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제40화 함정 (2)
어둠을 거슬러 오르는 불꽃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
이리엘과 알렌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마주쳤다. 그러곤 서로가 서로의 얼빠진 얼굴을 보며 곧장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급히 주변을 살핀 이리엘은 산적의 시체에서 적의 침입을 알리는 뿔 나팔을 발견했다.
그것을 재빨리 집어 든 그녀는 좁은 관에 입을 대고 폐를 쏟아 낼 것처럼 힘껏 불었다.
부우우우―!
고래의 울음 같은 묵직한 울림이 산채에 울려 퍼졌다.
“적이에요! 제국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알렌은 길가를 뛰어다니며 미친 사람처럼 크게 소리쳐 댔다. 깊은 잠에 빠졌던 산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부우우우―!
이리엘은 산채 쪽으로 계속해서 뿔 나팔을 불며 제국군의 움직임을 살폈다. 횃불들이 갈피를 못 잡고 일렁이고 있었다. 자신들의 존재가 발각된 것에 당황한 듯했다.
그러다 이내 행군의 속도가 빨라졌다.
잔잔히 흐르던 불길이 급류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적을 자극한 듯싶지만, 산적들을 깨우는 것이 우선.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일이냐!”
잠에서 깬 산적 여럿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그들은 쓰러진 동료들을 보고 단숨에 목책에 오르더니, 절벽의 좁은 소로로 진입하고 있는 제국군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것 좀 도와줘요!”
이리엘이 그들을 보며 소리쳤다.
그녀는 누군가 활짝 열어 놓은 성문을 낑낑거리며 닫고 있었다.
산채의 정면을 막고 있는 목책은 성벽만큼은 아니어도, 적들의 걸음을 잠시 잡아 둘 정도는 되었다.
쿵!
산적들과 함께 문을 닫은 이리엘은 날다람쥐처럼 재빨리 목책 위로 올랐다.
제국군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길가로 나온 사람들은 여전히 우왕좌왕하고 있다.
알렌을 비롯한 몇몇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지만, 다들 정신이 없었다.
지휘관급 산적들이 모두 암살 작전에 투입된 까닭.
이러다가는 제대로 방어도 하지 못하고 무너질 판이다.
이리엘은 빠르게 올라오는 제국군과 산채 내부를 번갈아 보더니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잠시 후, 무언가 결단한 그녀가 산적 하나를 잡고 소리쳤다.
“여기서는 안 되겠어요!”
“뭐가?”
“내성으로 가요.”
“여기를 버리자는 말이냐?”
산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돼요! 안으로 들어가서 전력을 정비해야 해요!”
“그, 그래도!”
그녀의 말을 들은 산적들이 서로 눈을 맞췄다.
목책을 버리고 무작정 내성으로 가자니…….
그것이 최선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리엘이 그런 이들을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빨리요! 다 죽고 싶어요? 다들 내성으로 달려요! 무기로 쓸 만한 건 다 챙겨서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알려요! 어서요!”
이리엘이 확신에 차 소리치자, 그들은 어영부영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따랐다.
“내성으로 간다!”
“무기로 쓸 만한 건 다 챙겨!”
“내성에서 대항한다!”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던 이들에게 명확한 명령이 내려지자, 사람들은 일제히 내성을 향해 분주히 움직였다.
이리엘은 자신의 말을 따라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녀 또한 자신의 선택을 확신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녀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목책을 버리는 게 좋은 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책의 강점은 좁은 길을 오르는 제국군을 저지하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
이 상태로는 제대로 대비를 하기도 전에 목책이 뚫려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멸이다.
반면, 내성은 방어하기가 유용하고 성벽이 좁고 튼튼해 그것에 기대어 화력을 집중할 수 있다.
이렇게 어영부영 무너지느니, 제대로 싸워 보기라도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산채에 남아 있던 산적들은 70여 명.
다행인 점은 내성에 활과 화살이 충분하다는 거다.
급히 내성으로 집결한 이들은, 성벽 위에 올라 상황을 보았다.
알렌과 이리엘은 간만에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래도 아까와 달리 정신은 또렷했다.
콰앙!
저 멀리서 입구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책의 입구를 막아 시간을 끌었지만 잠시일 뿐이었다.
목책이 무너지며, 횃불에 은은히 드러난 검은 그림자들이 터진 물살처럼 밀려들었다.
못해도 300명은 넘어 보였다.
다들 딱딱하게 굳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리엘이 알렌에게 물었다.
