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제32화 괴인 (2)
“제네스 님! 베론이 없어졌습니다!”
알렌이 경악에 차 소리쳤다.
밤을 깨울 정도로 큰 소리였다.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랬다.
“내 눈은 장신구로 보이나 보지?”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는 녀석을 지나쳐 베론이 있던 자리로 갔다.
별다른 흔적은 없었다. 베론의 성벽이 되어 주던 짐들도 그대로였다.
알렌과 이리엘이 내 곁으로 쪼르르 달려와 기웃거렸다. 주변을 살피는 그들의 고갯짓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내가 말했다.
“아무래도 주변에 마법사가 있는 것 같다.”
“마법사요?!”
둘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고요한 밤을 뒤흔드는 고성.
이것들이 온 동네 몬스터들을 모두 불러들일 작정인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럴 확률이 높다. 우선 베론을 찾아야 하니, 짐부터 챙겨라.”
나는 쓸데없이 목소리만 큰 녀석들에게 임무를 내린 뒤, 뒤편의 절벽에 손을 대보았다.
밤의 냉기를 머금은 암석의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베론은 내가 수상한 기척을 베고 온 잠깐 사이에 사라졌다.
앞에서는, 전투 중이었다고는 해도 알렌과 이리엘이 떡하니 버티고 있던 상황.
그런 베론을 납치할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절벽 안에 비밀 통로가 있거나, 나는 고개를 들어 절벽 끝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저기를 통해서 납치했겠지.
절벽 내부로 기를 흘려보았지만, 별다른 공간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적 장치가 있었다면 기의 뒤틀림이 감지됐을 터.
절벽 위쪽에서 무슨 수를 썼을 확률이 높았다.
절벽 끝은 어둠에 잠겨 있었으나 그리 높지 않았다. 3층 건물 정도의 높이쯤 될 듯싶다.
고개를 들고 발을 구르자, 나는 어느새 절벽 위에 서 있었다.
눈앞에 어둠을 머금은 녹음이 넘실거렸다.
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숲길.
경관은 절벽 아래 숲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주변의 바닥을 샅샅이 살피며 혹시 남아 있을 흔적을 찾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풀잎 사이에 묻혀 있는 작은 단추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분명, 베론의 것이었다.
나는 내가 올라온 절벽 끄트머리와 단추를 발견한 장소 위로 가상의 선을 덧대었다.
그리하면 적이 나아간 방향을 유추할 수 있을 터.
나는 그렇게 그린 선으로 방향을 잡고, 다시 바닥을 샅샅이 살피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쪽으로 지나갔군.
자세를 낮추어 한 방향으로 누워 있는 풀을 쓸었다.
다행히 흔적이 뜨문뜨문 이어지고 있었다.
“뭐라도 발견하셨어요?”
알렌이 물었다.
그는 이리엘과 다급히 짐을 챙기고 절벽을 기어오르느라, 옷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다행히 흔적은 남아 있다.”
내 말에 둘은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일단 뒤를 쫓을 단서가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인 일.
가슴을 한 차례 쓸어내린 이리엘이 의욕적으로 눈을 떴다.
“뭘 도와드리면 돼요?”
알기로 그녀는 추적술에 일가견이 없었다.
내가 말했다.
“그냥 가만히 있거라.”
이리엘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다시 흔적을 좇아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
알렌 또한 이리엘에게 가방을 맡기고 바닥을 거미처럼 기며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뜨문뜨문 이어진 흔적을 따라 천천히 나아갔다. 나는 그것을 따르며 이자 또한 우리가 뒤따라오기를 바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흔적이 조금 인위적인 느낌 아니에요?”
알렌도 그것을 느꼈는지 땅에 처박다시피 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무래도 베론만이 목적이 아닌 듯하다.”
“그럼요?”
“우리도 노리고 있는 거겠지. 잘된 일이다. 베론을 쉽사리 죽이지는 않을 테니.”
마법사 녀석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또한 노리고 있다면 베론은 인질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무작정 죽이지는 않을 터.
내가 갈 때까지 살아만 있으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아이의 목숨이 달린 일.
상황을 속단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최대한의 속도로 흔적을 뒤쫓았다.
마법사와 마주하는 시간을 단축할수록 베론이 살아 있을 확률이 높아질 터였다.
* * *
칙칙한 지하 감옥처럼 암회색 석벽으로 이뤄진 방은 각종 실험 도구로 가득 차 있었다.
색색깔의 액체를 담은 플라스크부터 무언가를 째고 봉합하는 데 쓰일 것 같은 수술 도구까지.
다른 벽면에는 뿌연 연기가 일렁이는 투명한 유리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흐흐흥, 흐응.”
그 중심에 선 노인이 콧노래를 부르며, 검은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솥단지 안으로 플라스크에 담긴 액체들을 집어넣고 있었다.
묽은 액체가 솥단지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검붉은 빛이 번쩍이며 잿빛 연기를 피워 올렸다.
“좋아, 이 정도면 될 듯한데.”
노인은 옆에 놓여 있던 국자로 끓고 있는 검은 물을 휘휘 저었다.
국자의 움직임을 따라 무언가의 눈알, 무언가의 신체 조각들이 은근히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잠겼다.
국자를 솥단지 옆에 둔 노인은 한쪽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겁을 먹고 얼굴이 퍼렇게 질린 아이.
베론이었다.
베론은 의자에 꽁꽁 묶여 있어 움직일 수 있는 건 작은 머리통뿐이었다.
“클클클, 울지 않다니 제법이구나.”
노인의 입에서 그르렁거리는 거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생긴 것만큼 기괴한 음성이었다.
