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제33화 괴인 (3)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베론은 입을 꾹 다문 노인의 눈치를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넋을 놓고 있던 노인이 주름진 얼굴을 잔뜩 구겼다.
“환영 마법에 내성이 있었던 건가? ……운이 좋았군. 하지만 두 번째 관문은 다를 것이다. 이곳은 날개가 없는 한 넘을 수 없는 곳이니까. 끌끌끌.”
다음 관문이 있음을 기억해 내고 금세 표정을 푸는 노인.
베론은 못으로 철판을 긁는 것 같은 듣기 거북한 웃음소리에 아랫입술을 물었다.
노인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자꾸 안 좋은 상상을 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사이 새로운 길로 들어선 일행들은 지금 막 너른 호수를 품은 공동에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그 앞에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공동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물로 가득 차 있는 까닭.
거기에 벽면은 이끼로 덮여 있었고, 종유석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천장은 고개를 들어야 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높아, 헤엄치는 것 외에는 건널 방법이 없어 보였다.
겉으로 봤을 때는 수면이 잔잔하니 위험할 것도 없는 호수였지만, 조금 전 환영을 겪었던 그들에게 그 잔잔함은 수상함으로 다가왔다.
뭍에 선 일행들은 물을 마셔도 보고 돌도 던져 보며 이것저것을 확인하는 듯 보이더니, 가방에서 꺼낸 밧줄을 알렌의 허리춤에 묶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노인이 썩은 이를 드러냈다.
“꽤 신중하군. 하지만 그런다고 건널 수 있을까? 저 호수는 잔잔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거센 소용돌이가 잠들어 있다고. 그래서 나는 이 관문을 ‘태풍의 늪’이라 이름 지었지.”
노인의 말에, 베론은 염려스러운 눈으로 알렌을 보았다. 밧줄을 허리춤에 단단히 묶은 알렌이 물가에서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뒤에서 협박하는 제네스도 보였다.
이리엘은 그 옆에서 주먹을 들고 알렌을 응원하고 있었다.
울상인 얼굴로 물에 들어간 알렌이 수영을 시작했다. 그의 몸에 묶인 밧줄은 제네스가 쥐고 있었다.
물살을 가르며 죽죽 뻗어 나가는 알렌.
그는 금세 호수의 절반쯤까지 이르렀다.
잔잔했던 수면이 요동치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고요했던 호수에 잔잔한 파문이 일더니 점차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급변한 환경에 알렌은 혼비백산하여 제네스가 있는 뭍으로 다급히 방향을 선회했다.
하지만 호수의 중심에서 수면이 움푹 꺼지며 소용돌이가 생겨나고 있었다.
알렌은 그 물살에 휩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점차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끌려갔다.
노인은 그 모습을 손가락질하며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마치 요강에 빠진 벌레 같구나!”
어찌나 즐거운지 배까지 움켜잡고 웃어댔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네스가 쥐고 있던 밧줄을 힘껏 채자,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알렌이 솟구친 밧줄을 따라 수면 위로 활어처럼 튀어 올랐다.
제네스에게 낚여 뭍으로 올라온 알렌은 물을 먹었는지 컥컥거렸고, 이리엘이 다급히 등을 두드려 주었다.
호수는 어느새 흉포한 기세를 접고 거짓말처럼 잠잠해져 있었다.
“……태풍의 늪을 확인했다만, 이제 어쩔 테냐? 네놈들이 과연 그곳을 넘을 수 있겠느냐!”
노인이 거울을 보며 혼잣말을 해 댔다.
제네스가 마치 노인의 말에 답하듯 움직였다. 그는 알렌과 이리엘에게 무어라 말하더니 그들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물가를 향해 달려갔다.
“저, 저……!”
노인과 베론은 그 광경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제네스의 손에 끌려가는 알렌과 이리엘은 허공에서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제네스가 호수 앞에 이르러 도약하자, 그의 걸음을 받아 낸 지반이 갈라지며 터져 나갔다.
그의 신형은 수면 위로 살짝 뜬 채, 앞으로 쭉 뻗어 갔다.
마치 물 위를 활공하는 백로와 같은 모습.
그 움직임을 따라 호수의 수면이 쐐기꼴로 갈라지며 물결을 일으켰다. 베론은 그 모습을 보며 제네스가 날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속도가 점차 줄고 있었다.
호수를 단번에 건너는 것은 무리일 듯했다.
“그, 그 정도로는 턱도 없지!”
물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제네스를 보며 노인이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이대로라면 노인의 말대로 물에 빠지고 말 터.
주먹을 움켜쥔 베론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상황을 지켜봤다.