“……제네스 님 언제 올까요?”
“저쪽에도 무슨 변고가 생겼을지 몰라. 예상보다 더 빨리 오실 수도 있어.”
이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그쪽도 적의 함정에 빠졌을 확률이 높았다. 산채 내에 배신자가 있다면 본채가 무사하지 않으리라는 사실 또한 유추해 낼 수 있을 터.
평소보다 걸음의 속도를 높일 게 분명했다.
이리엘이 말했다.
“일단 오늘 밤만 어떻게 버텨 보죠.”
제네스가 제때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구해주겠지.
하지만 그들과 달리 산적들의 눈빛은 불안하게 떨렸다.
“하, 항복하는 게…….”
개중에는 벌써 마음이 흐트러진 자도 있었다.
“여러분!”
이리엘이 그들을 주목시켰다. 그녀는 산적들을 바라보았다. 애고 노인이고 전투가 가능한 이들은 뭐라도 쥐고 밖으로 나와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오합지졸이 따로 없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 딱 동이 틀 때까지만 버텨 봐요! 그러면 암살 작전을 나간 사람들이 분명 돌아올 거예요.”
“온다고 뭐가 해결되겠나!”
산적 중 하나가 소리쳤다.
알렌이 나서서 그에 답했다.
“함께 간 제네스 님은 홀로 수백 명의 마적 떼를 도륙하신 분입니다.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소드 마스터라고요! 동이 틀 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그럼 살 수 있어요!”
“거기서 동틀 때까지 올 수 있을까? 시간이 부족할 걸세.”
산적들의 회의적인 태도에 이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 마세요. 그 사람이라면 올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 그래야만 하고요.
이리엘은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사실 그녀도 제네스가 언제 올지 모른다.
지금 이 상황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집중력을 가지고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는 확실한 목표가 필요했다.
이들에게도, 자신에게도.
마음을 다잡은 이들의 시선이 전방을 향했다.
제국군이 이제 어둠 속에서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이 틀 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텨 봅시다!”
“한번 해보자고, X발!”
“그때면 두목도 오겠지!”
그래도 명확한 목표가 생기자, 다행히 사기가 오르고 있었다.
* * *
세찬 바람이 돌풍이 되어 흩어졌다.
주변의 풍경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밀려갔다.
나는 어두운 밤을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공간이 한 움큼씩 삼켜진다.
이렇게 달려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조급한 것 또한.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불안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깊은 서랍 속에 넣어 둔 물건처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감정.
이래서 지켜야 할 게 있다는 건 참으로 성가신 일이다.
그 녀석들, 버틸 수 있으려나.
목책으로 이루어진 외성과 절벽의 틈을 이어 쌓아 올린 토성이 있었다.
지형도 유리하기에 적은 인원으로도 농성이 가능하지만 본채에는 배신자가 있다.
만일 잠든 사이 적의 기습을 받았다면 그들의 전력으로는 1시간도 채 버티지 못할 터.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두 녀석이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거라 믿었다.
적의 포로로 잡히든 말든, 살아만 있으면 된다.
그럼 어떻게 해서든 구할 수 있으니까.
그들 또한 그것을 잘 알겠지.
하지만 그리 생각하면서도 불안감이 가시질 않는다.
마음이 이미 산채에 가 있으니,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아직 수양이 부족하다.
나는 간만에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며 전력에 전력을 더했다.
쿵!
묵직한 걸음이 내려지며, 세계가 빠르게 빠르게 뒤로 밀려갔다.
* * *
쿠웅!
제국군은 목책을 이루던 나무를 가져와, 공성추처럼 사용해 성문을 공략하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가 성문을 들이받자, 성문이 들썩이며 먼지를 토해 냈다.
성문을 몸으로 막고 있던 이들은 그때마다 뒤로 튕겨 나갔다가, 다시 밀착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행인 점은 적들이 야습을 준비해 온 터라 공성전에 대한 준비가 미흡하다는 거였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함락됐을지도 몰랐다.
이리엘은 단단한 토성 위에서 적을 막고 있었다.
그녀가 활시위를 놓자, 목이 꿰뚫린 제국군 하나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화살은 그들의 방패와 갑옷을 뚫지 못했다.
전장은 지루한 양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토성까지 닿는 길이 좁아 많은 수의 제국군이 달라붙지 못했기에, 실질적으로 전투는 성문 근처에 집중되어 있었다.
절벽 틈새를 연결하여 만든 성이니 당연했다.
