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이 사람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제네스는 그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칼날에서 푸른 오러(검기)를 피워 냈다.

이렇게 선명하고 휘황한 오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크리스털처럼 영롱하고 선명한 푸른빛.

그것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리고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광!

가볍게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손짓에 사위가 쓸려 나간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와 달리 타오르는 섬광은 사납게 제국군을 난도질했다.

폭발음과 비명과 죽음이 하나로 뒤엉켜 전장 위로 쏟아져 나왔다.

붉은 핏물이 사방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제네스가 그리는 궤적 위에 오른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절단이 나 떨어졌다.

‘…….’

이리엘을 비롯한 이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학살의 현장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명백한 현실이 꿈결보다 더 먼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대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그들은 조금 전까지 자신들에게 죽음을 겨누었던 자들이었다. 그녀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이 성벽의 견고함에 기대어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았다.

그럼에도 성문은 뚫렸고, 자신들은 패배했다.

이제 죽음만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이 단 한 명의 등장으로 손바닥 뒤집히듯 엎어졌다.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제네스는 기백에 이르는 적을 홀로 섬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적들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푸른 폭풍에 휩쓸려 갔다.

‘……이런 게 진짜 힘이구나.’

이리엘은 긴장하고 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생과 사가 중첩되어 있던 전장은 이제 더 이상 그녀 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뒤는 절대적으로 안정했다.

더 이상 적들이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는 옆에서 제네스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알렌을 보았다.

이리엘은 제네스를 향한 알렌의 맹목적인 믿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주야장천 떠들었던 미드크레이 평원에서의 일화.

그는 그때 이미 이와 같은 모습을 보았던 거다.

압도적이다 못해 절대적으로 느껴지는 무력.

직접 눈앞에서 그 강함을 보고 있자니 말이 되지 않는다.

그의 패배가 가늠되지도, 심지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저런 자를 대체 누가 이길 수 있는 건데?’

이리엘의 머릿속으로 발렌시아 대륙에 널리 알려진 격언이 떠올랐다.

『소드 마스터는 하나의 군단과 같다.』

전쟁사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자연스레 알게 되는 말이었다.

여태까지 이리엘은 그것이 과장이라 생각했다.

한 사람의 무력이 병력의 수가 6만에 이르는 군단과 같다니.

물론, 소드 마스터의 힘이 6만에 이르는 군단과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기동력과 보급 문제 등의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전장에 끼치는 영향력이 그 정도라고 해서 나온 말이다.

그럼에도 이리엘은 그것이 한참이나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6만에 이르는 군세와 비교하다니.

그게 말이 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지금, 그 말을 여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제네스가 앞에 서는 순간, 병사들의 머릿수는 의미를 잃었다.

한 명의 소드 마스터에게 사람의 머릿수는 무의미한 숫자였다.

벌레를 밟아 죽이는데 그들의 수가 중요하던가.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제국군은 제네스에게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뒤로, 뒤로 물러서다 이내 등을 돌리고 도망쳤다.

3백에 가깝던 제국군이 단 한 명을 넘지 못해 등을 돌린 것이다.

그 시간은 정말이지 찰나에 불과했다.

적의 전의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제네스는 검을 늘어뜨린 채, 성문 밖으로 도망치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와아아!”

살아남은 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서로 얼싸안으며 함성을 내질렀다. 이리엘은 그 틈바구니에서 제네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온다면 상황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간단히 해결될 줄이야.

자신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이 사람에게는 이리도 쉬운 일이었다.

* * *

짐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땅의 굴곡.

입이 거친 헝겊으로 틀어 막혀 있어 숨쉬기가 불편했다.

팔은 뒤쪽으로 꺾인 채 밧줄로 묶여 있었고, 다리도 마찬가지로 꽁꽁 묶였다.

꼭 몸통이 하나가 된 것 같다.

마법이 깃든 밧줄인지 온 힘을 다해도 끊어지지 않았다.

크래커는 고개를 힘겹게 돌려 내부를 살폈다.

마차는 나무판자로 사방이 막혀 있었다.

쇠창살로 된 작은 창문으로 서광이 비쳐 든다.

밤이 지나간 듯했다.

의식이 끊어지기 전 상황은 기억나지 않았다.

옆에 기절해 있는 동료들을 보니 다들 멀쩡했다.

그중에 제네스는 없었다.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자신이 제국군에 잡혀 그들의 주둔지로 끌려가고 있음은 쉬이 알 수 있었다.

크래커는 옆으로 굴러 마차 벽면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귀를 바짝 붙여 바깥의 상황을 엿들어 보려 했다.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차는 그저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었다.

크래커는 바깥 상황을 알아보는 걸 포기하고 상념에 젖어들었다.

‘……포르틴, 네가 정녕 배신한 것이냐?’

밧줄이 팔목을 억세게 조여 옴에도 아프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온통 다른 쪽에 가 있었다.

크래커는 가만히 포르틴을 생각했다.

돌아오고 나서 조금씩 달라진 행동들.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갔던 말들이 새록새록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아니, 그럴 리 없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적들의 계략일 게 분명하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포르틴은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게야. 녀석이 어떤 놈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크래커는 포르틴을 믿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어느덧 12년이 다 되어 갔다.

제국과 프렌치아의 전쟁 시절부터 바르텐과 포르틴은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죽음마저 함께하기로 약속했고, 함께 살아갈 미래를 꿈꿨다.

