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제30화 참초제근 (2)
알렌이 주변을 포위한 기사들을 불안한 눈빛으로 살폈다.
“무슨 일이십니까?”
검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말 위에서 내려다보니 높이가 주는 압박감이 있었다.
개중 하나가 말을 타고 가까이 다가왔다.
한 손에 기다란 창을 쥔 자였다.
그가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지?”
“체즈웬성입니다.”
알렌이 바른대로 답했다.
이럴 때는 어설픈 거짓보다 비밀을 감춘 사실이 낫다.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니 비테로가 암살당한 걸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때문에 체즈웬으로 가고 있었겠지.
와중에 우리를 발견한 것이고.
대략적인 상황이 그려졌다.
사내는 위압적으로 질문을 이어 갔다.
“언제 출발했나.”
“3일 전에 나왔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알렌이 말끝을 흐렸다. 이번 답은 거짓이었다.
3일 전이면 비테로의 암살이 벌어진 당일.
늦은 밤에는 성문을 오갈 수 없으니, 우리는 자연스레 체즈웬에서 벌어진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된다.
기사는 강압적인 투로 말했다.
“신분패를 보여라.”
알렌이 우리의 신분패를 모아 한꺼번에 전달하며 설명을 보탰다.
“저희는 모두 주르아든 왕국에서 왔습니다. 팔레이트 상단의 소속이지요.”
기사는 알렌의 말을 들은 체도 않고 신분패만 유심히 살폈다. 동으로 된 신분패에는 이름과 나이, 출신 지역 등이 적혀 있었다. 나 또한 확실한 신분이 준비되어 있어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는 다시금 질문을 이어 갔다.
“어디로 가는 길이었지?”
“레논시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유는?”
“상단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조사차 가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건 이자가 압니다.”
알렌이 이리엘을 지목했다. 상단에 관한 일이라면 지부장을 맡아 본 그녀가 설명하는 게 낫다.
알렌 녀석, 제법 훌륭한 임기응변이었다.
하지만 기사의 시선은 이리엘이 아닌 그 옆에 붙어 있는 베론에게 향했다. 일행에 아이가 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 암살을 진행할 이들이 굳이 아이를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으니.
기사의 눈빛이 이번에는 내 허리춤으로 향했다.
“특이한 검을 사용하는군.”
뇌운검은 발렌시아 대륙의 검과 생김새부터 확연히 달라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비테로를 암살할 때도 롱소드를 든 것이었고.
“대륙 동쪽 끝에 있는 우르단 왕국에서는 이런 검이 유행한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신기하지요?”
알렌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에도 기사의 서늘한 눈초리는 내게서 떠날 줄 몰랐다.
“너는 입이 없나?”
이런 후레자식을 봤나.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 차올랐다. 녀석이 나의 좁쌀만 한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나는 치솟는 살심을 꾹꾹 눌러야 했다. 내가 이래서 짐 덩어리들을 데리고 다니기 싫어한다.
지키기 위해서는 참을 줄도 알아야 하니까.
후. 내가 어쩌다가 이런 놈들에게 휘둘리는 신세가 되었나.
마음을 다스린 나는 뭐라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리엘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이 사람이 원래 말을 못 해요…….”
“…….”
나는 목젖까지 튀어나왔던 목소리를 다시 눌렀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기사가 별안간 내게 창을 휘둘러 온 건 그때였다.
쐐액!
정말 난데없는 기습.
그럼에도 내게는 지루할 만큼 느리게 보였지만, 굳이 피하지 않았다.
살의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실력을 시험해 보려는 수작이 다분했다. 나는 반응 없이 그저 가만히 있었다.
미간 앞에서 정확히 멈추는 창촉.
창이 일으킨 바람이 앞머리를 들어 올렸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사색에 질린 알렌이 기사를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이리엘은 얼마나 놀랐는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기사는 여전히 내 이마에 창을 겨누고 있었고, 나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왜 피하지 않았지?”
그가 물었다. 내가 창끝을 바라봤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걸 어떻게 피해요!”
이리엘이 눈을 사납게 뜨며 소리쳤다.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녀석은 말머리를 돌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에게 말했다.
“가자.”
투레질한 말들은 금세 검은 바람이 되어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런 개자식들!”
알렌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녀석들의 뒤꽁무니를 향해 삿대질하며 분을 풀었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이리엘이 옆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정말 죽는 줄 알았잖아요.”
“고작 그런 것에 죽을까.”
“아, 예. 참 훌륭하시네요.”
건성으로 답한 이리엘은 알렌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나저나 알렌 형님! 진짜 멋졌어요. 임기응변이 이렇게 뛰어나실 줄이야.”
“뭐, 이 정도 가지고. 하하.”
한껏 어깨가 올라간 알렌이 가슴팍을 내밀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내 꿀밤 덕에 머리 회전이 빨라진 게 분명했으나,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웃음을 자르며 말했다.
“계획을 달리 해야겠다.”
“네? 어떤 계획을요?”
“크테러산맥을 넘는다.”
“예?! 갑자기 왜요?”
알렌이 코 평수를 확장하며 물었다.
나는 까마귀 기사단이 사라진 숲 쪽으로 시선을 두며 답했다.
“저들을 죽여야겠다.”
“네?!”
알렌과 이리엘이 화들짝 놀라며 동시에 반문했다.
알렌은 굉장히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제네스 님께 창을 겨눈 것은 괘씸하지만 이미 지나갔는데 그냥 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나는 황당한 시선을 알렌에게 던졌다.