덕분에 적은 인원으로도 방어하기 수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계는 빠르게 다가왔다.
병사들의 수준과 병력 차이가 심했다.
산적들과 정규군이 정면으로 붙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성벽마저 없었으면 찰나도 버티지 못했을 터.
콰아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공성추의 뾰족한 첨단이 성문을 뚫고 틀어박혔다.
그것이 다시 당겨지자 성문의 일부가 뜯겨 나가며 그 사이로 제국군의 군세가 보였다.
“막아야 합니다! 성문이 뚫리면 끝장이에요!”
성문에 바짝 붙어 있던 알렌이 소리쳤다.
성벽 위에서 궁사들의 지원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적들은 방패를 머리 위에 이고, 화살을 손쉽게 방어해 냈다.
쿵! 쿠웅!
그런 와중에도 공성추는 계속해서 성문을 찢어 나갔다.
콰아앙!
다시 한번 커다란 굉음이 내성을 울렸다.
공성추가 마침내 완전히 성문을 꿰뚫은 것이다.
단단한 참나무로 만들어진 성문이 쪼개지듯 열렸다.
“뒤로 물러서요!”
알렌은 그 틈새로 들어오는 병사들 몇을 베었다. 하지만 한 번 터진 둑을 막을 수 없었다.
제국군이 성내로 물밀듯 쏟아지고 있었다.
“우와아―!”
“산적들을 베어라!”
“후퇴하라!”
“모조리 죽여 버려!”
“다들 후퇴해요!”
아군과 적의 소리가 하나로 엉켜들었다.
토성 위에서 적들을 견제하던 이들도 모두 뛰어내려 와 밀려오는 제국군을 틀어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물러서요! 다들 물러서!”
“크악!”
성문을 지키는 이들은 찰나에 적의 칼과 창에 꿰여 목숨을 잃었다.
더 이상 성문을 사수하는 것은 무리였다.
산적들은 삽시간에 밀려나 뒤편의 작은 산채를 두고 뭉쳤다. 전략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밀리고 밀린 그들의 걸음이 갈 곳은 이곳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뒤편의 조그만 산채에는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는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이 있었다.
이곳이 마지막 저지선이었다.
제국군들은 그 앞에 산적들을 몰아 놓고 칼과 창을 겨눈 채 포위했다.
전장이 잠시 멈추었다.
사실상 승패는 이미 결정된 상태였다.
“벌레 같은 새끼들. 드디어 끝을 보는구나.”
적들의 무리가 갈라지며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갈색 머리를 짧게 자른 자였다.
키가 어찌나 큰지,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가 불쑥 솟아올라 있어 그가 다가오는 것이 저 멀리서부터 보였다.
그는 산적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자는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다.”
알렌과 이리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잠시 고민했다. 살아만 있으면 제네스가 자신들을 구해 줄 테니까.
그때 적장의 시선이 이리엘에게 닿았다.
“호, 너는 사내 녀석이냐, 계집이냐?”
그의 눈가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이리엘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개X끼가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그녀는 바닥에 놓으려던 검을 다시 움켜쥐었다.
투항하려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약해진 마음을 다시금 다잡았다.
항복할 경우 저들이 남아 있는 이들을 어떻게 유린할지 한눈에 봐도 빤했다.
“적의 개로 사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자고!”
그것을 깨달은 산적 하나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들 또한 자신들에게 기다리는 결말을 알았다.
“X발! 덤벼 봐, 이 새끼들아!”
흥분한 이들이 무기를 움켜쥐며 욕을 해댔다.
알렌은 이리엘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젠장. 어떻게든 버텨 보자. 여기서 죽을 수는 없잖아.”
이리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반드시 살아요.”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적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멍청한 놈들. 애와 여자들은 남기고 모조리 죽여라!”
적장의 명령에 제국군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성벽 앞에서 동료의 죽음을 본 이들은 이미 전장의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너는 내가 직접 상대해 주마.”
적장이 윗입술을 핥으며 다가왔다. 그 모습에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불쾌감이 엄습했다.
“네 상대는 나야. 덩칫값은 하셔야지.”
알렌이 이리엘의 앞을 막고 섰다.
“같이 해요.”
이리엘은 검을 잡으며 그 옆에 섰다.
사내의 가슴팍에 달린 계급장을 보니 대위다.
적어도 익스퍼트 초급은 넘어섰을 터.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산적치고는 꽤 괜찮은데?”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둘을 보았다. 꽤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반면, 그를 마주한 둘은 표정을 굳혔다. 상대의 기세가 생각보다 거센 까닭.