“크헬헬헬! 멍청하기 짝이 없구나! 호수를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자신의 승리를 예감한 노인이 크게 웃었다.
속도가 준 제네스와 일행은 곧 호수에 빠질 듯했다.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건 바로 그때였다.
제네스가 수면 위로 발을 내리자, 동그란 파문이 일며 호수가 그를 받아 냈다.
믿을 수 없지만, 그는 분명 호수의 수면을 밟고 있었다. 그런 그가 다시 수면을 밀어내며 걸음을 박찼다. 그의 뒤로 거대한 물보라가 터져 나갔다.
수면을 박찬 제네스의 신형은 거짓말처럼 다시금 앞으로 나아갔다.
‘태풍의 늪’은 아무런 반응 없이 잔잔했고, 제네스는 어느새 반대편 뭍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가 알렌과 이리엘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함께 날아온 둘은 잠이 덜 깬 사람처럼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입을 쩍 벌린 노인은 제네스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잔뜩 굳은 노인의 얼굴이 관 속에 든 시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베론은 그 얼굴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지금까지는 불안한 마음에 노심초사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제네스를 막을 수 없다.
“이 쥐새끼들이!”
으르렁거린 노인이 방 한편에 기대어 있던 스태프를 집어 들었다.
지팡이 끝에는 푸른색 마정석이 영롱한 빛을 띠고 있었고, 그 내부에는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불같이 타오르는 퀭한 눈으로 베론을 쏘아보았다.
“태풍의 늪까지는 어떻게 잘 지났다만, 녀석들은 곧 그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내가 직접 녀석들의 사지를 찢어 줄 것이니까. 잘 보존해서 실험체로 써 주려 했건만, 감히 이 몸을 분노케 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주지. 너는 여기서 동료들의 처참한 죽음을 잘 지켜보거라. 나를 분노하게 한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될 것이야.”
한차례 으름장을 놓은 노인이 연구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바, 방금 뭐예요?”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이리엘이 혼이 쏙 빠진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반면, 물에 빠진 생쥐 꼴인 알렌은 황홀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습니다.”
“한심하긴. 일어들 나라.”
내가 한소리를 하자, 그들은 그제야 주섬주섬 일어나 가방을 고쳐 멨다.
“……이다음은 뭐가 나오려나.”
알렌이 깊숙이 이어지는 동굴을 보며 불안한 눈빛을 던졌다. 우리는 다시 좁고 고불거리는 길을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또 하나의 널찍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심에는 해골바가지 같은 깡마른 노인이 서 있었다.
관에서 지금 막 일어났다고 해도 믿을 법한 인상이었다.
“클클클, 여기까지 오다니 제법이구나.”
“아이는?”
곧장 본론을 물었다.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이유도 묻고 싶지 않을 만큼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이미 죽였지. 내 손으로 눈알을 파내고 내장을 끄집어냈느니라.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너희 또한 곧 그리 만들어 줄 테니까.”
알렌과 이리엘의 호흡이 흐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말했다.
“거짓이 서툴군.”
“멋대로 생각해라. 어차피 네놈들이 보게 될 건 아이의 시체일 뿐이니까.”
답하는 녀석의 표정은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보고 내가 떠본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베론은 살아 있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관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딱 보니 타인의 절망을 즐기는 변태 같은 놈으로 보이는데, 베론을 진짜로 죽였다면 거짓이라 의심하는 내 말에 더욱 즐거워했을 거다.
내가 나중에 느낄 절망을 상상하면서.
저런 변태 놈들의 취향이야 빤하니까.
“아르센오스!”
노인이 주문을 외며 스태프로 바닥을 찍자, 바닥에 검붉은 빛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흑마법의 일종인 듯했다.
마법진에서 피어나는 검은 운무.
그 사이로 깊은 울음이 들려왔다.
“……그르르.”
대형 몬스터가 분명한 그로울링과 함께, 육중한 거체가 운무를 헤집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체고가 4m에 이르는 거대한 트롤.
내가 알고 있던 트롤과 달리 가죽이 거뭇하고 동공이 안개가 낀 듯 뿌옇기에 헷갈렸지만, 트롤이 분명했다.
몬스터가 살아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나도 처음이었다.
나는 꽤 흥미롭게 녀석을 관찰했다. 그런 나를 보며 오해한 노인이 크게 웃어 댔다.
“크하하하! 공포에 몸이 굳었더냐?! 여태까지 시시했던 장난은 여기서 끝이다. 이 녀석은 체력이 무한한 데다 몸을 끝없이 회복하기에, 소드 익스퍼트 중급에 달한 기사도 가뿐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크헬헬!”