산채, 황금 들녘은 그 꿈 위에 세워졌다.

포르틴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

그리고 그 또한 자신을 그리 생각했다.

그래서 의형제를 맺은 것이고.

그런 그가 배신했다는 것은 결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멍청한 놈! 적들에 계략에 넘어가 누구를 의심하는 거냐!’

크래커는 적의 꾐에 빠질 뻔한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다시금 마차 내부를 샅샅이 살폈다.

아무것도 없이 휑한 그곳에는 이 난관을 벗어날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차가 멈춘 것은 그때였다.

이후 문이 벌컥 열리며 태양 빛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크래커는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뭐야? 일어났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이 시려 검은 형체만 간신히 보였다.

햇볕을 등진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무언가가 휘둘러졌다.

묵직한 통증과 함께 시야가 암전됐다.

* * *

승리했다는 기쁨은 잠시였다.

사람들은 금세 슬픔에 젖어 들었다.

70여 명이었던 산적들은 반으로 줄어 있었고, 전쟁에 참여했던 노인과 아직은 어린 소년들도 죽었다. 깊은 상처만이 남은 승리였다.

“고생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알렌과 이리엘에게 다가가 말했다.

진이 쪽 빠진 녀석들은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어찌 됐어요?”

이리엘이 물었다.

주변을 다독이던 이들도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제국군에 잡혀갔다. 나만 나왔지.”

곳곳에서 침음이 흘렀다.

“바르텐은 어디 가고.”

“그게…….”

알렌이 지금까지 있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포르틴의 배신을 설명해 주었다.

분위기는 더욱 침전됐다.

수장인 크래커가 적에게 잡혀갔고 바르텐은 의식을 잃고 있는 데다, 포르틴은 그들을 배신했다.

사실상 산채가 와해되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다.

“그들을 구해야겠다.”

내 말에 이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능하시겠어요?”

“너희들도 도와야지.”

녀석들의 본진쯤이야 혼자서도 뒤집을 수 있지만, 크래커를 포함해 세 명이 잡혀갔다.

혼자서 데리고 나올 수는 없었다.

“너희들도 몇몇 도와야겠다.”

나는 근처에서 휴식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말했다.

“그럼요! 뭐든 하겠습니다! 두목을 구하는데 뭔들 못 하겠습니까.”

한 녀석이 호기롭게 나섰다.

다들 의욕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형제들을 구한다는데 당연히 그리 나와야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시켜만 주십시오!”

열정을 불태우는 그들에게 내가 말했다.

“일단 쉬어라.”

호기롭게 일어섰던 그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텐은 어디 있지?”

이리엘은 끙, 소리와 함께 무릎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저 안쪽에 있어요.”

그녀가 앞장서서 걸었다.

성채 안쪽으로 들어가자 방에 바르텐이 누워 있었다. 복부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나는 녀석의 맥문을 잡고 몸을 훑었다.

생각보다 중상은 아니었다.

나는 내공을 실어 녀석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바르텐의 표정이 곧장 편안해졌다.

“의술도 할 줄 아세요?”

알렌이 놀라워하며 물었다.

“간단한 응급조치다.”

“아아.”

“제가 다시 볼게요. 저 의술을 좀 할 줄 알아요. 아까는 급해서 응급 처치만 했는데 상처를 제대로 소독하고 꿰맬 필요가 있어요.”

이리엘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일단 쉬어라. 지금 네 정신으로 바느질을 했다가는 아주 훌륭한 결과물이 나올 것 같구나. 대충 조치했으니, 한두 시간은 괜찮을 거다.”

“아, 네.”

이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의 피로도는 컸다.

다시 움직이기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했다.

* * *

코를 찌르는 악취에 크래커는 점차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눅눅하고 불쾌한 공기가 그를 깨웠다.

그는 시야가 회복되기 전에 자신의 벌어진 양팔에 족쇄가 채워져 있음을 느꼈다.

발도 마찬가지.

그는 벽에 고정된 쇠사슬에 묶여, 선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힘겹게 눈을 뜬 그는, 아직 초점도 잡히지 않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점차 또렷해지는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핏자국이 굳어 있는 석벽과, 튀어나온 못에 걸려 있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가만 보니 고문 도구였다.

갈고리처럼 생긴 무언가에는 누군가의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촤르륵.

몸을 움직이려 할 때마다 팔에 연결된 쇠사슬이 출렁였다. 쇠사슬은 벽과 연결되어 있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한 사내와 그를 수행하는 이들 몇이 그를 따라 들어왔다.

“마침 일어났군.”

초록색 머리칼에 뾰족한 턱을 가진 사내였다.

그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지만 잘 알고 있는 얼굴이다.

……이츠리엘.

“이렇게 보니 굉장히 반갑군.”

크래커는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동료들을 죽인 원수가 눈앞에 있었다.

이츠리엘은 그런 그를 보며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 자랑하던 형제들을 잃어서 상심이 크겠어. 하지만 모두 죽은 건 아니니까 너무 염려 말라고. 자네가 그리 울상일 것 같아, 내가 친히 이 자리를 준비한 것 아니겠는가.”

이츠리엘의 여유로운 미소에 크래커가 불안한 눈빛을 던졌다. 이내 문이 다시 열리며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

그를 본 크래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 눈을 깜박이지도, 입을 다물지도, 숨을 쉬지도 못했다. 그는 그저 멍하니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던 막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