이 자식이 사람을 뭘로 보고.
“내가 고작 그것 때문에 그러겠냐?”
둘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무언의 긍정에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놈들하고 같이 다녀야 한다니.
“저들이 체즈웬 영지로 가면 무엇을 하겠느냐?”
나는 이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분명 암살자를 찾으려 할 거다. 영지 밖에서 온 이들의 명부 확인은 당연한 수순이겠고. 그런데 그 명부에는 내가 없다.”
“아.”
둘은 짧게 탄성을 터트렸다.
나는 일부러 명부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체즈웬에 내 흔적 자체를 남기지 않을 작정이었으니까.
외부로 나갈 때는 기척을 감추고 움직였다. 영지민들은 내가 옆을 지나쳐도 나를 보지 못했을 거다. 그런 이유로 체즈웬에서 나는 거의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까마귀 녀석들은 나를 보았다. 내가 알렌, 이리엘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고, 신분패도 확인했다.
내 존재가 명부에 없는 걸 보면 우리를 수상하게 여길지도 몰랐다.
그러면 알렌과 이리엘과 함께 움직였던 코레른이 엮일 가능성이 생긴다.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갈 확률이 높지만, 그것에 기대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미 상공에 있던 까마귀를 본 순간부터 그들을 모두 죽이겠다, 마음먹은 상태였다.
살인멸구(殺人滅口)는, 화근을 완전히 없애는 참초제근(斬草除根)의 가장 좋은 수.
이것은 내가 조금이나마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은 어차피 내 손에 죽을 자들이었으니까.
* * *
첨탑을 이루던 잔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사선으로 잘려 나간 첨탑의 상단부가 바닥에 떨어져 만들어진 흔적이었다.
“믿을 수 없군.”
까마귀 기사단의 2소대장, 에르카는 내원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대충 훑어보아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심지어 내원에는 보안 마법까지 설치되어 있던 상황.
바닥에 선명히 찍힌 발자국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백여 명의 위병이 있던 이곳에서 소드 익스퍼트 중급에 이르렀다고 평가되는 비테로를 죽였다.
그것도 혼자서.
내원을 훑어본 에르카는 첨탑의 계단을 따라 상층부로 올라갔다.
천장이 뻥 뚫려 있어 하늘을 향해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꼭대기에 이르자 훤히 트이는 시야.
사방이 하늘이다.
세찬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었다.
에르카는 그 바람을 맞으며 첨탑의 절단면을 살폈다. 손가락으로 쓸어 보아도 거친 단면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말끔했다.
첨탑을 단칼에 베었음에도 검의 예기가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의미.
그의 머리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무위였다.
적어도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자일 거였다.
“아무래도 찾은 듯하군.”
적의 경지를 유추한 에르카는 확신할 수 있었다.
비테로를 죽인 암살자가 3소대를 전멸시키고 국새를 가져간 자와 동일 인물이란 것을.
자신들은 한 달 전, 3소대가 전멸했었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국경 근처로 파견된 상태였다.
그러던 중, 체즈웬성의 소식을 듣게 되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고.
‘예상대로 그자였어.’
펼쳐진 상황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정도의 무력을 가진 자가 북부에서 갑작스레 둘이나 나타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자는 자신들이 찾던 인물이 분명했다.
“소대원들 모두 집결하여 대기하도록.”
“예.”
뒤편에서 보좌하고 있던 기사가 명을 받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소대원이 떠난 후에도 에르카는 그곳에 남아 한눈에 담기는 체즈웬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특임대를 요청해야겠어.’
이자의 무위를 보았을 때, 자신들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익스퍼트 최상급이라면 인간의 탈을 벗어난 자.
마찬가지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자들만이 상대할 수 있었다.
특임대는 바로 그런 비대칭 전력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
1개 소대가 1개 기사단을 상회하는 힘을 가진 총독부의 진정한 검.
그들이 나서야 이자를 감당할 수 있을 듯했다.
잠시 후, 첨탑을 내려간 에르카는 집결해 있는 소대원들을 볼 수 있었다.
에르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직도 도착을 안 한 조가 있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까마귀 전령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겁니다.”
2소대는 현재 12명씩, 세 개 조로 나뉘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개 조의 도착이 다른 조에 비해 유난히 늦어지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려던 찰나, 때마침 보냈던 까마귀 전령으로부터 신호가 왔다.
전령을 보냈던 1조 조장의 검지에 끼워진 반지가 은은한 푸른빛을 뿜어내며 진동하고 있었다.
“확인해 보도록.”
에르카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가 눈을 감았다. 까마귀 전령에 접촉하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 그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고 눈을 떴다. 에르카는 그 상황만 보고도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직접 확인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 있던 반지를 에르카에게 건네며 조심스레 말했다.
“3조가 전멸당했습니다.”
에르카의 눈동자가 한 차례 흔들렸다. 그는 반지를 낚아채듯 가져와 손가락에 끼웠다.
눈을 감고 마력을 집중하자, 캄캄한 어둠이 옅어지며 연기처럼 일렁이는 잿빛의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까마귀 전령을 통해 보는 세계.
선명하지는 않지만, 사물을 분별할 정도는 되었다.
“…….”
에르카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엉망이 된 숲속.
꺾인 나무와 뒤집힌 지반 사이로 소대원들의 시체가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거꾸로 박혀 있는 창대.
그것에 매인 프렌치아의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