거적때기와 다를 게 없는 로브를 걸친 노인의 얼굴은 축 늘어진 살가죽이 두개골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 골격이 훤히 드러나 있었고, 눈 주변은 까만 동굴처럼 움푹 파여 퀭했다.
머리칼도 몇 가닥 없어, 꼭 해골이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쓴 것 같은 생김새였다.
“만약 울음소리로 내 심기를 건드렸다면 네놈의 혀를 뽑아 주었을 텐데 말이야.”
노인은 아쉽다는 듯 혓바닥으로 윗입술을 쓸었다. 그 모습을 보며 베론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아이치고 제법 의연한 모습이었다.
노인은 그런 베론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네놈은 내가 무섭지 않으냐?”
베론은 입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핏 겁에 질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빛이 공포에 질린 자의 것이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거다.
무언가를 알아챈 노인이 클클 웃으며 말했다.
“혹시 그놈들이 널 구해 줄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이냐?”
움찔하는 반응을 보니 맞는 듯하다.
“참으로 헛된 꿈이로구나.”
노인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베론의 턱을 들어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너와 네 친구들은 이곳을 살아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영혼이 소멸한 빈 육신으로 남아, 영원히 내 종으로 살아가게 될 테지. 물론 실험이 성공했을 때 이야기지만. 클클클.”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벌겋게 물들어 가는 베론의 표정이 마음에 든 듯했다.
“이제야 슬슬 겁이 나는가 보구나. 아주 마음에 드는 표정이다. 네놈은 영혼이 무엇인지 아느냐? 대답해라. 쓸모없는 혀를 뽑아 버리기 전에. 겁먹어서 말도 잊은 것이냐.”
“그, 그게 아니라 입 냄새가 너무 심해서…….”
베론은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노인이 말할 때마다 썩은 내가 코를 찔러왔다. 검게 썩어 문드러진 이를 보니 태어나 양치를 한 번도 안 한 사람 같았다.
베론은 입으로 숨을 쉬며 힘겹게 버텼다.
손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당장 코부터 잡았을 거다.
“어린 게 배포가 제법이구나. 클클.”
노인은 그런 베론이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베론은 의도치 않게 노인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포가 아니었다.
베론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억지로 누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베론이 이렇게 당돌하게 굴 수 있는 건, 제네스가 자신을 구해 주러 올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네가 널 구하러 온 이들의 죽음을 보고도 그 배포를 유지할 수 있을지 한번 보자꾸나.”
음흉하게 웃은 노인이 방구석에 놓여 있던 커다란 거울을 가져와 베론의 앞에 두었다.
“네게 절망을 보여 주마. 참으로 재밌을 거다. 나도 네 표정이 어찌 변할지 자못 기대되는구나.”
베론은 거울을 통해 온몸이 꽁꽁 묶인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노인이 왜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의 표정이 불안한 감정에 비해 제법 침착했다.
타악.
노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거울이 물결처럼 일렁이더니 새로운 세상이 담기기 시작했다.
거울의 표면은 어느새 베론이 아닌 다른 곳을 비추고 있었다.
“제네스 님!”
베론이 거울을 보며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알렌 삼촌! 이리엘 누나!”
베론은 어떤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제네스와 알렌, 이리엘을 볼 수 있었다. 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거울에 갇혀 있는 건가요?”
“클클, 벌써 요란 떨지 말거라. 이놈들은 지금 막 내 은신처에 진입한 것이니. 이 거울은 그 모습을 비추는 것뿐이다. 그들에게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인은 베론에게 더욱 큰 좌절을 주기 위해 본의 아니게 아이를 달랬다. 베론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을 믿고 있는 거겠지?”
노인의 빼빼 마른 손가락이 제네스를 가리켰다.
“내 감시의 눈길을 파악할 정도로 눈치가 빠른 놈이지. 하지만 녀석이 내가 만든 지옥의 세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까?”
어느새 제네스와 일행은 노인이 만든 첫 관문 앞에 서 있었다.
“이번 관문은 바로 ‘환상 지옥’이다. 이곳에 들어온 이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오크들의 환영을 보게 되지. 녀석들은 끊임없이 허공에 칼질하다 제풀에 지쳐 쓰러지게 될 거다.”
노인은 베론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관문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베론을 위해서라기보다 아이가 느끼게 될 절망이 목적이었다.
노인은 베론의 턱을 손으로 부여잡고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며 말했다.
“똑똑히 보아라, 네가 믿는 녀석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어느새 공동 중간에 이른 일행은 이상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허공에 무어라 소리치며 알렌과 이리엘이 검을 휘두르고 바닥을 구르며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벌였다. 노인은 그 모습을 보며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거라! 저들은 지금 공동을 가득 채운 오크 떼들과 필사의 전투를 벌이고 있느니라! 저렇게 홀로 헛춤을 추다가 체력이 고갈돼 제풀에 쓰러질 거라고!”
베론은 불안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노인은 그런 베론을 보며 더 크게 웃었다.
“크헬헬헬! 저놈들은 이미 거미줄에 걸린 파리 새끼와 다름없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겠지. 이제 알겠느냐? 너는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음이야! 켈켈켈!”
참으로 경박한 웃음이었다.
노인은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느라 다른 한 명이 가만히 있는 것은 미처 보지 못한 듯했다.
그때, 멀뚱히 서 있던 제네스가 움직였다.
그는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알렌과 이리엘에게 딱밤을 날려 주었다.
허공에 칼질하던 이들은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고, 이내 벌겋게 된 이마를 부여잡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둘은 갑작스레 사라진 오크에 얼빠진 표정이었다.
무심한 제네스는 그런 이들에게 무어라 핀잔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베론은, 알렌과 이리엘에게 못되게 말하는 제네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무언가를 두런두런 이야기한 그들은 다음 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어느새 웃음을 그친 노인은 그 모습을 침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