생긴 것에 비해 말도, 웃음도 참 많은 자였다.
“당장 저놈들을 죽여라!”
우리를 사납게 노려보며 육중한 위압을 풍겨 대던 녀석이 노인의 명령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몬스터를 길들인 건가?
눈이 회까닥 돌아간 트롤이 저돌적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덩치가 산만 한 놈이 달려드니 느껴지는 압박감이 제법이다.
화륵.
뇌운검의 칼날 위로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선명히 치솟은 검기.
나는 녀석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검을 휘둘렀다. 번쩍이는 섬광이 녀석을 향해 쏘아졌다.
초승달 형태의 비검기(飛劍氣).
검의 궤적을 따라 사선으로 기울어진 검기는 트롤을 반으로 가른 것도 모자라, 그 뒤에 서 있던 노인까지 함께 베어 버렸다.
그그그긍!
그리고 더 나아가 벽면에까지 사선으로 그어진 기다란 선을 남겼다.
단 일 검에 모두를 벤 것이다.
“……벌써 끝난 건가요?”
반으로 갈라져 쓰러진 트롤과 노인의 시체를 보며 알렌이 말을 더듬었다.
둘은 트롤을 맞이하려던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너무 싱거워서 실감도 안 나는데요?”
알렌은 자세를 바로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꽤 살벌한 전투를 기대했던 듯한데, 일부러 일 검에 끝냈다.
혼자라면 모를까, 베론이 인질로 잡힌 상태에서 마법사와 길게 어울려 줄 생각은 없었다.
어떤 마법을 부릴지 모르는 까닭.
게다가 여기는 녀석의 은신처.
속전속결이 가장 깔끔했다.
왜 이따위 짓을 벌였는지, 산속에 틀어박혀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답은 놈의 연구실에도 남아 있을 거였다.
마법사는 흔적을 연구실에 남기는 법이니까.
벽면 끝에 있는 문을 열자, 연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베론!”
의자에 묶여 있는 베론을 발견한 이리엘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알렌도 후다닥 뒤따랐고, 나는 그 뒤를 천천히 걸으며 녀석의 방을 살폈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베론을 묶고 있던 밧줄을 잘라 낸 이리엘이 베론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물었다.
“네! 하나도 다친 데 없어요!”
베론이 당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렌은 그런 베론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안 무서웠어? 씩씩하게 잘 있었네.”
알렌의 말대로 베론은 눈물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한 얼굴이었다.
“저 무서웠는데도 한 번도 안 울고 잘 참고 있었어요! 제네스 님이 구하러 와 주실 줄 알고 있었거든요!”
“네가 이것들보다 낫구나.”
나는 여태 호들갑을 떨던 알렌과 이리엘을 뭉뚱그려 말했다. 그리고 관심을 주변으로 옮겼다.
“이 변태 같은 작자는 산 구석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걸까요?”
베론을 안은 알렌 또한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이상한 시체 쪼가리부터 내용을 알 수 없는 시약들까지, 의도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방 안에 가득했다.
“저희를 막 종으로 삼겠다고 했어요!”
베론이 노인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줄줄이 읊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알 수 있는 바는 별로 없었다.
이런 미친놈들이 하는 짓을 범인이 어찌 이해하겠는가.
게다가 흑마법에 관해서라면 셋 다 문외한 수준이었다.
주변을 살피던 나는 책상에 올려진 두꺼운 책에 시선을 옮겼다.
표지의 가죽에서 세월이 느껴졌지만,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책의 이름은 「불멸의 도시」.
나는 책을 펼쳐 보았다.
적힌 글을 보니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왜요? 무슨 내용인데요?”
내 표정이 별로였는지 이리엘이 곁으로 다가왔다.
“룬어를 읽을 줄 아나?”
“아뇨.”
“마찬가지다.”
“아아.”
책에는 보기만 해도 어지러워지는 문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마법사의 언어인 룬어로 보였다.
“이만 나가자.”
흥미를 잃은 내가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미 죽은 놈이 무엇을 연구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제, 제네스 님!”
앞서 문을 나섰던 알렌이 다급히 나를 찾았다. 문을 나서니, 녀석이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못 볼 거라도 봤는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저, 저기.”
녀석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나는, 녀석의 얼굴이 왜 하얗게 질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감쪽같이 사라졌는데요?!”
알렌이 공동이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함께 같은 곳을 보고 있음에도 그랬다.
이게 아까부터 내 눈을 장식으로 보나.
나는 호들갑 떨지 말라는 의미로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치곤, 이상 현상이 발생한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폈다.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다.
분명 여기에 노인의 시체가 있었거늘.
잠깐 사이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