“한번 실력 좀 볼까?”
여유롭게 웃은 사내가 달려들었다.
쾅! 콰과과광!
찰나에 어지러이 얽혀드는 검격.
은빛 섬광이 사방에서 번쩍거리며 충격음을 토해 냈다.
“……큭.”
적장의 검을 마주한 이리엘이 짧은 신음을 터트리며 물러났다. 고운 아미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손목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상당했다.
알렌과 함께 감당했음에도 그랬다.
……빌어먹을.
벌써 안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검을 몇 번 마주친 것만으로도 승패가 훤히 가늠됐다. 이리엘은 안 좋은 생각을 억지로 누르며 검을 움켜잡았다.
“크크큭.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쁘구나. 이런 산 구석에 너 같은 미인이 있을 줄이야. 횡재가 따로 없다. 내 너를 부인으로 삼을 것이다.”
“X랄하고 자빠졌네. 가운데 덜렁거리는 걸 잘라 사내구실 못 하게 해 줄 테니 딱 기다려.”
이리엘이 검을 세웠다.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패배하더라도 저것만은 꼭 잘라 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검을 휘두르는 꼴을 보니 없는 게 더 잘 어울리겠는데?”
알렌이 옆에서 말을 보태며 킬킬거렸다.
“아직 입은 살아 있구나.”
하지만 사내는 둘의 도발에도 여유로웠다. 그만큼 그들의 격의 차이는 명백했다.
상급 마나 유저와 익스퍼트 초급의 경지는 한 단계 차이였지만, 그 사이에 놓인 벽의 두께는 얇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는 익스퍼트 초급 중에서도 완숙의 경지를 넘어 익스퍼트 중급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자신들과 격차가 컸다.
쾅! 콰광!
강철 검이 부딪치는 묵직한 소음이 울렸다. 그는 상급 마나 유저인 이리엘과 알렌이 합공을 하는데도 여유롭게 받아넘기며 오히려 압박을 가해 오고 있었다.
녀석과 검을 마주친 알렌이 짧은 신음과 함께 물러섰다. 그 뒤를 녀석의 검이 맹렬히 쫓았다.
이리엘은 그 틈을 비집으며 검을 찔러 넣었다.
순간, 상대의 검이 뱀처럼 교묘하게 방향을 틀어 그녀에게로 향했다.
‘함정이다!’
카가가가각!
칼날과 칼날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이리엘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적의 검을 강제로 비껴 냈다. 무리한 움직임으로 얻은 내상에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콰과과과광!
그때 찰나에 분화되며 휘몰아치는 검영.
폭풍처럼 밀려오는 칼날에 알렌과 이리엘은 그대로 튕겨 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녀석의 검에는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제길.’
알렌과 힘을 합쳐 필사적으로 덤볐음에도 녀석을 넘을 수 없었다.
이리엘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검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알렌도 검에 기대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 슬슬 마무리할까?”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였다. 호흡이 거칠어지기는 했지만, 그뿐. 승패는 완전히 갈려 있었다.
낭패였다.
합공으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대라니.
게다가 다른 산적들도 적들에 의해 쓸려 나가고 있는 상황.
전장의 균형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성벽에 기대어 전력의 균형을 이뤄 왔다. 그것이 부서지는 순간, 이미 결과는 나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동이 떠오를 때까지 버텨 보려 했건만, 사위는 여전히 어두웠고 지금 상황에서는 1분도 길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답이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이리엘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도저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반항은 이제 끝난 것이냐? 앙칼지게 굴던 것치고는 별거 없는데?”
녀석이 씩 웃으며 다가왔다. 그 얼굴이 악마처럼 흉악하고 사악해 보였다.
“끝까지 한번 해보자.”
알렌의 말에 이리엘은 억지로 검을 바로 잡았다. 고작 저딴 놈한테 당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작 저딴 녀석이 성벽처럼 거대하게 다가온다.
그 앞을 막아서는 검은 그림자가 떨어진 건 그때였다.
낙뢰처럼 지반을 향해 수직으로 꽂히는 무언가.
콰앙!
그 검은 그림자를 받아 낸 지반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전장은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고,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 곳으로 향했다.
바람을 따라 점차 흩어지는 흙먼지.
그리고 그 사이로 드러나는 익숙한 뒷모습.
지금까지 했던 모든 고민이 먼지를 흩트리는 바람을 따라 덧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격에 찬 이리엘과 알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소리쳤다.
“제네스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